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수를 받느냐 뭘 받느냐. 이 따위 대접 받으면서 일 못한다. 비례대표 2번을 욕심으로 여기는 모독은 죽어도 못 참는다”는 김 대표의 발언에 그의 생각이 고스란히 응축돼 있다.
김 대표는 자신을 대한민국 축구대표팀 감독으로 영입된 히딩크로 생각했던 것 같다. 또는 미개한 야만 상태에 신음하고 있는 아프리카에 인술 봉사하러 간 슈바이처박사 정도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히딩크는 오로지 자기 방식대로 선수를 뽑고 훈련시켰다. 그의 명성과 카리스마에 주눅 든 한국축구계는 아무 소리 못하고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히딩크가 취한 조치들의 상당 부분이 맞기도 했으니 더 더욱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고, 히딩크는 전권을 휘둘렀다.
평생을 권부의 양지에서 지내온 김 대표의 사고체계가 야당 사람들의 그것과 충돌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빈사 상태의 야권으로서는 코앞에 닥친 선거에다, 생사여탈권인 공천권까지 거머쥔 김 대표 앞에서 딴 소리 자체가 불가능했다. 필리버스터 중단과 이해찬-정청래 배제 등 두어 번의 아슬아슬한 고비를 맞기도 했지만, 김 대표는 의표를 찌르는 “야권통합” 제안으로 국민의당을 뒤흔들며 전통적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등 능수능란하게 요리해나갔다.
시범경기에서 5대 0으로 대패하는 등 신통찮은 성적을 거두자 딴 소리가 나옴직도 했지만, 히딩크는 “별 거 아니다”며 밀고 나갔다. 월드컵이 코앞인데 감독교체를 요구할 만큼 배짱있는 축구인은 없었다. 지금 김 대표는 또 다시 히딩크를 생각하고 있을지 모른다. “5대 0으로 판판이 깨질 때도 그만두라는 소리는 못하고 지켜봤던 사람들이 왜 비례대표 순번 따위로 반발하느냐”며 “정 그러면 짐 싼다”고 엄포까지 놓고 있다. 엄포여도 문제지만, 엄포가 아니라면 무책임의 극치다.
김 대표가 놓치고 있는 게 있다. 우선, 김 대표는 히딩크가 아니고, 월드컵과 총선은 다르다는 점이다. 또 하나. 김 대표가 40 여년 간 터전으로 지내온 권부의 양지 집단과는 달리, 야당은 민주의식과 대의명분이 중시된다는 점이다.
김 대표는 말한다. “비례 2번이나 12번이나 뭐가 다르냐. 비례순위 핑계대지 마라. 솔직히 말해서 이건 정체성 문제다”라고. 맞다. 김 대표 스스로 이번 사태의 본질을 정확하게 정리하고 있다. 정체성 문제, 즉 야당 유전자 문제다.
김 대표에게 두 가지를 반문한다.
첫째. “야당 유전자를 확실히 탑재하고 정권교체를 위해 끝까지 같이 가겠다는 의식이 확고하지 않으면 비례대표로 원내에 진출한들 총선 후 당을 장악하고 지휘할 수 있을까?” 그에게서 동류의식이 확인되지 않는데도 당내 구성원들이 마음속으로 그를 승인하고, 기꺼이 팔로우십을 발휘하리라 보는가?
둘째. 비례대표진출 문제와 관련한 김 대표의 입장이다. 처음에는 “이 나이에 무슨 욕심을 내겠느냐. 젊은 사람들 수두룩한 국회에 이 나이에 쪼그리고 앉아있고 싶지 않다”며 아무 관심 없다는 듯 말해왔다. 그러다 갑자기 “선거 이후 당을 통솔하기 위해서 원내 진출이 필요하다”고 급변했다. 왜 그렇게 생각이 바뀌었는지 소상히 밝혀야 한다. 김 대표가 확실한 야당 유전자로 무장한 게 확인되면, 그의 양복 깃에 뱃지가 있건 없건 지도력 확보와 행사는 전혀 문제되지 않을 것이다. 김 대표의 “아무 소리 말고 따라오라”는 일사불란 리더십은 말 그대로 단기간의 비대위 체제에는 통할지 모르나, 선거 이후 평상시에는 통하지도 않고, 통해서도 안 될 터이다.
비례 파동 24시간 후인 21일, 더민주당 비대위는 “김종인 2번서 14번으로 후진 배치, 비리혐의 박종헌후보 탈락, 비례순번 투표로 결정”등의 수습안을 마련했다. 당헌-당규를 지키면서 시민들의 ‘상식적’ 정서에 부응하는 조치라고 보인다. 이제 김 대표가 이를 받아들일지 아니면 짐을 쌀 지가 문제다. 자신의 결정이 수정된 것을 ‘리더십 훼손’으로 여긴다면 김 대표는 민주정당의 리더 자격이 없다. 응급실 의사는 환자 가족에게 치료계획을 설명하는 ‘고지 의무’가 있고, 수술 전에는 동의서를 반드시 받아야 한다. 그런데, 수혈하다가 혈액형이 다르다는 게 확인됐다. 아무리 급해도 혈액형이 다른 피를 수혈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지금 더민주당이 위기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비상계엄 하 국보위가 아닌 것은 더 분명하다.
김 대표는 21일 오전 기자들에게 “비례 순번문제로 표가 우수수 떨어진다”며 당 중앙위에 대한 분노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맞다. 새누리당이 유승민 공천문제로 비상식적 행태를 보름 가까이 지속해오며 자충수를 두고 있는 판국에, 느닷없는 ‘셀프2번’ 문제로 표를 완전히 말아 먹고 있다는 여론이 왜 김 대표에게는 들리지 않는가. 항간에는 “구원투수가 구단주까지 되려한다”는 비아냥 성 비판이 무성하다. 구단주, 될 수 있다고 본다. 다만, 구단에 대한 일체감을 먼저 확인시키고 절차를 제대로 밟는 게 순서다. (이강윤. 언론인. lkyprah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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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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