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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일의 법과시대정신] 권순일 전 대법관의 부끄러운 처신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는 가장 최근에 ‘퇴임’한 미국 연방대법관이다. 1993년 8월 10일부터 2020년 9월 18일까지 27년간 재임. 긴즈버그의 퇴임일은 87세의 나이에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날이다. 미국 연방대법관이 종신직인 까닭이다. 긴즈버그는 2010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 재임 중 법조계로부터 직·간접적인 사임 압력을 받았다. 77세의 나이, 암투병 등 건강 문제와 함께 민주당 대통령이 후임자를 임명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사임 요청을 거부한 긴즈버그의 속내는 정확히 알 수 없다. 2020년 9월 18일은 대선일인 11월 3일을 불과 40여일 앞둔 시기였다. 긴즈버그가 손녀에게 “나의 가장 강렬한 소망은 새 대통령이 취임할 때까지 교체되지 않는 것”이라고 밝혔다는 걸 보면 그가 자신의 후임에 큰 신경을 썼음을 알 수 있다. 긴즈버그의 후임자는 개인적 관심사에 그치지 않았다. 연방대법관 지명은 대선 못지 않게 정치권의 힘겨루기가 격렬하게 벌어지는 전장이기도 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즉시 빈자리를 채우려 한 반면, 민주당은 새 대통령에 맡겨야 한다고 맞섰다. 민주당은 전례를 들어 공화당을 비판했다. 2016년 2월 앤터닌 스칼리아 대법관의 사망으로 예상치 못한 공석이 발생하였다. 민주당으로서는 5대4로 보수 우위인 대법원 역학 구도를 바꿀 수 있는 호기를 맞은 셈이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진보 성향의 메릭 갈런드를 후임자로 지명했으나, 상원 다수당이던 공화당은 대선을 이유로 의회 인준 절차를 거부했다. 이후 트럼프 대통령은 2017년 취임 뒤 닐 고서치 대법관 임명에 성공했다. 2020년에도 53 대 47로 상원 다수였던 공화당은 ‘내로남불’ 비난에도 불구하고 밀어 붙였다. 긴즈버그 사망 후 40일 후인 10월 27일 트럼프 대통령이 지명한 에이미 코니 배럿 대법관 취임으로 대법원은 6대3의 보수 우위로 재편되었다.

연방대법원 구성에 미국인들이 민감한 이유는 분명하다. 임기가 4년 혹은 최대 8년에 불과(?)한 대통령 보다 종신직인 대법관이 미국 사회의 방향성에 훨씬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인종 및 여성 차별 철폐, 소수자 보호, 이민 정책, 임신 중단 권리, 총기 규제, 환경 문제, 건강보험 등 미국 사회의 온갖 갈등 유발 의제들이 최종 결정되는 곳이 연방대법원이다. 2000년 대선에서는 사실상 대법원이 대통령을 결정한 사례도 모두가 목격한 바 있다. 미국 국민이 가장 신뢰하는 국가기관으로 연방대법원의 권위를 인정하고 대법관 9명이 ‘9인의 현자(賢者)’ 혹은 ‘지혜의 9기둥’으로 불리는 이유이다. 연방대법원의 판결이 때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대법관들이 깊은 통찰과 철학으로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현명한 결정을 내린다는 믿음이 쌓여왔기 때문이다. ‘루스(Ruth) 없이 트루스(Truth) 없다’는 일종의 언어유희도 긴즈버그 대법관에 대한 일반 대중의 헌사로 볼 수 있다.

미국 경우를 길게 얘기한 것은 가장 최근에 ‘퇴임’한 대한민국 전직 대법관의 처신 때문이다. 짐작하다시피 권순일 전 대법관이다. 권 전 대법관은 퇴임 후인 지난 해 11월부터 ‘화천대유자산관리’사의 고문을 맡았다. 그는 대법관이던 작년 7월 이 지사의 선거법상 허위 사실 공표 혐의 사건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무죄 취지의 의견을 냈다. 대법관 12명이 참여한 심리에서 권순일 대법관과 김명수 대법원장만 남겨놓고 유무죄가 5 대 5로 맞섰다. 노태악(이하 경칭 생략) 유죄, 김상환 노정희(주심) 무죄, 이동원 유죄, 민유숙 무죄, 안철상 유죄, 김재형 박정화 무죄, 이기택 박상옥 유죄. 승부를 결정지은 것은 권 대법관의 무죄 의견이었다. 대법원장은 다수 의견을 따르는 게 관례이기 때문이다. 법조계에서 ‘이재명을 살린 권순일’ 얘기가 회자되는 이유다. 판결문에서 유죄를 주장한 반대의견을 읽어 보면 통상적인 반대의견과는 상당히 결이 다르다. 다수의견을 수긍할 수 있고, 반대의견도 일리가 있다는 정도에 그치는 게 일반적이지만 이 지사 사건에서 5인 대법관의 반대의견은 통렬하다. 허위사실이 분명하지만 적극적 표명이 아니라 토론회에서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소극적으로 허위답변을 한 것은 선거법상 허위사실 유포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다수의견은 기존의 확립된 법리와 대법원 판결 취지에 정면으로 반한다는 강력한 비판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대법관 퇴임 후 취업제한 기간에, 이른바 ‘듣보잡’일 수 밖에 없는 화천대유라는 회사 고문직을 맡은 것은 정말로 이례적이다. ‘상고심 도장값’만 수천만원에 이른다는 대법관 출신 변호사 아닌가. 현재까지 이 지사와 화천대유의 연관성이 확인된 바는 없다. 하지만 절체절명 상황에 처했던 이 지사 회생에 결정적 역할을 한 권 전 대법관이 이 지사가 성남시장 시절 최대치적으로 내세우는 대장동 개발을 주도한 회사에 영입된 것은 인연치고는 참으로 고약한 우연이다. 권 전 대법관이 고문료 월 1500만원을 받은 게 알려지면서, 일각에선 ‘보은 차원’ ‘사후수뢰죄’ 논란이 일기도 한다. 법으로 밥을 먹고 사는 사람의 하나로서 그런 의혹까지는 차마 제기하지 못하겠다. 그래도 변호사법 위반 논란은 다른 차원이다. 퇴임 후 연세대 로스쿨 석좌교수로 영입된 권 전 대법관은 변호사 등록을 하지 않은 채 고문을 맡은 것으로 보인다. 고문료에 걸맞은 일을 열심히 했다는 화천대유측과 별다른 일을 하지 않았다는 권 전 대법관의 엇갈린 해명은 실소를 자아낸다. 법률자문 일을 열심히 했다면 변호사법 위반이고, 별다른 일을 하지 않고도 월 1500만원을 받았다면 도대체 무슨 명목이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 법률자문 아닌 경영자문을 했다, 송전탑 지중화 공사 자문을 위해 영입했다는 등 해명은 할수록 구차하다는 생각만 더 할 뿐이다. 우리의 경우 미국 연방대법원의 역할이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로 분리 되어 있지만 최고 법관인 대법관에 대한 기대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권 전 대법관의 일탈은 열심히 본분을 다하는 사법부 구성원들을 욕보이고 사법부에 대한 신뢰를 더욱 떨어뜨리는 일에 다름 아니다.

긴즈버그는 2019년 버그루엔상(Berggruen Prize for Philosophy and Culture) 수상자로 선정되어 백만달러 상금을 수령하였다. 재단 측은 긴즈버그가 “전 생애에 걸쳐 인권과 성평등을 위해 헌신한 선구자”로서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인간의 자기 이해와 발전에 크게 기여한 아이디어를 제공한 사상가”를 기념하는 상을 수여한다는 취지를 밝혔다. 긴즈버그는 상금 전체를 말랄라 펀드, 이스라엘 유대인-아랍 교육센터, 미국변호사협회, 슬론케터링 기념 암센터, 워싱턴 콘서트오페라와 같은 비영리 자선단체에 기증하기도 했다. 화천대유 관련 논란이 일자 권 전 대법관은 그동안 받은 고문료를 자선단체에 기부했다고 한다. 기부 자체야 좋은 일이지만 박수를 보낼 사람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권 전 대법관은 검찰 수사를 받아야 할 처지가 되고 있다. 이런저런 고발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변호사법 위반에다 심지어 사후수뢰 혐의로 고발한 단체까지 있다. 대법원장과 대법관 다수가 사법처리 된 사법부의 치욕이 되풀이될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걱정할 일은 아니지만 재판의 권위가 다시 추락하고 법원 판결이 배척과 경멸의 대상이 된다면 만인과 만인의 투쟁을 잠재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수사 결과 권 전 대법관이 그저 변호사법을 가볍게 위반했거나 아니면 부적절한 처신이었다는 정도에 그쳤으면 하는 바람이다. 만에 하나 ‘50억 클럽’이나 이 지사 측과의 연관성 등 정말 충격적인 결과가 나오지 않기만 바랄 뿐이다. 써 놓고 보니 앞에 잔뜩 늘어놓은 미국 연방대법관 얘기가 낯간지럽기까지 하다.

※ 외부 필자의 기고는 <폴리뉴스>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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