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밥·국수와 자연인·집콕인과의 21세기적 상관관계

김밥과 국수 <사진=정하룡>
▲ 김밥과 국수 <사진=정하룡>

이제 '집콕'은 '요즘인'의 라이프스타일로 확실히 정착된 듯하다. 

20세기 '생각있는 사람'들은 TV를 '바보상자'라 부르며 '거리두기'를 권장했다. 하지만 21세기 에피데믹은 TV와 단번에 물아일체로 만들어버렸다. 집콕으로 살아남으려면 바보상자 속을 들여다보게 되는데...

'나는 자연인이다' '도시어부' '슬기로운 산촌생활' '바퀴달린집' '나 혼자 산다' '해방타운' '동굴캐슬'....

집콕 고참들께서야 그러려니 하시겠지만, 집콕 초년병에겐 정말 생뚱맞은 언어들이다. 무어 이 따위 타이틀이 있나 싶겠다. 

'인상(印象·impression)비평'... 그러니까 대충 훑어봐도 '자연인'의 주제는 모두 '죽다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에다 그런 사람들이 출연한다.  

사업하다 망했다. 죽어라 경쟁하다 이러다 정말 죽겠다싶어 도망쳤다. 배신이다. 절망이다. 암이다. 죽을 병에 걸렸지만, 도시에는 약이 없었다. 마지막 잡은 지푸라기가 깊은 산속이었다. '문명인의 삶', '도시적 인간형'과 결별했다는 한결같은 스토리다. 

'도시어부' '산촌생활'에는 현대인의 도시적 삶에는 가능성(?)이 없다는 역설이 담겼다.  '바퀴 달린 집'에는 여기로부터 떠나야한다는 절박함, '나 혼자 산다'에는 '나 혼자 살고 싶다'는 집단과 사회 구성체에 대한 회의, '해방타운'은 타운으로부터 탈주, 해방. 그리고 '동굴캐슬'에서는 동굴이라는 인간의 원시성, 시원, 그 처음 지점과 첨단문명의 현주소에 던지는 질문들로 가득하다. 

문득 '오징어게임'이 떠올랐다. 오징어게임이 '기생충'과 함께 지구인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소위 자본주의 끝지점이랄 수 있는 '신자유주의 매트릭스' 속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인류에게 오징어게임, 기생충은 너무나 먼 당신의 이야기가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의 이야기, 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함께 문득 펼쳐지는 파노라마 하나, '아바타'... 헐리우드의 대작 '아바타'는 인간의 원시성, 야생의 신화를 다룬다. 인간과 자연, 그 경계를 넘나드는 야생적 신체들이 등장해 문명의 괴이한 진군 앞에서 인류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명작이다. 최첨단 디지털 기술 활용을 넘어, 이루 말할 수 없는 서사와 이미지의 변주까지...

반면 '나는 자연인이다'는 현대 첨단의 어떤 기술적 효과나 장치 없이 인생과 자연을 생생하게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산속과 동굴과 바다에는 사회부적응자, 도망자, 실패자들로 버글버글하다. 탈주인지 도전인지 그 경계가 모호한 이들의 일상과 소일거리 그대로 보여줄 뿐 아무것도 덧보태지 않는다. 

'자연인'과 '아바타'로 대별되는 이 두 범주가 연출하는 차이도 흥미롭지만 더 중요한 질문은 따로 있다. 바보상자건 헐리우드건 왜 요즘인은 이토록 야생을, 자연을 찾아헤매는 것일까. 스마트폰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고, 돌봄과 케어가 넘쳐나는 이 시대에. 이미지와 게임의 홍수 속에서 즐거움이 넘쳐나는 이 살맛나는 세상에.

하긴 예능에서도 요즘은 '개고생' '생고생'을 자처하는 프로그램이 대세다. 또 각종 채널마다 인류의 시원을 찾아가는 다큐가 넘쳐난다. 대체 왜? 왜 그 엄청난 돈을 들여 '아바타'의 신화를 창조하고, 왜 그렇게 험한 곳까지 찾아다니며 '자연인'을 연출하는 것일까.

어쩌면 질문 안에 단서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4차산업혁명 홍수 속에서 삶이 실종되었다는!

뭣이 중한디? 어디까지나 삶이 우선이다.  기술이란 그 삶을 보조하는 수단일 뿐인데, 어느덧 기술이 내 삶의 주인이 되고 말았다. 

산업혁명이 시작된 지 거의 200년... 디지털혁명으로 자본주의 시절도 거의 저물어간다. '인터스텔라'가 보여준 것처럼 인류의 '산업화'는 지구의 '사막화'로 종착됐다. 자연은 인간의 가혹한 착취로 인하여 '미세먼지'로 산산히 부서졌고, 무한성장 영원행복을 추구하던 인간은 자기파괴의  '분열증'으로 가루가 되어 흩날린다. 모두 '미쳤다'라는 표현을 듣기 싫겠지만 사실인 걸 어쩌누!

인류는 COVID-19 팬데믹에서 사무치게 깨달아야 한다. 기후재앙 10년 내 해결 못하면 끝이다. 산업화의 방식으로 더 나아가면 인류 '삶의 복원력'도 사라진다.  

'자연인'을 지향하는 건 이런 징후를 무의식적으로 감지한 때문이 아닐까. '동굴'이란, '바다'란 내 안의 자연이자 존재의 시원과 같은 것이므로. 그러므로 문명의 진군이 가속화될수록 자연에의 열망 또한 멈추지 않을 것이다. 

알파와 오메가, 첨단과 원시의 어긋남 혹은 어울림! 21세기가 열어야 할 비전이 여기에 있을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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