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의 8.15평양축전행사가 임동원 통일부장관의 퇴진, 민주-자민공동정부의 결별 등 예상치 못한 결과를 초래하며 큰 논란 속에서 치러진지 2년이 지났다. 그러나 올해 평양에서 치러진 8.15민족대회는 2년 전과는 달리 큰 문제없이 잘 마무리되었다. 평양 8.15민족대회의 성공은 남한 민간통일운동의 성숙과 함께 북한의 대남인식과 태도의 변화 발전에 바탕한 것으로서 이는 상당히 평가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서울에서 진행된 8.15민간행사는 보수진영과 진보진영으로 나뉘어 치러졌고, 이중 인공기와 김정일 위원장의 초상화를 불태운 보수진영의 집회내용을 북한이 문제 삼았다. 북한은 8월 18일 조평통 대변인 담화를 통해 “극우보수세력의 책동이 미국의 조종과 당국의 묵인 하에 이뤄졌다”면서 ‘납득할 수 있는 공식적 사죄’를 요구하였고 대구 유니버시아드대회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뜻을 강력히 시사하였다.




이러한 북한의 사죄 요구에 8월 19일 노무현 대통령은 “인공기와 김정일 위원장의 초상화를 불태우는 것은 적절치 않다”면서 유감을 표명하였다. 이 유감 표명이 있은 후 북한은 우리 정부의 유감 표명을 수용하고 대구 유니버시아드대회 불참 결정을 즉각 철회함으로써 냉각의 기로에 섰던 남북관계는 한 고비를 넘어섰다.




북한 당국 8.15 보수진영의 집회에 대해 "납득할 수 있는 공식적 사죄"요구




그러나 북한의 대구대회 참가 결정에도 불구하고 노대통령의 유감 표명을 둘러싼 남한 사회 내부의 비판 기류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북한에 대한 ‘저자세, 굴복’과 같은 식의 비판은 우리 사회에서 그리 어렵지 않게 정서적 동의를 확보할 수 있으며 또 나름의 공감대도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유감 표명 자체는 불가피하거나 필요한 일이었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우선 노대통령의 유감표명은 하나의 정치행위, 외교행위라는 차원에서 판단해야 한다는 점을 먼저 지적하고 싶다. 어떤 정치행위나 외교행위는 그것이 국가이익에 도움이 되는가, 정치적 목표 달성에 효과가 있는가, 그리고 방법에서 도덕적인가 하는 점을 기준으로 판단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북한과 관련된 문제만은 이런 일반적 기준과는 상관없이 대단히 비이성적인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 그것은 북한관련 사안은 무조건 북한=‘절대악’이라는 기준으로 판단해야 하며, 반국가단체인 북한을 대하는 데서 다른 일반적 기준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일반적 기준을 중심으로 볼 때 노대통령의 유감 표명은 대구 유니버시아드대회를 성공으로 이끄는 핵심문제인 북한 선수단, 응원단의 참가를 유도해낸 효율적 ‘외교행위’가 분명하다. 그러나 북한=절대악의 기준에 따르면 노대통령의 유감 표명은 두말할 것도 없이 ‘악에 굴복한 것’이 되고 만다. 어느 편이 이성적인가?




만약 북한이 유니버시아드대회에 결국 불참하게 되고 그에 따라 남북관계가 냉각되게 된다면 이는 우리 입장에서 말할 수 없는 타격이 될 것이다. 남북관계를 다시 원상회복하는 데 드는 노력과 시간, 비용은 말할 것도 없고, 당장 한미관계에서 그리고 6자회담에서 남한의 입지는 여지없이 위축될 것이고 남한이 당사자로서 가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카드, 즉 남북관계 조정과 대북영향력이라는 카드를 내버린 채 게임에 임하는 꼴이 될 것이다.




또 유니버시아드대회를 통해 국제사회에 남북의 화해를 상징적으로 과시하고 북핵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기대를 심는 일은 한반도 전쟁위기를 해소하는데 매우 긴요한 일이다. 따라서 노대통령의 유감 표명은 국가이익을 고려할 때 불가피한 선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노대통령의 유감표명은 국가이익을 고려한 불가피한 선택




남한 사회가 다양성의 사회이고, 그러기에 북에 대한 호오(好惡)의 정치적 의사를 표시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북한이라 하더라도 인공기나 최고지도자의 초상화를 불태우는 식의 의사 표현법은 적절치 못하다. 남한은 이제 북한을 부정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냉전적 자폐아의 시기를 이미 벗어난 지 오래다. 김일성 화형식과 같은 냉전시기의 유아적 방식으로 북한에 대한 태도를 표명하는 것은 시대에 맞지 않는다.




물론 인공기 소각 식의 의사 표현이 적절치 않다 하더라도 그것이 현행법상 불법이 아닌 이상 강제로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역으로 남북관계와 국가이익의 필요성을 고려하여 인공기 소각 등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는 것도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인공기 소각 등에 대한 유감 표명 자체가 유니버시아드대회의 불참을 고려한 북한의 행위를 옳다고 동의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남북교류와 관련하여 북한의 정치과잉적 대응방식, 특히 이번과 같이 국제사회에 약속한 유니버시아드대회 참가문제를 정치문제와 연관시키는 북한의 행위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물론 북한은 정치주의가 절대적 기준이 되는 사회이고 그런 사회의 속성상 인공기와 최고지도자의 초상화를 불태운 사건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이다. 더구나 북한 선수단과 응원단을 파견하려는 목전에 이런 위협적인 사건이 일어난 것이니 신변안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비슷한 상황에 처할 경우 다른 어떤 나라라 하더라도 북과 마찬가지 입장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유니버시아드대회 불참을 언급한 것은 적절치 못한 것이었다. 사회문화체육 등과 관련된 민간교류는 남북의 정치상황과 상관없이 지속적으로 추진해나가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남북의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부 정치권과 언론이 대통령의 유감 표명을 반국가단체이고 주적인 북한의 공세에 굴복한 것이라던가, 북한을 비판하는 애국적 행위를 모독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탈냉전의 시대 추세에 맞지 않는다.




보수단체가 노대통령의 유감표명을 문제삼는 것은 북한=안보의 적으로 생각하는 시대착오적인 냉전의식의 산물




냉전적 자폐아의 시기에 남북관계를 규정하는 원칙은 오직 한 가지 ‘북한=안보의 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탈냉전과 세계화의 시대에 처한 오늘날의 남북관계는 이 한 가지 기준만 가지고 판단할 수 없다. 오늘날 우리에게 북한의 존재적 의미는 ‘우리의 안보를 위협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통일되어야 할 절반’이고, 또한 남북 사이의 관계는 ‘주권국과 주권국 사이의 일반적 관계’이기도 하면서 ‘통일 과정에서 형성되는 잠정적 특수관계’이기도 하다.




만약 서해 잠수함 침투사건과 같은 문제라면 당연히 ‘안보를 위협하는 존재’라는 입장에서 대북 대응방안을 마련해야 하지만, 유니버시아드대회 참가와 같은 사안의 경우에는 ‘민족의 절반’으로서 ‘통일 과정에서 형성되는 잠정적 특수관계’의 입장에서 대응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옳다.




비판은 필요하다. 그러나 노무현정부를 공격하기에 급급해서 국민들의 맹목적 대북 적개심을 이용하는 것은 절대 ‘정치’가 될 수 없다.




이승환/민화협 정책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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