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패율 제도의 도입이 선거제도 개편의 초점이 되고 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대체로 환영하는 편이다. 자신들의 기득권 구조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서, 긍정적으로 활용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비례대표 확보율이 낮은 소수 정당들은 석패율제 도입에 부정적이다. 비례대표 비중이 작아 석패율제를 활용할 여지는 별로 없는 반면, 기존의 비례대표제 기능이 축소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석패율 제도의 도입 취지는 지역주의 극복으로 말해지고 있다. 그러나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지역별 1당 독점의 정당체제, 또는 독과점 체제의 문제를 보완하려는 것이다. 석패율 제도를 도입한다고 해서 지역주의 자체가 극복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투표에 나타난 지역별 편향성이 실제보다 과잉 반영돼 악순환되는 경향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이 석패율제가 그렇게 일반적인 선거제도는 아니다. 알다시피 지역구와 비례대표에 이중등록이 가능토록 해 지역구에서 선전한 후보 순으로 비례대표에 당선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제도이다. 일본, 독일 등 지역구·비례대표를 병립하고 있는 몇 나라에서 이중등록을 허용하고 있으나, 여기에 석패율을 적용하고 있는 나라는 일본 정도뿐이다. 따라서 그동안 일본의 석패율제를 모델로 제도 도입 논의가 있어 왔다.

그럼에도 일본식 석패율제의 도입이 쉽지 않았던 데에는 무엇보다 비례대표 수를 획기적으로 늘려야 하기 때문이었다. 현재의 비례대표 정수가 54명인데, 최소 120명 정도로 늘려야 일본식 석패율제를 적용할 수 있다. 지역구 수를 대폭 줄이든지 국회의원 정수를 늘려야 하는데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 늘리더라도 전국을 5개 내외의 권역으로 재편해 비례대표를 적용해야 한다. 그러나 이 권역 편성이 매우 인위적이다. 또 120명 정도로 비례대표를 확대한다면 굳이 석패율제를 도입하지 않아도 또 다른 긍정적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

최근 선관위에서 내놓고 있는 석패율제는 일본식 권역별 선거제가 아니라 현행 전국 단위 비례대표제에 석패율제를 적용하는 방안이다. 사실 이 제도는 필자가 지난 해 맨 처음 제시했던 바이다. 굳이 석패율제를 도입하려 한다면 무리한 권역별 체제를 도입하지 않고도 각 정당이 자신들이 취약지역을 대상으로 적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현행 국회의원 정수나 비례대표 규모를 크게 조정하지 않고도 적용할 수 있고, 필요할 경우 비례대표 규모를 부분적으로 확대하면 된다. 그러면서도 지역균열 구조의 딜레마 해결에 일본식 제도보다 오히려 더 기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필자는 사실 석패율제의 도입보다 ‘기호순번제’의 폐지가 보다 우선적인 과제라고 당시 선거제도 관련 기관들에 제안했다. 벽보와 투표 용지에 거대 정당 우선 순으로 번호를 줘 배치하는(공직선거법 제150조) ‘기호순번제’는 위헌의 소지가 아주 큰 불평등한 제도이다. 기호순번제의 폐지는 기존 거대 정당의 기득권을 아주 흔들게 될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제안은 뒷전에 밀리고 석패율제가 주목받고 있는 것 같다.

거대 정당 우선 순위의 이 기호순번제는 기성 거대 정당에 과도한 특권을 부여하고 있으며, 지역별 1당 독점체제를 지속시키는 요인으로도 작용하고 있다. 지방선거까지도 전국적 기호투표(묻지마줄투표)로 이끄는 중요한 제도적 배경이 되고 있다.

세계의 유수 국가들에서 거대정당 우선의 기호제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우리가 흔히 참고하는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등에는 이 기호제 자체가 없다. 또 그 순서도 우리의 교육감 선거에서 했듯이 추첨해 의해 결정하거나, 알파벳순 또는 순환제 방식을 택하기도 한다.

미국이나 호주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 따르면 기호가 없더라도 순서에 따른 유불리함(primacy effect)이 1-4%에 달했다. 우리처럼 기호까지 있고, 사표 우려가 큰 승자독식의 체제라면 그 영향은 훨씬 더 클 것이다.

현행 기호순번제는 평등한 선거정치를 위해 당연히 폐지되어야 한다. 나아가 등재 순서가 추첨 등에 의해 결정하는 방식으로 개선돼야 한다. 기성 정당의 과도한 특권을 없앤다면 다양한 신진세력의 정치 진입에 유리한 선거정치 환경이 될 것이다. 이는 자연히 거대 정당이 주도하는 지역별 1당 독점체제를 극복하는 단초가 될 수 있다.

기호순번제의 폐지를 통한 제도개혁은 기계적인 기호투표, 이른바 ‘묻지마 투표’가 아니라, 정당, 인물, 정책 등에 대해 심도 깊게 고려하는 투표를 유도해 심의민주주의의 강화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선거제도 개혁이 주로 국회의원 선거에 초점이 되고 있지만, 이 기호순번제 폐지는 당연히 대통령선거, 지방선거 등 각종 선거에 적용되어야 한다. 묻지마 투표와 함께 중앙정치의 소용돌이에 과도하게 휩쓸리는 지방선거의 문제점을 개선하는데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석패율제의 도입에 대한 논의와 함께 선거제도 개혁이 탄력을 받는 시점에 ‘기호순번제’ 폐지가 본격 거론되었으면 한다. 기호순번제의 폐지는 제도 개편이 아니라, 불평등한 제도의 정상화이다.

김만흠/ 폴리뉴스 칼럼니스트/한국정치아카데미 원장 manmand@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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