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측)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비상대책위 대표(좌측)거스 히딩크 감독[사진=연합뉴스]
▲ (우측)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비상대책위 대표(좌측)거스 히딩크 감독[사진=연합뉴스]
김종인 대표는 ‘야당’을 하러 온 게 아니었다. 애시당초 그에게는 야당 DNA가 없었다. “죽게 생긴 당신들이 찾아와서 간절히 원하니 내가 왕진가서 살려내마. 아무 소리 말고 따라오기만 하면 된다”는, 좋게 말해서 카리스마, 나쁘게 말해서 오만함만이 있었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더민주당은 그가 박근혜정부를 날 서게 비판한 뒤 멀어진 걸 보고, ‘야당 사람’이 될 준비가 마련된 것으로 믿었다. 양측의 그 ‘생각’ 차이가 이번 비례대표 사달을 불러온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건 돌발사태가 아니다. 언젠가 터질 게 터진 것이다. 

“내가 보수를 받느냐 뭘 받느냐. 이 따위 대접 받으면서 일 못한다. 비례대표 2번을 욕심으로 여기는 모독은 죽어도 못 참는다”는 김 대표의 발언에 그의 생각이 고스란히 응축돼 있다.

김 대표는 자신을 대한민국 축구대표팀 감독으로 영입된 히딩크로 생각했던 것 같다. 또는 미개한 야만 상태에 신음하고 있는 아프리카에 인술 봉사하러 간 슈바이처박사 정도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히딩크는 오로지 자기 방식대로 선수를 뽑고 훈련시켰다. 그의 명성과 카리스마에 주눅 든 한국축구계는 아무 소리 못하고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히딩크가 취한 조치들의 상당 부분이 맞기도 했으니 더 더욱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고, 히딩크는 전권을 휘둘렀다. 

평생을 권부의 양지에서 지내온 김 대표의 사고체계가 야당 사람들의 그것과 충돌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빈사 상태의 야권으로서는 코앞에 닥친 선거에다, 생사여탈권인 공천권까지 거머쥔 김 대표 앞에서 딴 소리 자체가 불가능했다. 필리버스터 중단과 이해찬-정청래 배제 등 두어 번의 아슬아슬한 고비를 맞기도 했지만, 김 대표는 의표를 찌르는 “야권통합” 제안으로 국민의당을 뒤흔들며 전통적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등 능수능란하게 요리해나갔다.

시범경기에서 5대 0으로 대패하는 등 신통찮은 성적을 거두자 딴 소리가 나옴직도 했지만, 히딩크는 “별 거 아니다”며 밀고 나갔다. 월드컵이 코앞인데 감독교체를 요구할 만큼 배짱있는 축구인은 없었다. 지금 김 대표는 또 다시 히딩크를 생각하고 있을지 모른다. “5대 0으로 판판이 깨질 때도 그만두라는 소리는 못하고 지켜봤던 사람들이 왜 비례대표 순번 따위로 반발하느냐”며 “정 그러면 짐 싼다”고 엄포까지 놓고 있다. 엄포여도 문제지만, 엄포가 아니라면 무책임의 극치다.   

김 대표가 놓치고 있는 게 있다. 우선, 김 대표는 히딩크가 아니고, 월드컵과 총선은 다르다는 점이다. 또 하나. 김 대표가 40 여년 간 터전으로 지내온 권부의 양지 집단과는 달리, 야당은 민주의식과 대의명분이 중시된다는 점이다. 

김 대표는 말한다. “비례 2번이나 12번이나 뭐가 다르냐. 비례순위 핑계대지 마라. 솔직히 말해서 이건 정체성 문제다”라고. 맞다. 김 대표 스스로 이번 사태의 본질을 정확하게 정리하고 있다. 정체성 문제, 즉 야당 유전자 문제다. 

김 대표에게 두 가지를 반문한다. 
첫째. “야당 유전자를 확실히 탑재하고 정권교체를 위해 끝까지 같이 가겠다는 의식이 확고하지 않으면 비례대표로 원내에 진출한들 총선 후 당을 장악하고 지휘할 수 있을까?” 그에게서 동류의식이 확인되지 않는데도 당내 구성원들이 마음속으로 그를 승인하고,  기꺼이 팔로우십을 발휘하리라 보는가? 

둘째. 비례대표진출 문제와 관련한 김 대표의 입장이다. 처음에는 “이 나이에 무슨 욕심을 내겠느냐. 젊은 사람들 수두룩한 국회에 이 나이에 쪼그리고 앉아있고 싶지 않다”며 아무 관심 없다는 듯 말해왔다. 그러다 갑자기 “선거 이후 당을 통솔하기 위해서 원내 진출이 필요하다”고 급변했다. 왜 그렇게 생각이 바뀌었는지 소상히 밝혀야 한다. 김 대표가 확실한 야당 유전자로 무장한 게 확인되면, 그의 양복 깃에 뱃지가 있건 없건 지도력 확보와 행사는 전혀 문제되지 않을 것이다. 김 대표의 “아무 소리 말고 따라오라”는 일사불란 리더십은 말 그대로 단기간의 비대위 체제에는 통할지 모르나, 선거 이후 평상시에는 통하지도 않고, 통해서도 안 될 터이다. 

비례 파동 24시간 후인 21일, 더민주당 비대위는 “김종인 2번서 14번으로 후진 배치, 비리혐의 박종헌후보 탈락, 비례순번 투표로 결정”등의 수습안을 마련했다. 당헌-당규를 지키면서 시민들의 ‘상식적’ 정서에 부응하는 조치라고 보인다. 이제 김 대표가 이를 받아들일지 아니면 짐을 쌀 지가 문제다. 자신의 결정이 수정된 것을 ‘리더십 훼손’으로 여긴다면 김 대표는 민주정당의 리더 자격이 없다. 응급실 의사는 환자 가족에게 치료계획을 설명하는 ‘고지 의무’가 있고, 수술 전에는 동의서를 반드시 받아야 한다. 그런데, 수혈하다가 혈액형이 다르다는 게 확인됐다. 아무리 급해도 혈액형이 다른 피를 수혈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지금 더민주당이 위기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비상계엄 하 국보위가 아닌 것은 더 분명하다. 

김 대표는 21일 오전 기자들에게 “비례 순번문제로 표가 우수수 떨어진다”며 당 중앙위에 대한 분노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맞다. 새누리당이 유승민 공천문제로 비상식적 행태를 보름 가까이 지속해오며 자충수를 두고 있는 판국에, 느닷없는 ‘셀프2번’ 문제로 표를 완전히 말아 먹고 있다는 여론이 왜 김 대표에게는 들리지 않는가. 항간에는 “구원투수가 구단주까지 되려한다”는 비아냥 성 비판이 무성하다. 구단주, 될 수 있다고 본다. 다만, 구단에 대한 일체감을 먼저 확인시키고 절차를 제대로 밟는 게 순서다. (이강윤. 언론인. lkyprah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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