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복 일행이 제주도 서귀포 정방폭포에 당도한 모습을 구현(서복전시관)
▲ 서복 일행이 제주도 서귀포 정방폭포에 당도한 모습을 구현(서복전시관)

임인년, ‘검은 호랑이 해’가 열렸다. 그러나 어떤 이는 ‘아직 신축년’이라고 외친다. 음력으로 환산하면 그렇다는 얘기다. 이렇게 애매한 시기를 제주 사람들은 ‘신구간(新舊間)’이라 부른다. ‘신구간’이란 ‘신구세관교승기간(新舊歲官交承期間)의 준말로, 신구세관이 교대하는 시기를 말한다. 즉 음력 정월을 전후로 하여 집안의 모든 신(神)들이 천상으로 올라가는데, 이 때 옥황상제로부터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는다고 한다. 지상에 신이 머물지 않을 때 제주 사람들은 평소에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한다. 이사를 하거나 조상의 무덤을 만지기도 하고, 돌담 보수와 나무 베기 등 다양하다. 이 시기가 24절기 가운데 ‘대한(大寒) 이후 5일째부터 입춘(立春) 이틀 전까지 해당하는데, 올해는 1월 25일부터 2월 1일까지이다. 아마도 지금쯤 제주 사람들의 속내가 조급할 것 같다. 올해의 신구간이 설연휴기간과 겹쳐서 예년보다 짧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주 풍속은 ‘신이 허락하지 않은 일을 하면 동티난다.’는 속설에서 비롯되었겠지만, 신구간은 한해를 시작하기 전에 생활환경부터 챙기라는 삶의 지혜가 아니었을까?

중국 진시황의 소원, 불로장생

새해는 소위 개년(改年), 개세(開歲), 개춘(改春), 신년(新年), 신세(新歲) 등으로 불린다. 모두 새로운 365일의 시작을 의미한다. 이때를 맞이하여 우리들은 새해 소망을 마음에 새긴다. 그 중에서도 남녀노소 누구나 공통된 소망은 아마도 ‘건강’이 아닐까? 비록 작심삼일로 끝나지만, 매년 스스로에게 주문한다. ‘올해엔 운동하자.’ 건강이 삶의 필수요건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세상을 다 얻은 황제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 중국 시황제(B.C 259-B.C 210) 이야기다.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 왕은 자신의 공적을 고대 전설 속의 삼황오제(三皇五帝)보다 더 월등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왕’보다 더 존귀한 칭호를 생각했다. ‘황제(皇帝)’. 여기에 중국 최초의 황제라는 의미에서 ‘시황제(始皇帝)’라 자칭했다. 진시황은 법률·화폐·도량형·문자를 통일하고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였다. 이제 자신의 황위와 통일제국이 염원하기를 바라며 불로장생을 갈망하였다. 진시황은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고,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으며 구름을 타고 다니면서 천지와 같은 수명을 가진 신선을 꿈꿨다. 그래서 산동반도 일대의 천문·의학·점복 등을 연구하는 방사(方士)들을 불러 불로장생약을 찾으려고 하였다.

서복이 1차 원정 때 바다 속 교어의 방해로 불로초를 얻지 못한 이야기(서복전시관)
▲ 서복이 1차 원정 때 바다 속 교어의 방해로 불로초를 얻지 못한 이야기(서복전시관)

서복, 불로초를 구하러 떠나다

서복. 자는 군방(君房), 서불[徐巿]이라 부른다. 원래는 제(齊)나라 사람이었는데, 기원전 219년에 진시황이 방사로 중용하였다. 그가 진시황에게 다음과 같이 상소를 올렸다. “황제폐하. 신(臣)은 방사 서불이옵니다. 폐하의 높으신 지략과 덕망으로 천하를 통일하심은 팔신의 뜻이옵니다. 신은 제국에서 신선술을 연구하던 중 발해 건너 동해 중에 삼신산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름하여 봉래(蓬山)·방장(方丈)·영주(瀛洲)라고 하오며, 그 곳에는 신선들이 살고 있사옵니다. 청컨대 동남동녀(童男童女)들을 이끌고 신산을 찾아 나서게 하옵소서”라고 간청하였다. 이에 진시황은 수천 명의 동남동녀를 선발하여 서복과 함께 신선을 찾아 출항하도록 명하였다. 서복이 언급한 삼신산 중의 하나인 영주가 바로 제주 한라산이었다. 한라산은 예로부터 부악(釜嶽)·원산(圓山)·진산(鎭山)·선산(仙山)·두무악(頭無嶽)·영주산(瀛洲山)·부라산(浮羅山)·혈망봉(穴望峰)·여장군(女將軍) 등의 많은 이름으로 불려왔다. 그런데 서복의 불로초로 찾기 탐험은 두 번에 걸쳐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B.C 210년(진시황 37)에 서복이 또 이르기를, “봉래산의 불로장생약을 구할 수 있었는데, 바다 속의 교어(용을 닮은 물고기)가 방해하여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활을 쏘는 궁수를 파견하여 교어를 퇴치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진시황은 동남동녀 삼천여 명, 오곡의 종자, 활을 잘 쏘는 궁수 등과 함께 다시 출항을 허락하였다.

서복일행, 제주도 서귀포에 당도

서복은 삼신산 중 하나인 영주산에 오르기 위해 제주도에 당도한 것으로 보인다. 구전에 의하면, 서복이 서귀포 정방폭포 해안과 조천의 금당포(金塘浦)에 정박한 것으로도 전해온다. 현전하는 제주도 지명유래에 의하면, 서복이 제주에 처음 당도한 지점을 금당포라고 전해온다. 제주에 당도한 서복이 다음날 아침에 떠오르는 해를 보면서 영주산에 무사히 도착하도록 허락한 천신(天神)께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그리고 서복은 ‘이곳에서 천기를 보았다.’고 하여 지명을 ‘조천(朝天)’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또 서귀포의 지명유래는 서복이 제주의 제일경 정방폭포를 보고 그 경관에 감탄하여 폭포 암벽에 ‘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뜻의 ‘서불과지[徐巿過之]’라는 글자를 새겨놓았다 한다. 그래서 ‘서복이 돌아간 포구’라는 뜻으로 서귀포(西歸浦) 지명유래가 전해온다. 이처럼 기원전 219년의 이야기가 조선후기까지 전승된 것으로 보인다. 그 흔적이 1877년에 제주목사로 부임한 백낙연(1877년 1월 ~ 1881년 5월)이 이르기를, ‘서귀포 정박폭포 절벽에 밧줄을 걸어 과두문자 12자를 확인하였으나 해독할 수가 없었다.’라는 기록이 확인된다. 2011년에 서귀포시ㅣ에서 서복의 글자를 찾아보겠다고 정방폭포 주변을 정밀 탐색했지만 발견할 수 없었다고 한다.

제주 앞바다
▲ 제주 앞바다

삼신산과 불로초, 그리고 서복이야기

서복에 관한 역사기록은 사마천의 『사기』 , 진수의 『정사삼국지』, 그리고 『후한서』 등에 전해온다. 기록에 따르면 ‘서복은 중국을 떠나 단주(亶洲) 또는 이주(夷洲)에 도달하였다.’라고 나오는데, 중국에서 이주(夷洲)는 지금의 타이완을, 단주(亶洲)는 일본을 가리킨다고 한다. 또한 서복은 처음부터 불로초를 찾을 수 없음을 알고 진시황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린 남녀 수천 명과 각종 기술자들을 데리고 떠났으며, 동쪽 어느 섬에 자기의 왕국을 세웠다는 이야기도 전해오지만, 그가 간 곳을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서복이야기가 구전되면서 한국의 제주 서귀포, 일본의 사가현과 와카야마현 등지에 서복공원 등이 조성되어 있다.

임인년 새해를 맞이하여 필자도 나름 의례를 챙겼다. 숨고르기 위해 제주 서귀포를 방문하였다가 서복기념관을 답사하였다. 휴식이 필요하여 찾아 나선 제주에서 중국 문화 찾기에 빠져들었다. 그 첫 번째 키워드가 ‘서복과 불로초’였다. 제주도는 외국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관광지다. 특히 중국인들의 경우 진시황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보니 서복과 불로초 이야기는 제주여행 마케팅으로 아주 적절한 소재였다. 문제는 어떻게 역사문화자원으로 가꾸고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했다. 필자가 만난 서복이야기의 경우 역사기록과 구전이 함께 전승되고 있어서 매우 흥미로웠다. 다만 현장에 조성되어 있는 공간이 조금 낯설었다. 서귀포 서복전시관의 경우 정방폭포와 연계되어 하나의 권역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 연계망 속에 혼재되어있는 중국문화의 흔적이 어색했다. 예를 들면 서복전시관 초입에 서 있는 패방(牌坊, 또는 패루)이나 서복공원에 조성되어 서복 동상에서 거대 규모를 지향하는 중국문화를 접하면서 숨고르기가 필요했다. 이 점은 육지에서도 마찬가지다. 필자가 거주하고 있는 전남지방의 경우 완도의 장보고, 화순의 주자묘 등지에서 낯선 이국문화를 경험한 바 있다. 추후 역사문화자원을 관광마케팅으로 기획할 때 유의할 일이다.

 

김경옥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교수

전공은 도서해양사. 주로 도서지역 주민들의 이주와 정착, 섬의 사회경제적 기반, 중앙정부의 도서정책 등이다. 특히 섬 주민들이 작성한 고문서를 통해 그들은 그 섬에서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재구성하고 있다. 최근 연구는 ‘섬의 공간 변화’에 주목하고 있다. 전근대 섬사람들이 만든 간척지, 그 간척지를 어떤 용도로 활용해왔는가를 시계열적으로 추적하고 있다. 대표 저서는 『조선후기 도서연구』, 『섬과 바다의 사회사』, 『수군진, 물고기 비늘처럼 설치하다』 등이 있고, 최근에 발표한 논문은 「16세기 노수신의 珍島 유배생활과 섬 주민에게 끼친 영향」, 「19세기 말엽 도초도를 둘러싼 궁차·향리·두민의 길항관계」, 「근현대 전라도 나주목 도초도의 공간변화와 학교염전의 설치」, 「20세기 전반 간척으로 인한 섬마을 중등교육기관의 설립과 운영」 ,「19~20세기 문서를 통해 본 섬마을 공동체의 운영과 기능」 , 「18~19세기 전라도 나주목 자은도의 촌락편제와 인구변동」, 「19세기 말엽 청산도진의 재편과 해양방어체제의 변화」, 「근세 동아시아 해역의 표류연구 동향과 과제」, 「19세기 전라도 진도목장의 운영실태」 , 「20세기 비금도 가산리의 공간변화와 간척지의 이용실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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