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 4년의 남북관계: 고집과 오기와 오판

김근식(경남대 교수, 정치학)

전임정부의 대북정책을 ‘실패’로 규정한 이명박 정부는 대북 포용 대신 압박과 봉쇄를 고집함으로써 최악의 한반도 상황을 맞이하고 말았다.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적십자회담 제의에 북한이 대응은 커녕 통지문 수령조차 거부하는 형국이다. 뒤늦게 북한과 채널이라도 복구하려 해도 이젠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가 되어버린 완전 파탄의 남북관계를 반증하는 것이다. 김정은 체제 등장이라는 북한의 최대 정치적 변동기에 이명박 정부는 아무런 관여도 개입도 허용되지 않은 채 그저 북한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이 모든 것은 남북관계 망실을 초래한 이명박 정부의 총체적 실패의 결과이고 지난 4년은 꾸준히 남북관계가 경색되고 파탄되는 과정이었다.

ABR(Anything But Roh)로 시작된 이명박 정부의 非포용(non-engagement) 정책은 '비핵개방 3000'과 '그랜드 바겐'이라는 선북한변화론과 선북핵포기론의 덫에 갇혀 임기 내내 하염없는 ‘기다림’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기다림의 결과는 북의 변화와 굴복이 아니라 강경대응과 긴장고조였고 결국 남북관계는 실종되고 말았다.

정권교체로 등장한 이명박 정부는 ‘잃어버린 10년’이라는 정치적 평가를 대북정책 분야에 가장 혹독하게 적용했다. 전임정부의 대북정책이야말로 퍼주기와 끌려다니기로 일관하면서 북한의 버릇을 고치지도 북한을 제대로 변화시키지도 못한 채 핵능력만을 증대시켜줬다는 평가에 철저히 기초했다. 따라서 6.15 공동선언과 10.4 정상선언은 애초부터 부인되어야 할 것이었다. 북한과의 공식 합의를 원천부인하고 나선 이명박 정부에 대해 당연히 북은 부정적 반응을 보였고 출범 초기부터 남북관계는 삐거덕거리기 시작했다. 지어주기로 한 개성공단 기숙사를 집단소요 운운하며 미루고 전임 정부가 합의한 옥수수 5만톤 제공도 조건을 걸어 연기시킨 이명박 정부의 합의 불이행은 남북관계의 첫 단추를 잘못 끼기에 충분했다. 결국 개성공단 확대를 북핵문제와 연결시킨 김하중 통일부 장관의 발언을 계기로 북은 경협협의사무소 폐지 등의 대응조치를 강행했고 서로 감정의 골은 깊게 패이기 시작했다.

정부의 공식 대북정책으로 내놓은 이른바 ‘비핵개방 3000’ 구상은 북한의 선변화를 전제 조건으로 걸어 남북관계의 진전을 연계해놓은 논리적 구조인 탓에 처음부터 북한의 반발을 사고 말았다. 북이 먼저 핵을 포기하고 개방으로 나서야만 남북관계가 가능하다는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은 어떤 식으로든 북이 굴복해야만 대북지원과 남북협력이 가능해지는 갑을관계의 과시였지만 북한과 관계를 지속하기엔 지나치게 오만한 입장임이 분명했다. 비핵개방 3000은 상대방이 도저히 받을 수 없는 운명으로 인해 대북정책으로서의 효용성은 처음부터 불가능했고 오히려 국내용 정당화 담론의 성격이 더 강해 보였다. 비핵화와 개혁개방이라는 목표만 반복되어 강조될 뿐, 북한을 그 목표로 이끌어 낼 수 있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해법과 수단은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은 북한의 버릇을 고치고 북에 끌려가지 않겠다는 과도한 의욕과 고집만 있었을 뿐, 정작 어떻게 북을 변화시킬 것인지의 해법과 실천은 존재하지 않았고 따라서 처음부터 실패는 예고되어 있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국회 개원 연설에서 처음으로 6.15와 10.4 선언을 언급하던 날, 금강산에서 박왕자씨 사망사건이 터진 것은 최대의 불운이었다. 이후 남북관계는 상호 감정적 대응과 원칙적 강경함이 맞교환되면서 돌이키기 힘든 지경으로 치닫게 되었다. 금강산 관광객 사건 해결과 관광재개를 놓고 남북은 평행선을 달리는 입씨름만 거듭했고 갈수록 상황은 악화되었다. 남측 민간단체는 김정일 타도를 주장하며 대북 삐라를 날리기 시작했고 이에 반발한 북은 군사분계선 통과제한 조치를 일방적으로 시행하면서 개성공단까지 위협받기에 이르렀다. 업친 데 덥친 격으로 김정일 위원장의 건강악화가 알려지면서 이명박 정부는 북한 급변사태를 내심 기대하게 되고 북은 후계체제 구축을 위해 전력을 기울이게 되면서 남북관계는 갈수록 회복 불가능해 보였다.

해를 바꾼 2009년에도 남북관계 악화는 돌이키기 어려웠다. 오바마 민주당 정부의 등장으로 북미관계 진전을 내심 기대했던 것과 정반대로 북한은 미사일 발사와 2차 핵실험을 강행하면서 한반도 정세는 긴장이 증대되었고 결과적으로 남북관계는 악화일로의 구조적 상황에 빠져 들었다. 남북관계 경색에 더하여 북핵문제가 악화되었고 이는 다시 남북관계 경색을 가속화하는 악순환에 들어선 것이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경색과 대결을 지속하던 남북관계가 그나마 정상화의 가능성을 보였던 것은 2009년 하반기 북의 잇따른 유화조치 공세 기간이었다. 클린턴 전대통령의 방북 이후 현대아산의 현정은 회장의 방북이 성사되었고 북은 억류했던 개성공단 직원을 석방하고 연안호를 송환해주었다. 평소 식량지원을 매개로 이뤄졌던 이산가족 상봉도 북이 먼저 제의해 성사되었다. 개성공단을 위협했던 군사분계선 제한조치도 북이 스스로 해제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일련의 대남 유화조치를 남북관계 정상화의 기회로 간주하기보다는 북한이 드디어 굴복한 것으로 착각하면서 북이 내민 손을 마주잡는 대신 오히려 대북 압박을 강화하면 완전굴복을 받아낼 수 있다는 오판에 빠져 있었다. 결국 이명박 정부는 2010년 2월 금강산관광 실무회담에서 북이 간절히 바라던 관광재개를 끝까지 거부함으로써 북한 스스로 내밀었던 관계 정상화의 기회를 걷어차고 말았다. 이후 북한은 더 이상 이명박 정부와 진지한 관계 개선을 모색하지 않았다.

돌이켜 보건대 임기 동안 유일한 관계 회복의 계기였던 2009년 하반기 북한의 대남 양보조치의 기회를 이명박 정부는 뿌리친 것이었고 이후 남북관계는 영영 돌이키기 힘든 길로 접어들었다. 오판에 토대해 2009년의 기회를 걷어차버린 이명박 정부는 북의 버릇을 고치기는커녕 오히려 최악의 군사적 긴장고조에 봉착해야만 했다. 북이 굴복할 때까지 버틴다는 이른바 ‘기다림’의 전략은 결과적으로 북의 도발과 한반도 위기 고조만을 야기할 뿐이었다.

2010년의 천안함 사태와 연평도 포격은 이제 이명박 정부 임기 동안 남북관계가 개선될 여지가 없음을 남과 북이 서로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천안함 침몰을 북의 소행으로 결론내린 이명박 정부는 천안함과 연평도 사태에 대한 시인과 사과를 대화재개의 전제조건으로 걸어 버렸고, 북은 당연히 수용 불가능한 전제조건에 응하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는 스스로 던져 놓은 천안함과 연평도의 ‘덫’에 걸려 향후 남북관계를 돌파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긴장고조의 남북관계를 지속할 수도 없는 진퇴양난에 빠지고 말았다.

북의 도발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면서 이명박 정부는 자신의 대북정책을 반성하고 성찰하기보다는 오히려 붕괴직전의 북한이 저지르는 비정상적 도발행위로 간주하고 급변사태 임박론을 주관적으로 되뇌이곤 했다. 임기 후반 이명박 정부는 급속도로 북한 붕괴 대망론에 몰입하게 된 것이다. 연평도 포격 이후 대통령은 특별담화에서 ‘더이상 북한의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자괴감과 함께 부쩍 통일의 당위성을 언급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통일이 가까이 오고 있다’거나 ‘통일이 도둑처럼 온다’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2010년 하반기 이후 내내 통일부의 최대 업무는 대통령이 거론한 통일세 재원마련과 통일 공론화 사업이었다.

군사적 긴장고조와 뜬금없는 통일준비에 주력했던 2010년 이후 2011년에도 남북관계는 천안함과 연평도라는 덫에 걸려 한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연초 미중정상회담 이후 북한의 잇따른 대화제의가 있었지만 이명박 정부는 ‘시인과 사과’라는 수용불가능한 전제조건을 내세워 당국간 대화를 계속 결렬시켰다. 심지어 베이징 비공개 접촉은 관계 개선의 돌파구가 아니라 돈봉투 논란이 불거지면서 관계 악화의 악재로 작용하고 말았다. 간헐적 대화 제의와 군사적 긴장 지속이 교차하면서 미국은 북한과 협상을 시작해야 했고 결국 남북 비핵화회담이라는 형식적 단계를 거쳐 북미협상이 시동을 걸게 되었다. 두 차례의 남북 비핵화 회담이 개최되었지만 이는 북미협상으로 가기 위한 생색용 사진찍기 회담이었고 남북관계는 여전히 사실상 대결 상태를 지속했다.

2011년 하반기 류우익 장관의 취임으로 이른바 ‘방법론적 유연성’을 모색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3년 반을 고집과 오기와 오판으로 허송세월을 보내고 만 탓에 관계 개선의 시도는 이미 실기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이명박 정부 스스로 쳐놓은 천안함의 덫을 통일부 장관이 빠져 나오기엔 역부족이었고 대통령의 완고한 대북인식이 여전했고 보수 진영의 줄기찬 반대 역시 극복하기 힘들었다.

전임 정부에 대한 정치적 부인과 선북한변화론에 입각한 기다림의 무모한 전략, 북이 내민 손을 뿌리치면서까지 북을 굴복시키려 했던 고집과 오기, 그리고 찾아온 군사적 긴장고조의 정치적 부담을 다 겪고 나서야 뒤늦게 이명박 정부는 남북관계 개선의 실마리를 찾아보려 했지만 이미 기차는 지나간 뒤였다. 너무 가버린 탓에 이명박 정부도 자신의 입장과 노선을 돌이키기 힘들었고 이미 이명박 정부에 대한 기대를 포기해 버린 북한 역시 관계개선의 의지를 보이기 어려웠다. 더욱이 2011년 말에 닥친 김정일 위원장 사망 국면과 김정은 체제 등장은 남북의 기싸움을 더욱 첨예하게 만드는 조건이 되었다. 유훈통치를 내세워 대남 강경입장을 일관되게 고수하고 있는 김정은의 북한에게 이명박 정부의 때늦은 대북 접근은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한 채 서로 관계만 악화시키는 데 기여하고 있다. 임기 4년의 남북관계는 결국 회복하기 어려운 완전 파탄으로 정리되는 형국이다.

남북관계의 망실은 한반도 정세에서 우리의 개입력과 역할을 부정하게 만든다. 북한 지도자의 사망조차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새로 등장한 북한 지도부와 아무런 관계를 갖지 못한 채 북한정세에 수동적으로 끌려가고 국외자로 방관해야만 하는 처지가 되고 만다. 북한이 ‘어디로 가는가’를 넘어 북을 ‘어디로 이끌어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할 중차대한 정세전환의 시점에 이명박 정부는 두 손을 놓고 중국과 미국만을 바라봐야 한다. 남북관계의 끈을 놓게 될 때, 우리는 한반도 정세에서 소외되고 발언권과 역할이 축소되거나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 내내 남북관계가 차단되고 망실되는 과정은 또한 북중관계가 그만큼 더 깊어지고 강화되는 과정과 정확히 맞물려 있다. 남북교역이 감소한 그 자리에 북중교역이 그만큼 증대되었다. 2009년 이후 중국은 지방정부가 아닌 중앙정부 차원에서 전략적이고 장기적인 관점으로 북중관계를 넓혀가고 있다. 북한은 이제 경제와 안보뿐 아니라 김정은 체제 이후엔 정치분야까지 중국에 더욱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한 때 남북관계 활성화를 통해 우리가 구가하고자 했던 이른바 ‘북방경제’와 ‘철의 실크로드’는 이명박 정부의 남북관계 중단으로 잊혀진 꿈이 되어버렸다.

중요한 시기에 결정적 국면에 한반도 정세의 방관자와 국외자가 되어버린 이명박 정부의 근본적 결함은 바로 남북관계를 포기한 데서 비롯된다. 남북관계의 끈이 사라진 순간, 우리는 대북 개입도, 한반도 평화도, 북핵문제도, 북방경제도 사라지게 되고 한반도 정세는 최악으로 갈 수밖에 없음을 절감하게 되었다. 더욱이 김정일 시대가 가고 김정은 시대가 개막되면서 남북관계의 새로운 정립이 절실한 지금, 이명박 정부의 非포용정책 대신 이제 우리는 대북포용의 정당성과 함께 대북포용정책으로 복귀를 시도하고 모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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