“한국 대통령선거에서 평화·복지가 쟁점이 되고 구체화시킬 정책들이 활발히 논의된다면 질적으로 한 단계 발전하는 것”

< 본 글은 월간 폴리피플 2011년 2월호(19호) ‘COVER STORY’에 게재되었습니다. >

정책선거의 전개과정

선거에서 유권자들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는 정당과 정책 그리고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선거에서 정책요인이 중요 변수로 등장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의 경우 미국의 지원과 함께 오랜 해외 독립운동 경력을 내세우며 특별한 경쟁 없이 국회의 추대 분위기 속에서 선출되었다. 이승만은 남북분단을 정치적으로 활용해 반공을 내세우며 권력기반을 강화해 나갔다. 6.25 전쟁 와중인 1952년 실시된 2대 대통령 선거는 직선제 개헌으로 이루어졌지만 엄중한 전시상황으로 인해 이승만은 74.6%의 득표로 압도적으로 당선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종신 집권을 위한 사사오입 개헌을 단행한 이후에 실시된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이승만은 유력한 경쟁자였던 제1야당 민주당의 신익희 후보가 유세 도중 사망하여 유효표 70% 득표로 당선되었다. 하지만, 제 3당인 진보당 후보로 출마했던 조봉암은 이승만의 허구적인 북진통일론에 맞서 평화통일론을 주창하며 유효투표 30%대(216만표)의 득표를 올렸다. 전쟁이 끝난 지 오래되지 않아 진보를 표방한 후보가 반공 일색인 사회분위기 속에서 평화통일론을 제시한 것은 대단한 의미가 있다. 한국 대통령 선거에서 당시 조봉암 후보가 제시한 평화통일론은 정책적 요소를 지닌 최초의 접근이라 할 수 있다. 조봉암은 자신이 주창한 평화통일론이 빌미가 되어 이승만 정권에서 간첩혐의로 처형되었지만 최근 52년 만에 무죄 판결을 받아 당시 권력에 의해 사법살인 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1960년 실시된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야당의 조병옥 후보가 정권의 부패와 무능으로 인해 이반된 민심을 바탕으로 이승만 후보와 접전을 벌일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선거 직전 병사하면서 이승만은 무투표로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부통령 선거에서 저질러진 부정선거로 인해 4.19 혁명이 발발하여 이승만 독재체제는 붕괴되고 말았다.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민심을 바탕으로 집권한 민주당의 장면 정권은 내각제를 실시하며 민주체제 건설과 경제성장을 내걸었지만 제대로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1년여 만에 군부쿠데타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 세력은 반공체제 강화와 경제재건을 내세우며 권력기반을 강화해 나갔다. 그러나 1963년 민정 이양 이후 실시된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야당의 윤보선 후보에게 15만여 표 차이로 근소하게 승리하는데 그쳤다. 1967년 실시된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박정희 후보가 야당 단일후보인 윤보선 후보를 100여만 표 차이 이상으로 따돌리고 여유 있게 승리했다. 이는 박정희 정권이 공업화 정책의 성과를 바탕으로 지속적인 경제건설을 내건 것이 주효했고 윤보선은 이미 노쇄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69년 3선개헌 이후 실시된 1971년의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박정희 후보가 쉽게 이기리라는 예상을 깨고 야당의 40대 후보 김대중이 당시로는 혁신적인 정책공약들을 제시하며 선거전을 주도했다. 3단계 통일론과 지금의 6자회담을 연상하게 하는 4대국 안전보장론 등을 외교·안보·통일 공약으로 제시했으며 경제에서도 대기업과 수출 위주의 경제성장론에 대비되는 중소기업 육성과 내수산업 기반확충을 강조하는 대중경제론, 균형발전론을 제시했다. 그뿐 아니라 군사정부의 서슬이 시퍼런 상황에서 향토예비군 폐지와 같은 공약을 제시하며 거센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이 같은 정책 공약들은 당시 선거에서 유권자들의 비상한 관심을 촉발시키며 박정희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우세할 것이란 예상을 깨고 선거전을 백중세로 만들어 나갔다. 이처럼 1971년 7대 대통령 선거는 우리나라 최초의 정책 공약에 의한 선거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선거 결과는 금권과 관권 그리고 지역주의 공세 등을 통해 박정희 후보가 90여만 표 차이로 승리했고 김대중 후보는 선전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정책 경쟁의 배제, 실종 (10월 유신과 5.17 쿠데타)

박정희 정권이 1972년 단행한 10월 유신은 한국정치의 암흑기를 초래했다.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선출하는 대통령 직선제가 폐지되었고 1인 후보를 놓고 선거인단에게 지지여부를 묻는 방식으로 바뀐 것이다. 대통령 종신 집권의 길이 열렸으며 일체의 정치적 도전을 허용하지 않는 긴급조치를 앞세운 강고한 독재체제가 들어선 것이었다. 정치적 반대 진영의 비판과 도전을 허용하지 않는 상황에서 정책경쟁은 배제되고 실종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실시된 제8대 대통령 선거에서 제11대 대통령 선거 때까지 체육관에 모인 선거인단에 의해 1인 후보에 대한 찬반투표 행태의 선거가 진행되었다. 신군부 집단에 의한 12.12 쿠데타 5.17쿠데타와 광주학살 이후 제5공화국 헌법으로 실시된 제12대 대선 역시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로 실시되었고, 몇 사람이 들러리 후보로 나서기는 했지만 전두환이 유효표의 90.2%를 득표하여 당선되었다. 이 시기(1973∼1987년) 한국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정당이나 정책, 인물 경쟁이 실종되었고 오직 독재 대 민주, 민주 대 반민주 구도에서 절차적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한 운동의 정치만이 성립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는 제한적이나마 민의가 분출되었고 1978년 실시된 10대 총선에서는 야당인 신민당의 득표(32.8%)가 여당인 민주공화당 득표(31.7%)를 앞지르는 현상을 나타내면서 민심이 완전히 이반되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1979년 강고했던 유신독재가 종말을 고한 것도 이러한 민심의 이반과 민주화를 염원하는 세력의 끈질긴 투쟁의 결과라 할 것이다. 전두환 정권에서 1985년 실시된 제12대 총선에서도 민심을 등에 업은 야당세력이 급조한 신한민주당은 소위 2중대로 일컬어지던 어용야당인 민한당을 누르고 제2당으로 약진하며 전두환 정권을 위협하는 유력한 도전세력으로 부상했다. 1987년 6월항쟁으로 전두환 정권의 항복을 받아내어 대통령 직선제의 부활을 쟁취한 것은 민주화운동 세력의 피 흘린 투쟁과 더불어 민심에 부응하는 정치세력이 한데 뭉쳐 이룬 성과였다.

정당, 정책, 인물 경쟁의 부활

1987년 6월항쟁 이후 실시된 대통령 직선제 개헌으로 제13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전두환 정권을 계승한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와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후보, 평화민주당의 김대중 후보와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후보가 경합한 대선에서는 야권의 단일화 실패로 노태우 후보가 승리했다. 김영삼, 김대중 양 후보는 민주화라는 큰 시대정신을 공유했지만 후보단일화에 실패했고 민주진영의 분열로 인해 정권교체에 실패하고 말았다. 김대중 후보가 정책에서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입장을 취해 재야 민주세력 다수의 지지를 확보했지만 투욕, 망명 등으로 정치일선에서 벗어나 있었던 기간이 길었던 취약점이 있었고 지역기반에서도 김영삼 후보에 뒤졌다. 이처럼 13대 대선에서는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 이후 모처럼 본격적인 선거가 전개되었다. 각 후보들은 나름의 정책과 공약을 제시했지만 여전히 독재 대 민주의 진영구도가 우선되었다. 신 군부출신으로 민주화의 시대정신에 약점이 있었던 노태우 후보의 경우 자신의 이미지를 ‘보통사람’으로 만드는데 총력을 기울여 일정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후보들의 정책능력 비교는 선택기준에서 하위개념에 머물고 말았다.

1992년 제14대 대선은 오랫동안 민주진영의 유력한 지도자였던 김영삼이 3당합당을 통해 보수대연합을 이룬 이후 보수진영의 대통령 후보로 등장함으로써 다시 김영삼-김대중의 맞대결 구도로 치르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한국 최대 재벌그룹 중 하나인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이 대선에 뛰어듦으로써 3인이 경합하는 양상으로 선거가 진행되었다. 14대 대선에서도 가장 중요한 쟁점은 인물과 정책 경쟁이라기보다는 정권을 계속 이어가려 하는 보수세력과 정권교체를 이루려는 민주세력 간의 진영 대결구도라고 볼 수 있다. 아울러 13대 대선 이후 강고하게 자리를 잡아가는 지역구도가 어느 선거보다 큰 영향을 끼친 선거이기도 했다. 선거 막판에 벌어졌던 ‘초원 복국집’ 사건이 오히려 영남표 결집으로 연결되는 기막힌 현상을 보이기도 했다. 주목할 점은 이 선거에 출마했던 정주영 후보의 경우 반값 아파트, 2층 고속도로 건설 등의 경제와 건설 분야 그리고 북한 경제개발 지원을 약속하는 등 눈에 띄는 정책공약들을 제시했던 것은 이채롭다.

정책과 선거연합

1997년에 실시된 15대 대통령 선거는 정책을 매개로 선거연합을 이룬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와 새정치국민회의의 김대중 후보의 대결구도에 한나라당에서 이탈한 이인제 후보가 가세하여 범 보수진영이 분열된 가운데 대선을 치르게 되었다.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김대중 후보의 경우 자민련의 김종필과 DJP 연합을 통해 대선에 임했는데 이 당시 양당은 내각제와 권력분점 등을 문서로 합의하고 선거연합을 이루었다. 물론 1990년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의 3당합당 과정에서도 내각제 합의각서가 존재했고 이 때문에 나중에 김영삼의 경우 정치생명을 걸고 노태우 대통령의 내각제 포기 약속을 받아내는 과정을 거쳤지만 국민에게 공개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DJP 연합은 내각제 합의뿐만 아니라 양당이 주요 정책에서도 향후 힘을 합친다는 공개 합의를 했고 이를 일정하게 이행했다는 점에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이념과 노선이 다른 세력들 간에 집권이라는 정치적 이해관계를 충족시키기 위한 야합이라는 비난도 있다. 이밖에도 IMF 위기상황에서 김대중 후보가 준비된 대통령이란 이미지를 국민에게 줄수 있었고 이인제 후보의 등장으로 영남 특히 PK지역 표가 분산된 것도 최초의 정권교체를 가능케 했던 원인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김대중 후보의 경우 일관되게 남북문제에 있어 적극적인 입장을 보였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도 과거와 달리 국민들에게 긍정적인 변화 가능성으로 평가받은 측면이 있었다.

2002년 제16대 대선에서는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와 민주당의 노무현 후보가 경합했다. 이 선거에서 가장 주목할 대목은 노무현 후보가 제시한 충청지역으로의 행정수도 이전 공약이었다. 충청의 경우 이회창 후보의 출신 지역으로 한나라당의 우세가 점쳐지는 지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연고도 없었던 노무현 후보가 이 공약 하나로 충청지역의 표심을 얻는데 성공한 것은 한국 대통령 선거 역사상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정책공약이 후보 결정에서 중요한 변수가 될 수 있다는 실증적 사건인 것이었다.

이외에도 이회창 후보의 도덕적 이미지가 많이 훼손되었고 정몽준 후보가 노무현 후보와 단일화를 이룸으로써 일정 정도 중도보수 표를 분산시킨 요인 등도 지적할 수 있지만 노무현 후보 승리의 최대 요인이 행정수도 이전 공약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한편 이 선거에 민주노동당 후보로 출마한 권영길은 부유세 도입 등을 주장함으로써 정책선거 논의에 불을 붙였다.

2007년 실시된 1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이명박 후보의 경제 공약이 주효했다. 대통합민주신당의 정동영 후보, 창조한국당의 문국현 후보 등도 경제공약을 내걸었지만 이명박 후보가 서울시장 직을 수행하면서 청계천 건설 등에서 보인 추진력이 국민들 뇌리에 강하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노무현 정부에서 서민 경제가 오히려 나빠졌다는 인식과 아파트 값 폭등 등으로 경제에 무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것이 이명박 후보에게 결정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했던 것이다.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본선과정보다 오히려 한나라당 내부 경선이 더 긴장감 있게 진행되었고 이명박 후보가 여기서 승리하면서 일찌감치 승부를 갈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BBK 사건 등 이명박 후보에게 약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대세는 이미 어떤 문제점이 있더라도 경제를 살릴 후보를 선택하겠다는 민심이 작동했다고 볼 수 있다.

2012년 대선과 정책요인

지난 2010년 지방선거에서 무상급식 문제가 쟁점이 되면서 정책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아울러 지난해 천안함 사태와 연평도 피격 그리고 김정은 3대 세습 문제 등으로 남북문제에 대한 관심 또한 급속히 높아지고 있다. 이제 2012년 실시될 대선에서 한반도 평화와 안보 그리고 국민의 삶의 질과 관련된 복지 문제가 중요한 쟁점이 될 것이란 분석이 대체로 우세하다.

그런데 지금까지 한국 대선에서 남북관계는 보수세력에게 유리한 선거 이슈이거나 심지어는 대선에 즈음한 북풍으로 보수세력이 결정적인 승기를 잡기도 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지만 2010년 지방선거에도 드러났듯이 이제 남북문제가 더 이상 보수세력에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란 분석은 유효하지 않다. 더구나 이명박 정부가 안보에 무능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앞으로 전개될 남북문제의 양상이 다가올 대선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는 예측하기 쉽지 않다. 또한 이 문제가 단순히 남과 북에 국한된 사안이 아니라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주변국가와의 외교관계에도 밀접하게 연관되기 때문에 대선에 나설 후보들의 경우 치밀한 준비가 요구되는 부문이라 할 것이다.

아울러 교육과 보육문제, 전세대란, 실업난 그리고 노령화 시대 도래에 따른 노인 부양문제 등의 사안들은 복지문제가 더 이상 늦춰질 수 없는 국민적 관심사임을 반증하고 있다. 이미 여야의 대권 주자들이 복지문제와 관련하여 다양한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앞으로 대선에 가까워질수록 복지의 대상범위와 수준 그리고 재정 부담 능력과 재원 조달 방안 등에 대한 논란이 뒤따를 것이지만 이 문제에 대해 나름의 해법을 제시하지 않고 대선에서 국민의 지지를 모으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울러 진보진영의 경우 평화와 복지 문제는 핵심 정책 사안인 동시에 통합과 연대의 승패를 가름할 고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진보진영을 아우르는 대표주자가 되려 할 경우 이 문제에 대한 진지한 해법과 국민을 구체적으로 설득할 내용을 가져야 할 것이다. 한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평화와 복지의 문제가 쟁점이 되고 이를 구체화시킬 정책들이 활발하게 논의된다면 이는 선거의 내용면에서 질적으로 한 단계 발전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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