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사람 값이 같냐?”고 할 것인가


피해자가 현직 여검사가 아니고, 가해자가 검찰 고위직이 아니고, 폭로 장소가 신뢰도 있는 방송사의 메인 뉴스가 아니었어도 이렇게 반향이 컸을까? 아마도 아니었을 것이다. 

이 전에도 성추행은 부단히 있어왔다. 폭로도 잇따랐다. 송사로까지 간 것도 수 백 건이다. 간호사가 의사에게 성추행 당했다고 폭로했을 때 이렇게 공분했던가? 여비서가 사장이나 재벌회장에게 당했다고 하소연했을 때 이렇게 들끓었는가? 연대했는가?

여비서가 사장에게 당한 뒤 하소연했을 때 이렇게 연대했는가?

검찰 내 성 범죄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서울서부지검의 모 부장검사가 후배 여검사를 성추행했다가 면직되는 등 성범죄로 징계받은 검사는 2011년 이후 7년 간 모두 11명이다. 여기에 물론 이번 ‘안태근 검사 건’은 포함되지 않는다. 

2013년 12월, 어느 언론사 여기자가 서울중앙지검 2차장 이진한 검사에게 성추행 당했다. 피해자는 다음날 바로 공개하고 항의했다. 그 때 반응은 어땠는가. 지금처럼 들끓지는 않았었다. 가해자는 똑같은 검찰 고위직인데 왜 그랬을까. 피해자가 여검사가 아니어서? 폭로 공간이 Jtbc 손석희앵커와의 인터뷰가 아니어서? 성추행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무르익지 않아서? 

“어떻게 사람 값이 같냐?”고 할 것인가

서 검사 사건, 아니 ‘안태근 검사 성추행 사건’에 대한 공분과 연대가 할리우드의 ‘미투(#Me_Too) 운동’ 이후 고양된 인권의식과 연대의식의 결과물이자 중요한 진전이란 것, 물론 동의한다. 그렇지만, 가해자나 피해자의 사회적 위치와 상관없이 똑같은 무게로 분노하고 똑같이 처벌돼야 한다고 하면, “어떻게 사람 값이 같냐?”고 할 것인가.

노숙자가 차에 치여 사망하면 합의금 몇 백~몇 천만원에 끝나고, 고소득 전문직이면 호프만식 셈법으로 수 십, 수 백억을 내야하는 것처럼, 성추행 가해자와 피해자가 누구인가에 따라 분노와 주목도, 처벌 강도가 달라진다면 우리는 아직도 한참 미개한 야만상태다. 

검사가 아니라, ‘사람’이 범죄 당했다는 이유만으로 분노-연대해야 

검사가 검사에게 성추행을 당해서 더 이러는 건 혹시 아닌가 되돌아보고, 문제의 본질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여검사가 성추행 당한 게 아니라,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범죄를 당한 것이다. 그 이유만으로 분노하고 연대해야 한다. 

물론, 할리우드 ‘미투 운동’도 가해자가 거물 영화제작자(하비 웨인스타인)이고, 우마 서먼이나 메릴 스트립 같은 스타 배우가 힘을 보태 문을 열어젖혔기에 노도의 물결이 되었다. 무슨 일이든 중대한 변곡점을 만들어내는 ‘뇌관’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지금 주목해야 할 것은 서 검사와 안태근검사가 아니라, 남성 위주 폭력적 문화와, 오랜 기간 마비돼 있었던 남성들의 인식체계다. 

모든 폭발에는 결정적 비등점이 있다. 그 비등과 폭발에 이르게 한 전체 요소 중 하나라도 없으면 비등이나 폭발은 일어나지 않는다. 물이 99.9도에서 100도로 바뀌는 그 순간만 기억하고 화들짝 타올랐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망각하는 일이 되풀이되지 말아야 한다.  

여기자 성추행건, 가해자 시인에도 법원 “혐의없음” 판결

4년 전 서울중앙지검 이진한 검사에게 성추행 당한 여기자는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이 검사는 사건 바로 다음날 검찰기자실을 찾아 사과했다. 즉, 자기 입으로 혐의를 시인한 것이다. 그런데도 법원은 2년을 끌다가 “혐의없음” 판결을 내렸다. 이번 안태근 검사 성추행사건은 공소시효가 지나 법적으로 불가하겠지만, 만일 시효가 지나지 않아 법원으로 간다면, 이번에는 어떤 판결이 나올까. 가해자는 똑같은 고위직 검사고 피해자만 다르다. 여론이 들끓었고 피해자가 검사니까, 이번엔 유죄? 

미투 운동의 연대와 응원 없이도 성범죄에 대해 절도나 폭행처럼 신고가 자연스러워지고, 성범죄피해자가 숨어서 혼자 입술 깨무는 일이 없도록 만들어야 지금의 들끓는 공분이 사회적-역사적 의미를 획득할 것이다. 일단, 검찰과 법무부의 사건 처리를 주목한다.

※외부 필자의 기고는 <폴리뉴스>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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