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의 위대함과 홍범도장군의 위대함은 거의 같다. 이렇게 평가합니다.”

봉오동대첩과 청산리대첩에서 당시 최강 일본군 섬멸은 '독립전쟁 사상 최대의 승리'

봉오동대첩과 청산리대첩에서 독립군 연합부대를 지휘하며 독립전쟁 사상 최대의 승리를 이끈 홍범도 장군은 일제도 외경심을 가졌을 만큼 인품과 지략이 탁월한 독립전쟁의 영웅이자 살아있는 신화였다.
▲ 봉오동대첩과 청산리대첩에서 독립군 연합부대를 지휘하며 독립전쟁 사상 최대의 승리를 이끈 홍범도 장군은 일제도 외경심을 가졌을 만큼 인품과 지략이 탁월한 독립전쟁의 영웅이자 살아있는 신화였다.

“이순신 장군의 위대함과 홍범도장군의 위대함은 거의 같다. 이렇게 평가합니다.” 

전 국가정보원장을 지낸 이종찬 제1회 여천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이사장의 말이다. 

홍범도 장군,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를 “항일 무장투쟁사에 있어서 살아있는 전설”이라고 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일본이 임진왜란에서 이순신 장군을 두려워했듯이 일본제국 군인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사람은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홍범도 장군이었다. 

홍범도 장군은 탁월한 전략과 리더십으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가장 많이 싸웠고, 가장 많이 이겼고, 가장 오래 투쟁한 사람이다.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홍범도 장군은 우리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한때는 그의 전기는 금서였던 시절도 있었고, 역사책 어디에도 청산리대첩의 주인공이 홍범도 장군이라는 것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장군을 공산주의자, 자기 이름도 못 쓰는 일자무식, 일개 총 쏘는 포수로 폄훼하여 왔다.

서거 78년 만에 유해가 송환되고, 우리 민족에게는 영웅이 한 분 더 늘어났다.

독립운동의 역사는 흘러 가버린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역사다. 아직도 우리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곳곳에서 친일파와 일제의 잔재를 만난다. 

홍범도 장군에게 부끄럽지 않은 21세기 대한민국을 기대해 본다.

 

감영의 군인에서 승려로, 승려에서 명포수로

홍범도는 일본이 메이지유신을 단행한 1863년 8월 27일 평안도 평양에서 머슴의 아들로 태어났다. 홍범도가 태어난 지 7일 만에 어머니가 사망했다. 또 9살 되던 해에는 아버지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나 고아가 되었다. 이후 홍범도는 작은아버지 집에서 살다가 조금 성장하자 어느 부잣집의 머슴 노릇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15세가 되던 1883년 평양 감영의 나팔수로 입대하여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온다. 약 3년간 병영 생활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지만, 당시 만연했던 군대의 비리를 보고 격분하여 병영을 뛰쳐나왔다. 

이후 제지공장 노동자를 거쳐 금강산 신계사 지담 스님의 상좌로 들어가 승려로 수도 생활을 시작한다. 이순신 장군의 적손인 지담 스님에게서 홍범도는 이순신 장군의 용병술과 진법을 전수 받는다. 또 지담 스님으로부터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 서산대사와 같은 승병들이 의병 전쟁으로 승리한 사례를 자세히 듣고 자신도 스님들의 선사들의 의병 활동과 같은 역할을 해야 하겠다는 정신적인 교감과 지식을 배웠다. 

홍범도는 수행 중 비구니였던 첫 번째 아내를 만나 사랑을 하게 되면서 파계를 하고 강원도 회양군으로 가서 산포수로 살아가게 된다.

유인석과 만남, 의병이 되다.

그러던 중 1894년 음력 1월 10일 보국안민과 척양척왜의 기치를 내걸고 동학혁명이 발발하고 일제의 의해 처절하게 짓밟힌다. 또 같은 해 명성황후시해사건이 일어나 국모가 참살당하는 일어 벌어진다.

연이은 조국의 참담한 현실에 27살에 청년 홍범도는 마침내 1895년 11월 일제를 척결하고 쓰러져가는 조국을 건지기 위해 일어섰다.

황해도 출신의 김수협과 의기투합해 함경남도 안변군에서 의병부대를 조직하는 등 의병장 유인석 부대에 합류했지만 개틀링 기관총 등 최첨단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의 교전에서 최초의 동지인 김수협 마저 잃고 혈혈단신이 되고 만다.

홍범도는 다시 포수로 돌아가 북청과 삼수갑산에서 범 잡는 명포수로 이름을 떨치게 된다.

그러나 급격히 진행되는 국내외 정세는 그를 역사의 장으로 다시 불러들인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 고종황제는 특사로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파견하여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폭로하고 대한제국의 주권 회복을 열강에 호소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이를 빌미로 고종황제를 강제로 폐위시키고 군대 해산령을 내려 대한제국을 무력화 시켰다.

이에 의병들이 전국에서 들불처럼 일어나 봉기를 하자 일제는 1908년 9월 3일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공포한다. 대부분의 산포수 부대들은 다 반납을 했다.

그런데 거의 유일하게 홍범도 장군이 지휘하고 있던 부대는 반납을 거부하고 본격적인 의병 활동에 나선다. 

일본군에게 '백두산 호랑이' '비장군'이라 불리다

1907년 11월 15일 홍범도와 차도선이 이끄는 산포수 의병부대 첫 전투가 벌어진다.

300여 명으로 이뤄진 홍범도 부대는 주변의 의병부대와 연합해 산세와 지리에 밝은 이점과 민첩한 기동력을 발휘하여 일본군에게 치명상을 입힌다.

일본군에게 ‘날아다니는 백두산 호랑이’ ‘비장군’, 함경도 백성에게는 ‘축지법을 구사하는 신출귀몰의 명장’이라 불릴 정도로 홍범도의 유격전은 비범했다. 특히 그의 사격술은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

홍범도부대가 일본군을 연파하자 일제는 전략을 바꿔 부인 이옥분을 납치해 남편의 귀순을 권유하도록 강요하지만, 남편 못지않은 강직한 기개를 지녔던 그녀는 모진 고문 끝에 옥사하고 만다.

일제는 부인이 죽자 이제는 큰아들 양순에게 귀순을 종용하는 편지를 써서 전달하게 한다. 이때 분노한 홍범도는 아들의 소리를 꾸짖으며 총을 쏘는데 “이놈아 네가 전날에는 내 자식이었지마는 네가 일본 감옥에서 삼사 삭을 갇혀 있더니 그놈의 말을 듣고 나에게 해를 주고자 하는 놈이다. 너부터 쏴 죽여야겠다.”고 했다 (홍범도일지)

다행히 목숨을 건진 양순은 의병대 투신해 싸웠지만, 전투 중 전사하고 만다. 그러나 가족의 비극적인 죽음도 홍범도의 항일의지는 꺾을 수는 없었다.

밀산에서 힘을 키우다

개마고원을 주 무대로 항일전에 치열하게 전개되자 일제는 홍범도부대를 잡기 위해 대대적인 섬멸 작전을 전개한다. 포위망이 좁혀오자 더는 항전이 어렵다고 판단한 홍범도는 소수의 인원을 이끌고 1908년 11월 간도와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1914년 중국에 흑룡강성 밀산에 자리를 잡는다.

러시아와 중국 국경지대에 있는 밀산은 항일운동의 중요 거점 지역으로 홍범도는 이곳에서 소학교와 무관학교를 설립해 직접 교장을 역임하며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가르쳤으며, 장기전에 대비해 독립군을 양성하는데 힘썼다.

밀산은 대종교 교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곳으로 흥개호라는 큰 호수를 끼고 오지에 가깝다 보니 일제의 간섭을 좀 덜 받았다. 그래서 나와서 독립운동의 하다가도 좀 휴식 기간이 필요할 때 또다시 밀산으로 가서 재정비하던 그런 곳이다.

홍범도 대한독립군 사령관에 선출

1920년 12월 결성된 대한독립군단
▲ 1920년 12월 결성된 대한독립군단

홍범도가 밀산에서 독립전쟁을 준비하고 있던 1919년 대한독립운동사에 한 획을 긋는 대사건이 벌어진다. 대한의 백성들이 일제에 맞서 떨쳐 일어난 3··1 대한독립 만세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이를 계기로 3월 17일 연해주 우수리스크에서 모든 독립운동단체가 대한국민 의회(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임시정부)를 결성한다. 이곳에서 이동휘와 함께 군무부에서 활동한 홍범도는 군무부 병력을 이끌고 400명 규모의 대한독립군을 창설하고 이때 대한독립군 사령관에 홍범도가 선출된다.

홍범도는 1919년 12월 대한독립군 창건 때 발표한 대한독립군 유고문에서 “당당한 독립군으로 신(身)을 탄연포우(彈煙砲雨) 중에 투하야 반만년 역사를 광영케 하며 국토를 회복하야 자손만대에 행복을 여(與)함이 아(我) 독립군의 목적이오 또한 민족을 위한 본의라”고 했다.

독립 전쟁 사상 최초의 승리, 봉오동대첩

1919년 8월 하순 간도 지방으로 이동한 대한독립군은 본격적인 독립전쟁을 시작한다. 두만강을 건너 국내에 진공해 함경남도 혜산진에 일본군 수비대를 섬멸시킨 것이다. 대한독립군의 대대적 투지는 한민족의 독립 의지를 높였을 뿐만 아니라 만주와 러시아 지역에서 일만육천 명에 달하는 독립군부대들이 창설돼 무장 항쟁을 활발히 펼치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홍범도 장군은 1920년 5월 28일 화룡현 봉오동(중국 길림성 왕정현)에서 최진동, 최현산 형제의 군무도독부, 안무의 국민회군 등과 연합하여 1,200명 규모의 대한북로독군부를 결성한다. 

봉오동에서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하고 있던 북로독군부는 6월 초 드디어 결전의 날을 맞이한다. 독립군부대가 수비군을 대파하자 일본군이 곧바로 향한 것은 봉오동 입구, 그러나 이때 이를 대비하고 있던 대한북로독군부와 신민단은 봉오동에 들어온 일본군에게 집중포화를 퍼부어 단 하루 두 차례의 전투에서 500여 명의 부상자를 내며 대승을 거둔다.

1919년 임시정부가 출범하고 1년 후에 벌어진 전투에서 승리는 임시정부가 내세운 군대가 싸워 처음으로 이긴 대규모 전투였다. 

봉오동 대첩은 정유재란 이후 한일 정규군이 다시 맞붙은 전투이자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일본군 1개 대대를 섬멸한 독립 전쟁 사상 최초의 승리였다. 이 전투로 홍범도 장군은 일약 독립군과 한인 사회에서 영웅으로 떠오른다. 

독립운동의 정신적인 근간이 된, 청산리 대첩

우리 민족에게 대한독립의 희망을 안겨준 봉오동대첩, 그러나 봉오동대첩에 참패를 당한 일제가 보복에 나서자 8월 하순경 홍범도 부대를 필두로 연합부대들은 새로운 기지를 찾아 떠나야 했다. 

그들이 향한 곳은 화룡현에 있는 어랑촌과 청산리 일대, 중국과 국경지대인 이곳은 국내 진입 작전과 동포들의 병력 및 군수물자 조달이 가능했으며 특히 장장 60리에 이르는 계곡은 먼저 진을 치는 쪽이 유리하게 되어있었다.

한편 독립군의 이동 경로를 추적하던 일제는 새로운 음모를 꾸민다. 봉오동 참패에 대한 보복과 간도 출병에 명분을 얻고자 마적단을 매수해 훈춘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게 한 것이다. 이에 대비해 10월 13일 독립군도 연합부대를 형성하고 홍범도 장군을 사령관으로 하여 본격적인 항일전에 대비했다.

10월 21일 아침 9시경 청산리 계곡으로 진격해 들어온 일본군, 백운평 일대에서 매복하고 있던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는 일제히 사격을 퍼부어 100여 명을 사살한다. 완루구 전투에서 홍범도 연합부대는 협공으로 일본군 400여 명에게 사상을 입힌다. 천수평 전투에서는 김좌진 부대가 홍범도 연합부대의 지원으로 위기에서 벗어나는 등 각 부대 간의 협력과 전략이 빛을 발했다.

6일 동안 열 차례에 걸쳐 치열한 전투를 벌인 청산리 대첩은 매 전투에서 지형지물을 활용하는 전략 전술과 유격전으로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1945년 광복 때까지 줄기차게 이어졌던 의열투쟁, 독립운동, 광복운동의 정신적인 맥락이 청산리와 봉오동 양대 대첩을 통해서 형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봉오동대첩과 청산리대첩에서 독립군 연합부대를 지휘하며 독립전쟁 사상 최대의 승리를 이끈 홍범도 장군은 일제도 외경심을 가졌을 만큼 인품과 지략이 탁월한 독립전쟁의 영웅이자 살아있는 신화였다.

이범석의 회고록

자신의 이름도 쓰지 못할 정도의 일자무식으로 매도 된 홍범도 장군은 유인석에게 보낸 편지가 발견되면서 군인으로서는 보기 드문 명필 명문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 자신의 이름도 쓰지 못할 정도의 일자무식으로 매도 된 홍범도 장군은 유인석에게 보낸 편지가 발견되면서 군인으로서는 보기 드문 명필 명문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1983년 한국독립사편찬위원회 출간한 한국독립사, 이 책에 청산리 대첩 편에선 홍범도 장군의 이름을 찾을 수 없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발단은 청산리 대첩에서 북로군정서군 장교였던 이범석(당시 20세)이 후일 발간한 회고록에 있다.

해방 후 이승만 정권에서 국무총리를 지닌 그는 자신의 회고록(우둥불)에서 홍범도 부대에 대해 부정적으로 기술한다.

이는 1980년까지 청산리 대첩에서 홍범도 장군이 지워지고 한국 독립운동사에서도 철저히 외면 받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부정적인 기술을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홍범도 장군을 자신의 이름도 쓰지 못할 정도의 일자무식으로 만들었다.

실제로 홍범도 장군은 유인석에게 보낸 편지가 발견되면서 군인으로서는 보기 드문 명필 명문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홍범도 장군은 러시아로 이주한 후에 일본군을 격퇴하기 위해 소비에트 정부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공산당에 입당도 하고 레닌으로부터 상을 받고, 권총도 받았다.

이범석은 당시 반공이니 멸공이니 하는 이데올로기적인 상황, 또 자신이 속했던 김좌진 장군 부대의 공훈을 더 크게 보이려는 복합적인 이유로 해서 홍범도 장군의 공적을 많이 깎아내리고 폄하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로 이주, 비극의 시작

봉오동 대첩과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끈 독립군 연합부대는 기쁨도 잠시 일본군의 보복을 피하고 전력을 강화하기 위해 간도를 떠나 북상 길에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독립군 부대가 간도를 떠난 후 일제의 잔혹한 보복이 전개된다. 1920년 10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서북간도와 연해주에서 간도참변이 벌어져 약 5천 명에 이르는 동포가 학살을 당한 것이다.

새로운 항일기지 건설을 위해 러시아 지역으로 이동하던 독립군들은 장기적인 항일전에 대비해 1920년 12월 밀산에서 독립군을 통합해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한다.

1921년 1월 우수리강을 건너 안전지대인 러시아령 이만에 집결한 대한독립군단은 신한촌참변을 피해 자유시에 집결해있던 러시아기업 자유의병대의 권유로 자유시로 이동한다.

일본군을 격퇴하기 위해 소비에트 정부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자유를 찾아 떠나온 자유시에서 엄청난 비극이 벌어질 줄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간도참변과 신안촌 참변으로 활동 근거지를 상실하고 자유시로 몰려든 4,500여 명의 독립군부대 그들이 이곳에 집결한 목적은 단일 조직을 결성에 대일 항전을 전개하고 소비에트로부터 자치주를 보장받기 위해서였다.

항일 무장투쟁조직의 괴멸, 분열의 결과

이때 소비에트 혁명정부가 러시아제 무기 일괄지급을 명분으로 독립부대에 무장해제를 요구하면서 일이 더욱 꼬이게 된다. 그러나 군인에게 무기는 생명과도 같았다. 결국 무장을 해제하는 과정에서 충돌이 벌어지면서 항일무장 독립운동사상 최대의 비극을 낳게 된다.

참상이 일어나던 1921년 6월 28일 자유대대를 앞세운 러시아 육군 제29연대는 장갑차까지 동원해 사할린의용대를 무장해제를 시키려 했다.

그러나 사할린의용대가 무장해제에 불응하자 공격 명령이 내려졌다. 장갑차의 기관포가 불을 뿜고 집중 포격이 퍼붓는 상황에서 아무리 일당백의 병사들이라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다. 집중포화 속에서 살아남은 용사들은 가까운 제야강까지 도망쳐왔지만 계속되는 사격에 제야강은 용사들의 피로 붉게 물들어 갔다.

이 사건으로 대한독립군단은 와해되고 한인들의 항일무장 독립전쟁은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된다. 이로써 우리 민족은 1945년 해방될 때까지 다시는 이같이 대규모 무장투쟁조직을 갖출 수 없었다.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희생당한 자유시참변은 홍범도 장군 개인에게도 씻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소비에트에 갇히다, 불행의 연속

1921년 7월 소비에트 정부는 자유시에 남아있던 한인 병력을 이르쿠츠크로 이동 시켜 적군 직속 한인여단으로 편입시켰다.

이때 홍범도 장군은 비록 한인여단 제1대대 대대장으로 임명됐지만 사실상 그의 무장투쟁은 종료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둘째 아들마저 변사하면서 생애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다. 그의 나이 만 53세 때의 일이었다.

그러나 국제정세는 독립군의 의지와 상관없이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1회 극동인민대표회의에 참석해 레닌을 단독으로 만나 권총을 선물로 받는 등 공적을 인정받았으나 레닌 사망 후 등장한 스탈린 정부가 러시아 일대의 항일투쟁을 전면 금지하면서 홍범도 장군이 독립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1923년 50대 중반에 접어든 장군은 옛 전우들과 농업협동조합을 만들어 분전하면서 때를 기다리기 위해 이르쿠츠크를 떠나 하바롭스크로 향한다.

1926년에는 상처한 지 18년 만에 이인복과 재혼해 새 가정을 꾸렸지만 끊이지 않는 친일파의 위협과 농업조합을 빼앗으려는 지역관리의 횡포로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1927년 10월 장군을 결국 이를 해결하고자 소비에트 공산당에 입당한다.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 그리고...

1932년 일본이 만주국을 수립하면서 러시아령 한인들의 시련은 한층 가중되었다.

소비에트 당국은 한인들이 일본 스파이 활동을 하는 것을 우려해 감시를 강화한 것이다. 그러나 극동지역의 한인들에게 고난이 이제 시작이었다.

1937년 7월 7일 일본의 도발로 중일전쟁이 시작된다. 이때 소비에트는 중국과 상호불가침조약을 체결하는 한편 고려인 강제이주를 앞두고 불만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공산당 간부, 지식인, 군인 간부 등 2,500명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을 대거 처단한다.

그리고 마침내 8월 21일 일본 첩자의 러시아 극동지방 침투를 막는다는 구실로 모든 고려인의 강제이주를 결정한다.

고려인들은 강제이주를 당하기 직전에 이주 사실을 통보받았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떠나야 했다. 객차와 화물차 가축 운반차에 실린 17만 명의 고려인들은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고 8천 킬로미터를 달렸다.

난방이 안 되어 않는 추위와 굶주림 분뇨 냄새가 진동하는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죽어 나간 수많은 사람들은 어딘지도 모를 기찻길 옆에 쓸쓸히 묻히거나 창밖으로 버려졌다.

그렇게 한 달여를 달려 고려인들은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 분산 배치됐다.

1943년 10월 25일 향년 75세를 일기로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홍범도 장군은 이곳에서 서거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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