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진영과 정치 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김어준의 뉴스공장 방송화면
▲ 김어준의 뉴스공장 방송화면

 

김어준의 전가의 보도인 음모론이 다시 등장했다. tbs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 그는 “미래통합당에서 우리 당에 n번방 연루자가 있다면 정계에서 완전 퇴출(시키겠다고 했는데), 이거 매우 이상한 메시지”라고 말하면서 “공작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고 했다. 도대체 n번방과 정치공작이 무슨 관련이 있다는 얘기인가 했더니, “‘민주당의 n번방 연루자가 있을 예정이니 정계에서 완전히 퇴출시켜라’는 메시지를 예언처럼 하는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총선 한복판이니 한쪽 진영의 대변자가 자신의 촉을 발휘해 그런 얘기를 꺼냈나 싶다가도, 이건 아니지 싶었다. 벌써 몇 번째인가. 2018년 우리 사회를 휩쓴 ‘미투 열풍’ 때도 그랬다. "공작의 사고방식으로 보면 어떻게 보이느냐…. 문재인 정부의 진보적 지지자들을 분열시킬 기회다”라고 말하는가 하면 “미투를 공작으로 이용하고 싶은 자들이 분명 있다”고도 했다. 연이은 미투 폭로 속에서 남녀를 불문하고 분노하고 있던 와중에 그는 의연히 정치공작의 음모론을 말하고 있었다. 피해 여성들은 자신들의 폭로가 공작에 이용되는 나쁜 짓은 아닌가를 의식하게 되었고, 입을 여는 것이 쉽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미투 폭로가 정치공작과 연결된 사례는 아직까지 단 한 건도 확인된 것이 없다. 김어준의 음모론은 본질을 희석시키며 미투 폭로의 입만 막는 역할을 했을 뿐이다.

정봉주 전 의원의 미투 폭로 사건 때는 SBS 시사프로그램 ‘김어준의 블랙하우스’에서 정봉주의 알리바이를 입증해주는 방송을 했다가 여론의 비판 속에 프로그램이 징계를 받는 사태까지 이르렀다. 정 전 의원이 성추행 혐의에 대해 1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그의 알리바이와 관련하여 방송에서 내보낸 내용이 사실과 달랐음은 변함이 없다.

이쯤 되면 성인지(性認知) 감수성의 부재라고 밖에는 달리 말할 길이 없다. 언제나 진영과 정파의 이해관계 계산이 먼저 떠오르니, 피해받는 여성들의 고통 같은 것은 그 다음의 문제가 되고 만다. 하지만 세상에는 정치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할 일들이 있는가 하면, 그래서는 안될 일들이 있다. 그래서는 안되는 일들이란, 그 사회에서 약한 처지의 사람들이 받는 고통과 관련된 문제들이다. 우리에게는 무엇이 중한가. 정치적 유.불리인가, 보편적 윤리인가. 정치적 이해관계에 대한 계산이 앞선 나머지, 피해 여성들이 받은 고통이라는 본질에 물타기를 해서는 안된다.

미래통합당이 했다는 얘기는 사실 상식적인 얘기이다. 자기 당에 n번방에 연루자가 나올 경우 정치에서 퇴출시킨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얘기이다. 더불어민주당도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혹여라도 여권 성향 인사들이 연루된 사실이 공개될 것이라는 얘기를 어디서 들은 것인가. 설혹 그렇다 해도 그런 말을 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여당 쪽이든, 야당 쪽이든 연루자가 확인되면 선거에 미칠 영향 같은 것 고려하지 말고 당장 책임을 물어야 할 일이다. 정치가 그러한 죄상의 책임을 묻는 일을 가로막아서는 안된다. n번방 같은 반인간적이고 야만적인 행위 앞에서 여야를 따지고 진영을 따지는 것 또한 인간 보편의 윤리에 반하는 일이다.

김어준이 이번에 했던 말 가운데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었다. “이 분야만 오랜 세월 파온 저로서는….” 언제나 음모론을 주장해왔던 스스로를 정치공작을 파헤치는 전문가로 여기는 듯 하다. 증시 분석 전문가들은 자신의 주가 예측이 틀리면 고객들에게 사과라도 한다. 하지만 음모론 전문가에게서는, 자신의 예측 확률이 만점 짜리라고 생각해서인지, 음모론이 번번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도 사과의 말을 들은 적이 한번도 없다.

움베르토 에코는 자신이 쓴 『프라하의 묘지』에 관한 한 인터뷰에서 음모론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역사를 바꾼 큰 거짓들은 내가 알기로 모두 거짓임이 입증되었다. 그런데 무엇보다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어떤 것이 거짓임을 입증해도 사람들은 그것을 계속 진실이라고 믿는다는 것이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양치기 소년에서는 “늑대가 나타났다”고 외쳐도 결국은 도우러 나타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그런데 김어준이 꺼낸 수많은 음모론 가운데 그 뒤 결말을 알 수 없는 내용이 허다함에도 그를 믿는 사람의 대열은 끊이지 않는다. 아니나 다를까.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김어준의 말을 따라 ‘N번방 사건 가지고 검찰이 정치질 한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란 청원이 올라왔다고 한다. 성인지 감수성의 부재를 일관되게 드러내는 그에게 환호를 보내는 이들 가운데는 여성들도 매우 많다. 정치공작도 무섭지만, 사람들의 머리 속을 이렇게 만드는 광경도 나는 무섭다.

 

※ 외부 필자의 기고는 <폴리뉴스>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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