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뉴스> 창간 9주년 특별기획 <한국정당실록 60년>의 세 번째 인터뷰 인물은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 인터뷰 전문①입니다.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 인터뷰① 동영상


1. 오랫만에 뵙는데 건강하신 것 같다.

나는 저 요새 이렇게 인터뷰라거나 그런 경우가 거의 없었어요. 별로 언론에 나설 마음도 없었고, 그런데 이제 이건 오늘의 과거라 그럴까? 또 아니면 오래된 과거, 오래된 미래에 관해서 얘길 해 보자고 그러니까 바로 이제 지난날 과거로 옳게 조명을 해 봐야 미래도 제대로 볼 수 있다는 뜻으로 기획된 것이어서 의미가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2. 의장님께서는 동아일보 해직기자 출신이다. 당시 기자로서 박정희 정권과 김대중, 김영삼 양김 정치를 목도했을 것이다. 당시 시대적 상황에 대해 설명해 달라.

우선 동아일보 기자시절부터 얘길 하면 동아자유언론수호운동, 그것이 일어나게 된 배경을 먼저 좀 얘길 해야 될 텐데, 그 주축이 됐던 세력이 어떤 사람들이냐 하면 4.19혁명에 참여했던 사람, 그리고 6.3 한일국교정상화문제를 놓고 대정부투쟁이 벌어졌던 그 시기에 4.19와 6.3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초까지 동아일보에 입사한 기자들 주류세력이었어요. 이 사람들은 4.19혁명과 6.3운동이라는 거기에 세례를 받고, 어떻게 보면 대학생활을 보내고 사회생활을 이제 시작한 사람이어서 대단히 강렬한 민주화운동 내지는 민족자주운동, 통일운동에 관심을 가진 세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가 언론사 생활을 시작할 그 즈음이 3선 개헌이 시도가 되고, 그리고 71년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 김대중의 전면대결이 있고, 바로 곧 이어서 72년에 유신체제가 선포됐어요. 그러니까 언론자유가 점차, 극도로 탄압을 당하고 옥죄어지는 그런 상황이었어요.

그런 가운데 박정희의 유신독재가 강화되면서 자연스럽게 김영삼, 김대중 야당세력은 학생운동을 비롯한 지식인운동, 뭐 문화예술운동이라든지, 언론자유운동이라든지, 종교운동이라든지 이렇게 벌어지는 재야민주화운동과 제도권 야당, 다시 말해서 김영삼, 김대중으로 대변되는 그 세력들이 서로 제휴하고 협력하지 않을 수 없는 조건이 만들어졌던 겁니다.

물론 그 제도권 야당 자체도 대한민국 수립 이후에 모든 진보세력은 제도 정치권에서 배제됐잖아요. 조봉암 선생이 진보정당에서 진보당으로 그렇게 뜻을 펼치려다 사형을 당해버리고 4.19직후에 조금 생겨났던 진보정당도 5.16군사쿠데타가 나면서 전부 배제되거나 제도권 바깥으로 다 밀려버렸단 말이죠. 지하운동을 하거나 그렇게 돼 버렸으니까. 그러니까 제도권에 남아있다는 정당들은 모두 다 보수정당 내지 군부출신들이었단 말이죠. 그러니까 체질적으로 이 재야민주화운동세력과 제도권 정당 사이엔 상당히 성격상의 차별성이 있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나 그렇게 유신독재체제가 나타나면서 불가피하게 제도권 야당들도 야당으로서의 존립의미를 상실하게 된 것 아니에요? 그러면서 또 이 지식인운동이라든지, 재야운동은 더더욱 그 사상의 자유라든지, 언론의 자유라든지, 이게 다 원천적으로 말살되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서로 필요에 의해서라도 제도권 야당과 재야민주운동세력은 결합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되면서 김영삼, 김대중 세력과 재야민주화운동세력의 가깝다면 가깝고, 또 멀다면 먼 그런 관계가 만들어졌는데 아까 내가 설명에서도 드러난 거지만 제도권 야당은 본질적으로 보수정당으로 갔어요, 본질적으로.

그런가하면 이 재야 민주화운동세력은 상당한 정도의 제도권 정치에 들어가지 못했던 진보세력들이 뒤에 다 자리 잡고 있었어요. 또 학생운동 자체가 진보적 성격을 가졌었으니까.

그래서 제도권 야당은 재야민주화운동의 민주화 부분에서는 동의를 하지만 통일운동이라든지, 또 이 노동운동이라든지, 이런 진보성을 띠고 민족적 색채가 강한 것에 관해서는 제도권 야당 쪽은 좀 이렇게 소극적이거나 적대적이었어요. 그 얘기는 국가보안법이라든지, 어떤 이 분단체제의 제도 속에서 활동해야 되는 야당 입장에서는 재야 민주화운동의 지나친 급진성, 내지 진보성에 대해서 일정한 거리를 두려고 노력을 했다 이 말이죠. 그것이 민주화 민주주의 문제에 관해서는 의식이 일치하면서도 통일문제라든지, 노동문제라든지 이런 문제에 관해서는 거리를 두려는, 아까 내가 불가근불가원이란 얘기 그래서 쓴 거예요. 아마 그렇게 되면 제도권 야당과 재야 민주화운동세력 간에 어떤 것이 같고, 어떤 것이 차별성이 있는지 설명이 됐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점이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재야 민주화운동세력 속에서의 YS와 DJ의 정치적 비중을 우리가 간과할 수 없었어요. 왜냐하면 DJ가 73년에 도쿄에서 납치돼 왔었잖아요? 와 가지고 재야 민주화운동세력과 3.1민주화선언이라든지 뭐 이런 걸 통해서 계속 YS쪽보다는 더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어요.

그런가하면 YS쪽은 79년에 야당총재로서 의원직 제명을 당하잖아요? 그러고 그것이 어떻게 연결됐어요? 부마민주항쟁으로 연결이 된다고. 그리고 바로 10.26 박정희 피살사태로 연결이 된다고. 그러니까 YS가 국민들 속 특히 재야운동과도 굉장히 큰 비중을 가지고 연결이 되어 있었다는 게 드러난 거예요.

그런가하면 80년 5월의 광주민주항쟁은, DJ가 물론 호남 쪽이지만 재야 민주화운동과 굉장히 큰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는 게 드러난 거죠. 그러니까 그 부마항쟁과 80년 5월의 광주민주항행은 YS와 DJ의 국민들 속에서 재야 민주화운동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그 사람들의 정치적 비중을 그대로 드러내준 것이다, 이렇게 봐야 될 것 같습니다.

이렇게 표현을 하면 어떨까 싶어요. 60년대부터 70년대, 80년대까지 군사독재 아니에요? 그 당시는. 군사독재와 YS, DJ의 관계는 내가 본 바로, 언론인으로서 본 바로는 옛날 말에 빙탄불상용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얼음과 뜨거운 숯불은 서로 이게 어울릴 수가 없다고.

미국의 유명한 흑인시인이 있어요. 요새 이제 오바마가 존경하고 이런 사람인데 클리버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쓴 시집에 소울온아이스(soul on ice)라는 말이 있어요. 빙판 위에 있는 영혼, 영혼이라는 건 뜨거운 것 아니오? 그러면 이 소울은 아마 YS, DJ, 재야 민주화운동세력으로 비유할 수 있을까 싶고, 아이스는 이건 차디찬 군사독재라고 봐야 되겠죠. 이 둘이 그렇게 계속 투쟁을 벌이면서 한 시대를 이끌어 왔다고 보는데 이것도 지나고 나서 보면 대단히 이분법적 사고의 소산이라는 반성을 해요.

결국 2차대전 전에 식민지 시대를 겪었던 나라 중에 민주화와 산업화가 동시에 성공한 나라는 거의 유일하게 대한민국, 한국이라는 어떤 현상적인 결과를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민주화운동과 그 산업화는 서로 주고받으면서 변증법적으로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정반합을 통해서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이렇게 긍정적인 해석을 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 이렇게 내 결론삼아 얘기하고 싶어요.

3. 동아투위 그 자체만 좀 말씀해 주신다면...

그렇죠. 그 동아일보 기자들이 아까 내 6.3세대와 4.19세대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그랬잖아요. 그 당시 60년대, 70년대는 동아일보가 한국사회에서 압도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어요. 아마 부스도 조선일보 같은 데는 3분의 1밖에 안 됐을 거예요. 다른데 다 합쳐도 동아일보만 못 했을 거예요. 그런 정도로 아주 막강한 영향력을 동아일보가 발휘하고 있었는데 그러다보니까 이제 그 동아일보가 왜 영향력을 그렇게 많이 가졌었냐면 바로 그런 사람들이 동아일보의 주축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문제의식도 남달랐다고 봐요.

동아투위는 그 사람들이 주축이 돼서 자유언론운동을 벌이니까 박정희 세력 입장에서는 유신체제, 박정희 영구집권을 구축해 나가려면 동아일보의 그 세력을 그냥 놔두면 불가능했어요. 바깥에 학생운동이나 다른 많은 민주화운동세력이 동아일보의 그 세력을 매개로 해서 국민들한테 확산된 것 아니었냐고, 여기를 어떻게든 제거해야 될 절체절명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어요. 그런데 동아일보의 사주는 동아일보의 기자들이나 PD들하고 또 다른 것 아니오? 동아일보에 광고압력을, 광고탄압을 가하니까 사주가 박 정권한테 굴복을 해버린 거죠. 그리고 박 정권이 자기들 손으로 내쫓는 게 아니라 동아일보 사주를 통해서 이걸 대량해고를 시켰단 말이죠. 그게 75년도 동아대량해직, 언론인대량해직사태의 본질이에요.

밖에 쫓겨나온 이 세력은 물론 이제 언론인 기능이라는 게 그렇지만, 우린 그 언론자유라는 것을 일종의 다른 많은 자유를 자유롭게 만드는, 다른 많은 자유를 자유케 하는 그런 자유가 언론자유로 생각해요. 이걸 우리는 우리들 나름대로 연결적 자유라고 표현을 했는데, 연계적 자유. 다른 그 문화예술, 뭐 법조, 대학교수, 학생운동 이런 사람들을 조직적으로 이렇게 끌어 모으는, 연결시키는 그런 일종의 접착제 노릇을 했죠. 재야민주화운동에.

그래서 동아투위가 동아일보 안에 있으면서 더 많은 역할을 했었을지 모르지만 제도권 바깥으로 그렇게 내몰리면서 동아투위 자체도 재야민주화운동에 그런 역할을 수행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동아투위는 물론 펜과 마이크를 뺏긴 언론인들이었지만 유신체제나 80년도, 그 당시에도 신문사나 방송사 안에 있는 다른 기자들과 계속 끊임없이 관계를 가지면서 그들의 언론자유운동을 계기마다 이끌어내고 격려하는 그런 입장을 계속 견지했어요.

4. 그때 옥고를 치르고 나와서 재야단체를 규합하고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는데, 당시 재야단체의 성격이나 실제 힘은 어땠나.

70년대 후반이죠. 후반에 그때는 해직교수, 또 제적학생, 또 자유실천문인협의회라는 문화예술인들, 또 무슨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나 또 정의평화목회자단이라든지 또 불교승려, 민중불교연합회라든지 이런 종교, 또 인권변호사단체라든지 이런 각 부분에 금 밖으로 밀려난 지식인이라든지, 제적학생이라든지, 이런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어떤 연합적인 기구로 구성되어 있질 못했어요. 각각 자기분야에서 그렇게 활동을 하고 그랬는데, 저를 비롯한 동아투위 사람들이 그들을 묶어내는 역할을 했죠. 최초로 78년에 한국인권운동협의회라는 걸 아마 저희들이 주축이 돼서 78년에 만들었어요. 최초로 각 부문이 이렇게 인권운동협의회로 뭉친 거죠.

그때가 긴급조치시대였단 말이에요. 계속. 그러니까 무슨 조금 모인다든지, 뭐하는 게 전부 붙잡혀가도록 되어 있었어요. 그러니까 인권운동협의회 정도 되면 저거 어떻게 정치적인 거라고 하기도 어렵고, 그러니까 그냥 이름을 한국인권운동협의회라고 붙인 거에요. 근데 그것마저도 붙잡혀가고 그랬다니까요.

그러고 본격적으로 이제 한 것은 이제 박정희가 죽으면서 다시 최규하를 체육관에서 유신대통령 뽑듯이 또 뽑겠다고 그러니까 그걸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어요. 그때는 계엄령이 선포됐을 때 아니에요. 박정희 죽고 나서.

그러니까 모여서 윤보선 씨 집에서 성명을 냈는데 지식인들이 내가 주도를 해서. 그 성명 하나 냈다고 그냥 잡혀가서 징역간 거예요. 나는. 그 다음에 이제 위장결혼식 사건이 또 내가 한 다음에 바로 이어서 벌어지고, 그때 이제 각 부분의 지식인들이 함께 모여서 정치적 행위를 하기 시작한 거예요. 근데 했다하면 다 잡혀갔지, 가서 두드려 맞고. 계엄령이었으니까.

그래 나는 사실은 이 80년 광주항쟁 땐 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전두환 대통령 취임식 날 특별사면으로 나왔다고. 그리고 88년에 노태우 대통령 당선 뭐 취임특별사면으로 또 나왔고. 계속 일은 만들어놓고 잡혀 들어가고, 그 일의 성과는 다른 사람들이 또 만들어내고, 그런 일이 계속 반복이 됐어요. 계속 감옥에 가고 또 나와서, 또 조직하고, 조직 만들어 놓으면 그걸로 일정한 투쟁에 성과가 나타나면 또 난 붙잡혀 들어가고, 다른 사람이 또 그걸 마무리하고. 이런 일들이 반복이 됐어요.

5. 87년 김근태의 DJ 비지론을 시작으로 재야는 비지론과 단일화로 크게 분열되었다. 의장님은 단일화 입장에 섰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그 이후 야당정치가 이 문제로 크게 분열되어 지금까지 이른다. 그 폐해에 대해 많은 지적도 있는데.

그때 87년 체제가 오늘까지 우리를 규정하고 있다고 난 봐요. 사실 난 87년 6월 항쟁 당시에 이제 뭐 안에 있으면서, 그 전에 박종철 고문한 경관이 어떻게 내가 있는 특별사동 영등포교도소 안에 그 사람들이 들어오는 바람에 그 친구들 설득하고 뭐 이렇게 잘 얘기를 드러내가지고 박종철고문 은폐조작사건을 그때 안에서 밝혀냈는데, 그게 이제 도화선이 돼서 6월 항쟁으로 연결이 됐습니다만, 많은 사람들을 87년 6월 항쟁 후에 6.29선언 후에 석방을 하면서 나하고 장기표, 몇몇 사람은 석방을 안했어요.

우리 같은 사람들이 밖에 있었으면 양김분열을 막으려고 노력했겠지, 그러니까 나나 김근태, 장기표를 그냥 붙잡아 놔두고, 양김은 분열시키고, 노태우는 분열 덕에 당선이 되고, 그런 것 아니에요?

난 그때 당시 김천교도소 소년교도사에 날, 어른을 갖다 집어넣었다고. 소년들만 미성년 소년들만 있는데다. 거기 이제 대학생들 여럿 또 같이 가둬놔서 젊은 대학생들하고 그 양김이 분열해서 노태우가 당선되는 꼴을 그 안에서 그냥 무력하게 보고 있었다고. 물론 그때 조금 세월이 좋아지니까 신문 같은 것도 교도관들이 갖다 넣어줘서 보기도 하고, 면회 오면 얘기도 들었는데 그거 참 몹쓸 것이더라고. 그게. 뻔히 우리는 그냥 보고 있는데, 패배할 걸 뻔히 알면서 분열을 하고, 그 덕에 노태우는 정말 감옥엘 갔어야 될 놈이 당선이 돼서 다 물거품이 되 버린 것 아니오?

87년 대선이 이런 중대한 결과를 가져왔다고 봐요. 그동안 위태롭지만 하나의 대오를 이루어서 투쟁해왔던 민주화운동 진영이 영호남, 그리고 YS와 DJ 세력, 양진영으로 분열이 되어 버렸어요.

두 번째로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부와 기득권세력의 주요보루인 영남에서 민주개혁세력이 주도권을 획득할 기회를 잃게 만들었어요. 영남이 그대로 군부세력과 기득권세력의 주요기지로 남아있도록 만들었단 말이죠.

세 번째가 70년, 80년대 제도야권에서 주도권을 장악해왔던 YS가 영남에서마저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했어요. 제3당이 되버렸잖아요. 그때. 그렇게 되자 여당인 민정당과의 합당을 모색하게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YS가 여권으로 넘어가버리는 게 영남에서는 민주화운동세력의 씨를 말려버리게 된 거에요. 그게. 그 얘기요.

네 번째로는 이거는 이제 본질적인 문제인데 군부세력이 다시 쿠데타로 집권할 가능성이 사라졌고, 이렇게 이제 변화가 왔지만 군부세력이 다시 쿠데타를 할 가능성은 없어졌단 말이죠. 그리고 냉전시대, 그 해빙이 일어나니까 한국정치에서 이념대립지형은 빠른 속도로 완화되어 갔단 말이죠.

네 가지의 중요한 변화가 이 87년 대선 결과로 나타난 거라고 이제 정리가 될 수 있어요. 어찌 보면 87년 체제라는 것은 전두환과 노태우 세력, YS, DJ, JP까지 정확하게 우리 정치를 떡시루를 이렇게 네 조각 내듯 지역주의로 나눈 거죠.

그런데 결과적으로 보면 YS, DJ, JP도 야당세력 아니오? 그 88년 총선거를 치르고 났는데 민정당이 그 세 개 야당보다 숫자가 적어졌다고. 여소야대가 되어 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민정당 입장에서도 그것이 불편하고 아무것도 할 수도 없고 하니까 JP, YS를 민정당으로 끌어들여서 민자당으로 만들 정치적 음모를 착착 진행을 했던 거죠.

난 이렇게 좀 봐야 될 것 같아요. 당시 그 많은 국민들이 그랬듯이 나 자신도 노태우에게 이제 대통령 자리를 넘겨준 DJ, YS의 적전분열에 크게 실망을 했었죠. 김상현 의원이, 내가 나중에 얘기를 들으니까 그렇게 표현을 했던데, YS, DJ의 적전분열은 1949년에 이승만이 반민특위를 해체한 것과 별 다름이 없다. 그만큼 대단히 심각한 일이었다. 반민특위가 신생대한민국의 국가적 성격을 규정한 것 아니에요? 반민특위해체가. 그 뒤에 국가적 정통성의 문제라든지, 엘리트의 친일 내지 사대주의 문제, 민족적 자존을 지킬 수 없는 세력이었다는 거죠.

그랬다면 87년 YS, DJ가 분열을 안 하고 재야민주화운동세력까지 합쳐서 YS, DJ, 재야민주화운동세력, 이렇게 연합민주화운동세력이죠. 이 세력이 집권을 했을 경우, 뭐 역사에서 만약이라는 게 참 우습긴 하지만 이것이 한국사회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꿀 민주혁명을 일으켰을 거라고 봐요. 그 YS, DJ의 분열은 해방 후 반민특위를 거쳐서 있었을 그런 성과나 4.19이후에 이루지 못하고 5.16군사쿠데타로 또 미완으로 되어 버렸잖아요. 그거와 마찬가지로 YS, DJ의 분열은 한국사회의 민주주의 혁명을 유산시킨 그런 죄를 저질렀다, 이렇게 봐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남북관계 개선도 더 빨리 이루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아마 87년에 그와 같은 세력교체가 한국사회에서 있었다면 89년에 독일통일 내지 동구권, 소련연방 해체 이런 것과 함께 한국사회 민주주의 혁명이 진행됐을 거에요. 남북관계 개선도 그와 함께 이루어졌을 거고, 훨씬 우리 역사를 앞당길 수 있었던 계기가 마련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거에요.

1990년 초에 내가 이제 다섯 번째 투옥생활을 끝냈어요. 근데 내가 석방되기 직전에 노태우, YS, JP가 3당합당을 했더라구요. 거대민자당이 이제 탄생을 했는데 그 야당은, 뭐 그 질문문항에도 있습디다만 호남당으로 왜소화된 DJ의 평민당과 민자당 안 쫓아간 이기택의 꼬마민주당 그렇게 되어 있었어요. 그러고 민주화운동세력도 87년에 DJ, YS 분열 때문에 민주화운동세력도 분열이 되어 있었고, 그러니까 민자당과 그 노태우 쪽으로서는 회심의 미소를 짓게 된 거죠.

그러니 나올 논리는 뻔한 거 아니에요? 거대민자당 군사독재계승세력이 공안통치를 그때 다시 강화할 때고, 89년 90년 그때 공안통치가 다시 부활할 때 아니에요? 그런 것에 맞대응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흩어진 야권을 통합해야 된다는 논리가 당연히 나오는 거죠.

두 번째는 87년에 분열하고, 그런 꼴을 보니 제도야권은 이제 기대할게 못된다, 그들은 언제나 국민의 여망을 배신하고 자기들 편할 대로 분열하고 국민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는 그런 집단이다, 그러니 이제 힘들더라도 진보적인 정당, 민중정당을 독자적으로 만들어야 된다, 그런 또 논리가 나왔어요. 민중정당 창당론이.

그러니까 야권통합론과 민중정당 창당론이 내가 감옥에서 나오니까 둘로 갈라져서 나를 또 양쪽 앞에다 세우려고 그렇게 하더라구요. 그래서 내 참 무척 고민을 많이 했어요. 나는 사실 한겨레신문 그때 만들어지고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아유, 내가 이제 이 민주화운동도 할만큼 하고, 감옥살이도 또 계속 하고 그랬는데, 이제 좀 언론인으로 되돌아갔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도 했어요. 근데 한겨레신문도 그때 진용이 다 갖춰졌더라구요. 87년인가에 신문사창간을 준비했으니까 90년도 되니까 내가 갈 자리도 없어, 틈도. 그래서 야권통합론과 민중정당 창당론 사이에서 고민 고민을 했죠. 그런데 하도 그때 공안통치가 다시 강화되고 그러니까 야당통합론이죠. 그것이 강력한 통합야당이 필요하다는 그 주장이 설득력이 더 있어보였어요.

6. 재야에서 민주연합, 야권통합 이런 부분들을 만들었나?

그때 두 갈래가 있어요. 하나는 많은 사람들, 더 많은 수의 사람도 있었고 그쪽이 이제 야당통합론이고. 또 장기표 씨나 이재오, 김문수, 이우재, 그 뒤에 이제 민중당을 만들었던 그사람들 쪽은 진보정당 창당론 쪽에 서 있었죠. 근데 이제 묘하게 이 사람들은 결국 나중엔 다 한나라당으로 가버리더라구요. DJ 쪽이 하도 호남헤게모니에 사로잡혀 있으니까.

결국 나는 그때 공안통치의 강화 속에서 야권통합론, 야당통합론의 입장에 서게 됐어요. 그래서 1차적으로 비호남당인 이기택의 꼬마민주당을 볼륨을 키워야 될 거 아니에요. 평민당하고 합치더라도 그게 요만해가지곤 안 될 거 아니에요. 그래서 이기택씨의 통일민주당 잔류세력이죠. 그 세력에 나를 비롯한 여러 그 재야세력이 그리 결합을 했어요. 그쪽을 좀 이렇게 볼륨을 키워서 결국 호남당 성격이 짙은 평민당과 결합을 했죠. 그래서 생겨난 게 통합민주당이에요.

그래서 김대중, 이기택 공동대표에 그 선관위에 등록하는 법적대표는 김대중 1인으로 하는 그런 지도체제를 내가 제안을 해서, 나하고 한광옥이 양쪽 협상대표가 돼서 통합에 성공을 했어요. 그렇게 통합을 해서 92년 국회의원선거에서 아마 94명인가 정확히 숫자는 기억이 안 나는데, 상당히 많은 의석을 차지했어요. 일단은 그 민자당을 견제해낼 수 있는 강력한 야당을 만들었죠. 그런데 그해 연말에 있었던 대통령선거에서는 김대중 총재가 김영삼씨한테 패배를 했어요.

7. 꼬마민주당에 먼저 들어가 볼륨을 키워서 평민당 통합하고, 92년도는 통합된 야당으로 1:1대결이었네요.

그렇죠. 1:1로 통합을 했어요.

(그때 국민당이 정주영씨...)

그때 국민당 쪽에서, 이제 정주영 씨가 국민당을 만들어서 총선에 나와서 아마 거기도 한 40석쯤 만들었을 걸. 그렇게 되니까 여기가 민주당에 아마 94석인가 그랬을 거라고 보는데...


(당시 통합민주당의 최고위원과 부총재를 지내셨는데.)

그랬었죠. 처음서부터 난 뭐 이기택 민주당에도 부총재로 처음서부터 들어갔고, 통합이 되면서는 최고위원을 하게 됐죠.

(별칭이 이부라고..)

매일 부밖에 못해.

8. DJ랑 꼬마민주당이 통합됐을 때 사실상 대선을 앞둔 DJ가 대선을 위해서 모든 걸 주고 1:1로 통합한 거 아닌가, 그때 봤을 때 어땠나? DJ지도력이나...

그 87년에 3위를 했잖아요. 광주에서 많은 사람이 그렇게 죽고 다치고 광주학살 때문에 그래서 호남인들로서는 하여튼 그 한에 맺힌 결과였어요. 분열이 됐어도 하여튼 DJ가 패배했다는 거는 호남인들 입장에서는 참 한에 맺히는 패배였다구요. 다른 사람 입장에서 볼 때는 분열이 됐으니까 틀림없이 패배할거 아니냐, 그렇게 평가할지 몰라도 DJ를 지지했던 사람들 입장에서는 한에 맺히는 패배였다구요.

그래서 어떻게든지 민자당이 생기면서 야당이 또 DJ가 호남으로 포위고립 됐다는 그걸 그 포위고립을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아주 절망적 상황이었단 말이죠. 그럴 때 저희 같은 사람이 이기택, 거기도 이제 미아처럼 되 있었으니까, 그쪽을 좀 볼륨을 키워서 평민당과 통합을 하게 만든 거는 뭐 수호천사 비슷한 거죠. 자기들 입장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는 일이었죠. 그래 나를 무척 대접을 했어요. 그때. 고마워하고.

그러나 나는 이 YS-DJ의 87년 분열을 난 민족사적 죄악이라고 봤거든요. 아까 내 그 설명은 다 했잖아요. 이런 일이 있었다구요.

88년에 내가 노태우 대통령 취임 특별사면으로 석방돼 나오니까 3월초였을 거에요. 4월 달에는 총선이 있었는데 그게 13대 총선이죠. 3월 달에 보니까 계속 학생들이 분신자살을 하는 거에요. 기억날 거에요. 여기 그 서울고등학교 자리 경희궁 공원인가? 거기서 어떤 학생이 죽었다고 노제를 지내는데 나를 장례위원장으로 내세웠어요. 그때 내 장례위원장 여러차례 했어요. 학생들 죽을 때마다. 나를 그때 감옥에서 나왔다고 그래서 장례위원장을 그렇게 시켰는데 다시 YS-DJ가 평민당과 이제 통일민주당 선거준비를 하면서, 총선준비를 하면서 그 학생들 장례식 치르는데 거기 두 사람이 나왔더라구. 그것도 선거운동이어서 나왔을 거야 아마. 재야사람들한테 잘 보이려고. 장례위원장인 내가 그 사람들 둘이 앞에 앉아있는데 내가 못 견디겠더라고.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두 분이 무슨 낯을 들고 여기 나왔냐고. 이 학생이 왜 죽었냐고. 두 분이 분열을 해서 민주화가 이루어지질 않고, 정권을 뺏기고, 그걸 못 견뎌서 분노에 차서 죽은 거 아니냐고. 두 분 그런 거 반성하냐고. 그리고 내 앉혀놓고 손가락질하면서 얘기했어요. 그때 그 영하 한 10도 됐을 날씨에요. 3월초인데. 그 사람들 내 눈을 보니까 뭐 춥기도 추웠겠지만 그 나에 대한 증오와 분노의 눈초리가 둘이 다 나를 쏘아보더라고.

그런데 내가 왜 이 얘길 하냐면 가만히 기억을 되돌아보시오. 87년에 그 분열이 있고 노태우에게 정권을 진상한 다음에 우리 언론이고 학자들이고 지식인사회고 양김 분열을 그렇게 통렬하게 비판한 논문 하나 제대로 나왔냐고? 없어요. 다시 찾아봐요. 양김을 겁을 내서 이사람들이 정치적 강자들이니까, 학자들이고 언론이고 그거에 대한 본격적인 논문 한편 쓰지를 않았어요. 한번 가져와 보라고. 있나? 안 썼어요. 우리 지식인 풍토가 그랬어요.

그런데 하물며 그 두 사람을 앞에 앉혀놓고 수천 명이 모인데서 내가 그 모욕을 가했다고. 그러면 필요에 의해서 나를 뭐 야권통합할 때 써먹고 그러지만 그 사람 마음속에 어떤 게 있겠냐고. YS-DJ가. 이미 그때 나는 몰랐지만 내 정치적 운명은 정해졌던 거에요. 그런 걸 내가 상당히 시간이 지나면서 그 뒤에도 물론 난 YS-DJ를 계속 비판을 했지. 3김정치 비판하고 지역주의 비판을 했지만. 그들이 나한테 가해오는 여러 가지 핍박을 보면서 내가 정치적으로 굉장히 어려움에 많이 직면하겠구나라는 건, 해오면서 체득을 했어, 그때는 몰랐지. 이게 상당히 상징적 의미가 있는 거요. 그 사람들 다 정치적 9단이라고 그러는 사람들인데 가슴에 꼭꼭 숨겨놓고 지켜보고 그랬겠지. 그래 다음 얘기 또 합시다.

9. YS가 되고, DJ 떨어졌는데 그때 국민당이 나와서 한편으론 보수세력이 분열되고 이쪽이 유리할 수 있지 않느냐. 이것도 있지만 오히려 지역주의가 더 심화되면서 DJ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를 하는데 그때 상당히 중심적인 역할을 했을 텐데.

그때 내 중심적인 역할을 못 했어요. 왜냐면 그때 무슨 이선실 간첩단사건이라는 게 선거와중에 터졌다고. 물론 이선실인 벌써 가버렸겠지. 근데 그걸 안기부에서 터트리면서 우리가 1991년도에 야권통합운동도 하고, 한편으론 민중정당 추진하는데 민주연합추진위원회라는게 아마 있었을 거에요. 민연추라고 거기에 그 이선실이라는 여자간첩이 왔다갔다 했다는 거에요. 근데 난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고, 그런데 나나 박계동이가 접촉을 했었다고 안기부가 그렇게 일방적으로 말을 퍼트리는 게, 언론을 통해서. 공안정국이지. 그러니까 DJ진영에서 자기들한테도 색깔론이 번질까봐 우리 쪽 사람들을 그 근처에 오지도 못하게 하는 거야. 그래서 제대로 역할도 못했어요.

그런데 국민당이 부산복집사건 같은걸 터트리고 그랬지요.

(초원복국...)

초원복집 사건. 뭐 그래서 그때 나온 말이 ''''우리가 남이가'''' 하는 말도. 그때 이제 유행하기 시작을 했고 하여튼 이 민주당을 DJ의 호남당이라는 그냥 그 악선전을 사실 이기택, 뭐 노무현도 거기 있었고 여러 지방 사람들이 다 합류를 한 거 아니에요. 호남에다 똘똘 가둬놔 버리다시피 했다고. 결과적으론 상당히 실망스러운 득표밖에 할 수가 없었어요. 정주영씨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단 말이에요. 오히려 그전에 총선은 92년 4월에 있었던 총선은 꽤 결과가 괜찮은 거였다고. 94석인가 얻었으면. 그 총선에서 얻은 득표만도 못하게 대선에서 패배를 했단 말이지요.

인터뷰어 : 김능구 폴리뉴스 발행인
정리 : 김기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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