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열사들... “독재타도, 광주진상 규명” 전두환 향한 피 맺힌 절규
전두환 사망으로 목숨 바친 수많은 민주열사들 재조명

이철규군 변사사건/ 1989년 6월 3일 이철규군 빈소를 찾은 평민당 김대중 총재와 어머니 황정자씨가 흐느끼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이철규군 변사사건/ 1989년 6월 3일 이철규군 빈소를 찾은 평민당 김대중 총재와 어머니 황정자씨가 흐느끼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전두환 사망으로 그의 독재에 맞서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했던 민주 열사들의 투쟁이 재조명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몸에 불을 지르면서 민주화를 부르짖어 전두환 정권의 독재를 알리고자 했다. 또 민주화 투쟁 중 사망원인도 알 수 없는 변사체로 발견되기도 했다.

1980년 5·18 민주화운동 이후 전두환 정권의 철권통치에 지하에서 산발적인 시위를 이어가던 학생들은 언론도 다 막힌 상태에서 1980년대 후반 분신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전두환 정권의 탄압을 알릴 수 밖에 없었다.

고등학생 신분으로 5·18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던 표정두 열사는 가정 형편상 호남대를 자퇴한 뒤 야학 교사로 활동하며 민주화운동을 계속했다.

그는 1987년 3월 서울 세종문화회관 인근 주한 미국 대사관 앞에서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을 촉구하며 등유를 몸에 뿌리고 불을 붙였다.

그가 메고 있던 가방 속에는 '내각제 반대' '장기집권 반대'라는 쪽지와 신문 등이 들어있었다.

행인 2명이 옷을 벗어 불을 끄려 했지만 끄지 못하고 교통경찰이 인근에서 가져온 소화기로 불을 껐다.

근처 병원으로 실려 간 표 열사는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목숨을 유지하고 있다가 공권력을 앞세운 전두환 정권이 분신 사흘째 되는 날 부모 동의 없이 백부가 입회한 자리에서 그의 산소호흡기를 떼도록 한 것으로 알려졌다.

화장된 그의 유해는 당초 고향인 광주에 안치하려 했지만, 그마저도 허락되지 않아 경찰 버스를 타고 광주로 내려오던 중 유해를 금강에 뿌려야 했다.

그는 시간이 흘러 민주화 열사로 인정받았고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제37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표 열사 등의 정신 계승을 강조하기도 했다.

표정두 열사 기념비 이전 제막식 (사진=연합뉴스)
▲ 표정두 열사 기념비 이전 제막식 (사진=연합뉴스)

또 목포대학교 학생으로 대학 수습기자로 일하던 박태영 열사는 '군부 독재 끝장내고 민주정부 수립하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42일간 단독 시위를 벌였다.

그러다 87년 대통령 선거를 며칠 앞둔 12월 9일 "지성인에겐 행동이 요구된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분신했다. 만 20살이었다.

서울대를 다니고 있던 이재호·김세진 열사는 1986년 신림사거리에서 가두 투쟁을 하다 강제진압 하려는 경찰에 맞서 3층 건물 옥상에 올라가 시너를 몸에 뿌리며 경고했다.

그러나 이를 무시한 경찰이 강제진압에 나서자 두 사람은 몸에 불을 붙이는 것으로 항거했다.

민주화를 요구하다 숨진 채 발견된 열사들도 있었다.

1984년 전남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한 기혁 열사는 이념 서클에 가입해 전두환 군부 독재 반대 투쟁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학생 운동을 위축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부당 유급제(낙제 점수를 받으면 재시험의 기회를 주지 않고 무조건 낙제시키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었는데 기 열사는 이에 대한 반대 투쟁을 하다 85년 1월 행방불명됐다.

보름 만에 무등산에서 시신으로 발견됐지만, 그의 사망원인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이 외에도 영화 '1987'에서 다룬 서울대생 박종철 열사의 고문치사 사건, 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이한열 열사의 최루탄 피격 등 세간에 알려진 역사적 사건 역시 모두 전두환 정권에서 자행된 일이었다.

이러한 열사들의 목숨을 건 투쟁은 전씨 정권을 이어받은 노태우 정권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분신 정국'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박승희 열사 영결식 / 1991년 5월 25일 전남대 5·18 광장에서 거행된 박승희 열사 영결식 (사진=연합뉴스)
▲ 박승희 열사 영결식 / 1991년 5월 25일 전남대 5·18 광장에서 거행된 박승희 열사 영결식 (사진=연합뉴스)

박승희 열사는 전남대 식품영양학과 2학년 재학 중이던 1991년 4월 29일 명지대 강경대 학생이 백골단의 쇠 파이프에 맞아 사망한 사건을 규탄하는 집회가 열린 전남대 5·18 광장에서 "노태우 정권 타도하고 미국놈들 몰아내자. 2만 학우 단결하라"를 외치며 분신했다.

또 조선대를 다니며 반독재 투쟁을 하던 이철규 열사의 사망은 노태우 정권 시절 대표적인 의문사 중 하나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가 1987년 가석방된 그는 학교로 복학해 교지에 논문을 게재했다가 다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현상수배 됐다.

1989년 5월 3일 광주 제4수원지 청암교에서 경찰의 검문으로 붙잡힌 것이 목격된 이후 행방이 묘연해졌다가 일주일 뒤인 10일 제4수원지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경찰은 이 열사의 사망 원인을 익사로 발표했으나 그를 부검하기 위해 입국하려던 해외 법의학자의 입국을 정보기관이 나서서 방해한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현재 광주 북구 망월동 망월묘역에 안장돼 있다.

당초 망월묘역은 5·18 희생자들을 안장한 곳이었는데 희생자들이 국립묘지로 옮겨가면서 지금은 민족민주열사 묘역으로도 불린다.

열사들이 숨졌을 때 묘마저 쓰지 못하도록 한 전두환 정권의 공작으로 인해 화장된 유해는 강에 뿌려진 경우가 많아 이곳엔 유해 일부나 유품 일부를 안장했다.

전두환 비석 밟기 (사진=연합뉴스)
▲ 전두환 비석 밟기 (사진=연합뉴스)

묘역을 향하는 길목엔 민주인사들이 깨부순 '전두환 방문 기념 비석'이 묻혀있어 그의 이름을 밟고 지나가도록 했다.

전두환을 규탄하며 쓰러져간 민주열사들 앞에서의 부끄러움은 살아남은 자의 몫으로 오롯이 남아있다.

김순 광주·전남 추모연대 집행위원장은 일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전두환 정권 시절 수많은 사람이 다치고 죽었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은 진실들이 남아있다"며 ""전씨는 죽었지만 전두환에게 부역했던 수많은 전두환들이 아직 남아있는 만큼 이들로부터 진실을 어떻게 끌어낼 수 있을지 고민해봐야 할 시점"이라고 덧붙였다.

또 "개인과 민간에 역사 청산을 맡겨둘 것이 아니라 진상조사위처럼 공적 조사 권한을 가진 기구를 구성해 증언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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