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중국 고속 경제성장 이끌어, 자본가 품은 '3개 대표론', '상하이방' 이끌며 막후 영향력 행사
1992년 노태우 정부 '한-중 수교', 1995년 김영삼 정부 '한-중 정상회담' 성사

장쩌민 전 중국 국가주석이 30일 향년 96세로 사망했다. [로이터=연합뉴스 자료사진]
▲ 장쩌민 전 중국 국가주석이 30일 향년 96세로 사망했다. [로이터=연합뉴스 자료사진]

[폴리뉴스 한유성 기자] 마오쩌둥, 덩샤오핑에 이어 중국의 제3세대 최고지도자 장쩌민 전 국가주석이 96세 일기로 30일 사망했다.

장쩌민 전 주석은 중국 개혁개방을 이끈 덩샤오핑 뒤를 이어 1989년부터 2004년까지 15년간 중국 최고지도자로 1990년대 중국의 고속 경제도약을 이루어낸 인물이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장쩌민 전 주석이 30일 낮12시13분(현지시간) 백혈병 등으로 인해 상하이에서 치료를 받다가 별세했다고 전했다.

시진핑 국가주석이 위원장으로 하는 장례위원회가 꾸려졌다고 신화통신은 전했다.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국무원 등의 공동 발표에 따르면 장 전 주석은 백혈병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여러 장기 기능이 쇠약해져 응급처치를 받았으나 이날 숨을 거뒀다.

당 중앙위 등은 "장쩌민 동지의 서거는 우리 당과 군, 각 민족 인민에게 있어 헤아릴 수 없는 손실"이라며 "당 중앙은 모든 사람에게 슬픔을 힘으로 바꾸고 동지의 유지를 계승하며 실제 행동으로 애도를 표하기를 호소한다"고 밝혔다.

또 당 중앙위 등은 장 전 주석에 대해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이자 위대한 프롤레타리아 혁명가·정치가·군사 전문가·외교가이고 오랜 시련을 겪은 공산주의 전사이자 중국 특색 사회주의라는 위대한 사업의 걸출한 지도자"라며 "중국 공산당 제3세대 당 중앙의 핵심이자 3개 대표론의 창립자"라고 했다고 이날 신화통신이 전했다.

통신은 시 주석이 "우리는 장쩌민 동지를 추모하고 슬픔을 역량으로 만들어 20차 당 대회의 안배에 따라 사회주의 현대화 국가를 전면적으로 건설하고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전면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단결 분투할 것"이라고 했다고 전했다.

장 전 주석은 1989년 ‘텐안먼(天安門)’ 사태의 격동기를 거치며 덩샤오핑에 의해 발탁돼 중국 중앙정치 권력 중심으로 부상했다. 장 전 수석은 텐안먼 사태로 실각한 자오쯔양 당총서기의 뒤를 이어 덩샤오핑 발탁으로 당총서기에 올랐고 그 후 15년동안 중앙 최고 권력을 움켜쥐며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까지 중국 고속 경제를 진두지휘했다.

1989년 11월에는 덩샤오핑이 맡고 있던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을 맡았고, 1993년 3월엔 국가주석까지 맡아 중국 최초로 당(黨)ㆍ정(政)ㆍ군(軍)의 모든 권력을 거머쥐며 2003년까지 중국 최고 지도자로 재임했다.

장 전 주석은 자신의 후계인 후진타오 전 국가주석에게 2002년 11월 당 총서기 자리를 물려주고 다음해인 2003년 국가주석직을 이양했고, 이어 2004년 9월 당 중앙군사위 주석직을 이양하며 단계적인 평화적 정권이양을 했다.

장 전 주석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노선과 도광양회(韜光養晦, 빛을 숨긴 채 실력을 키움) 노선을 충실히 계승하면서 미국 등 서방과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중국의 비약적 경제 성장을 일궜다.

그 성과로 장 전 주석이 당 총서기가 된 1989년 1조7천200억 위안(약 319조 원)이었던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은 그의 실질적 임기 마지막 해인 2002년 약 7배인 12조1천700억 위안(약 2천260조 원)으로 뛰어 비약적 성장을 이루어냈다.

장쩌민이 창시한 사상인 ‘3개 대표론’은 공산당이 노동자, 농민(인민) 뿐만아니라 지식인, 자본가의 이익까지 대표한다는 내용을 담은 이론으로 그의 사회주의식 시장경제 사상을 잘 대변한다. 당시는 배척 대상이었던 자본가(기업인) 계급을 당으로 끌어안은 획기적인 이론이다. 그의 ‘3개대표론’은 지난 2002년 중국 공산당 제16차 전국대표대회(당대회)에서 마오쩌둥 사상, 덩샤오핑 이론과 함께 중국공산당 당헌에 지도 이념으로 정식 삽입되었다.

노태우 대통령과 장쩌민 국가주석의 재임 시절인 1992년 이상옥 이무부장관 전기침 중국외교부장 한중수교 조인식 마치고 악수하고 있다. / 사진출처=국가기록원
▲ 노태우 대통령과 장쩌민 국가주석의 재임 시절인 1992년 이상옥 이무부장관 전기침 중국외교부장 한중수교 조인식 마치고 악수하고 있다. / 사진출처=국가기록원
장쩌민 중국 국가 주석 방한 당시 모습 . 지난 1995년 11월 14일 청와대에서 고 김영삼 전 대통령과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이한-중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 장쩌민 중국 국가 주석 방한 당시 모습 . 지난 1995년 11월 14일 청와대에서 고 김영삼 전 대통령과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이한-중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또한 최고 지도자 재임 중 굵직굵직한 정치, 경제, 외교의 이정표를 세웠다.

2008년 베이징 하계올림픽 유치를 했고 중국내 보수파들의 반대에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여 중국 경제를 비약적으로 성장시켰다. 또한 홍콩(1997년)과 마카오의 반환(1999년)이 그의 임기 동안 이뤄졌다.

텐안먼 사태 이후 집권한 장 전 주석은 ‘미중관계’ 회복에 큰 역할을 했다. 또 장쩌민 시대는 우리나라와 중국 관계가 혁명적인 변화의 시기였다. 반공 냉전체제가 아직 강했던 노태우 정부 시절인 1992년 우리정부는 대만과 외교를 단절하고 적대국가였던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과 수교를 맺었고, 한중 수교 후 1995년 11월 중국 국가주석으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 한중 정상회담을 가졌다.

경제, 외교적 혁혁한 변화를 이끌었지만 장 전 주석은 민주화 운동가들과 파룬궁에 대한 탄압 등 인권 침해 논란을 빚었고 그의 재임 기간 경제 성장의 뒷그늘에서 심화한 빈부격차, 관리들의 부정부패 등은 지적받고 있다.

장 전 수석은 은퇴 이후에도 막후 실력으로서 후진타오 시대 10년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정계에 깊숙이 개입했다. 그의 정치적 고향인 상하이시 출신의 정계, 재계, 관료 등으로 이루어진 ‘상하이방’을 이끌면서 정계에 깊이 개입하며 현역 지도자들을 견제하기도 했다.

상하이방은 태자당(중국 혁명원로 자녀그룹), 공청단(공산주의청년단 출신)과 함께 중국 공산당 3대 정파다.

그러나 시진핑 국가주석 집권기에 시 주석의 ‘정적’으로 분류되어 ‘반부패운동’으로 상하이방 세력이 숙청되어 와해되다시피 그 세가 극도로 축소됐다. 상하이방 몰락으로 장 전 주석의 막후 정치적 영향력 행사도 막을 내렸다.  

흑백으로 조의 표한 중국 관영 신화통신 홈페이지<strong></div> </strong>[신화사 홈페이지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 흑백으로 조의 표한 중국 관영 신화통신 홈페이지 [신화사 홈페이지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시진핑 국가주석이 주임을 맡은 장례위원회는 '추도 대회'가 열리는 날까지 베이징 톈안먼, 인민대회당, 신화문, 외교부, 해외의 대사관 및 영사관 등에 조기를 게양키로 했다. 또 재외공관 등에 빈소를 마련해 외국 인사들의 조문을 받기로 했다.

다만 중국 관례에 따라 외국 정부, 정당, 우호 인사 등의 조문단은 초청하지 않기로 했다고 장례위는 밝혔다.

장 전 국가 주석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중국 온라인 사이트들은 일제히 흑백화면으로 전환해 애도의 뜻을 표했다. 중국 국무원과 외교부 등 주요 정부 기관 인터넷 사이트는 물론 최대 포털사이트 바이두와 관영 매체 홈페이지들은 컬러화면을 흑색으로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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