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김능구(폴리피플 대표, 이하 ‘김’) : 정치를 입문하게 된 계기가 맨 처음에 김대중 후보의 선거과정을 돕는 과정에서 함께하게 한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한화갑 대표(이하 ‘한’) : 1967년 6월 국회의원 총선거 때입니다. 그때 제가 목포에서 김대중 후보의 국회의원 선거운동을 한 겁니다. 그걸 계기로 해서 제가 김대중 대통령 주변사람이 된 겁니다.

: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 그때 제가 놀고 있었어요. 왜 놀았냐면 취직이 안돼요. 그 때 당시 제가 대학 졸업하기 직전에 5.16이 나버려서, 군대를 안 갔다 온 사람들은 취직이 안돼요.

제가 그때 신체검사를 바로 못해서 신체검사 기피자가 된 거에요. 외무고등고시를 보려고 했는데 신검기피자는 시험도 치룰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인천에서 지금 새얼문화재단을 하고 계신 지용택씨랑 같이 새물결이란 잡지를 만들려고 군사정부에 등록신청을 한 적이 있는데, 지용택씨가 진보당 조봉암씨와 관련이 있었던 겁니다.

결국 나까지 요시찰인이 돼버렸어요. 그러다 보니깐 취직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러던 차에 김대중 대통령이 목포에서 선거에 출마했다고 도우라 해서 제가 놀고 있으니까 가서 도운 겁니다.

박정희 정권의 집중공격, 1967년 6월 목포선거는 전쟁터 같아

: 그때 DJ가 당선되었던 선거죠?

: 목포에서 1954년에 한번 떨어지고 1963년 두 번째 도전에서 되셨지요. 1967년 선거가 유명한 것이 박정희 대통령이 목포에 직접 내려 와 2번 유세를 하고 국무회의를 2번 했어요.

DJ와 한화갑

박정희 대통령이 다른 사람 열 명, 스무 명이 되도 괜찮은데 김대중이는 꼭 떨어드려야겠다고 했으니 오죽하겠습니까. 그 당시 목포의 선거운동은 전쟁과도 같았습니다.

(편집자 :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61. 05. 13 강원도 인제에서 5대 민의원 보궐선거 출마하여 당선되어 4번째 도전에 성공하였으나 5.16 쿠데타로 국회의원 선서조차 하지 못했다.

그 이후 1963년에 목포에서 도전하여 당선되었다. 1967년 목포 선거는 박정희 정권의 집중적인 ‘김대중 낙선 전략’에도 불구하고 목포에서 당선됨으로 유명해진 선거임)

1971년 신민당 대선경선, DJ의 경남조직책 맡아 승리 이끌어

: 한국정치에서 해결해야 될 문제가 지역주의입니다. 영남은 한나라당, 호남은 민주당 이러한 구도가 지배적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 김대중 대통령이 목포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됐을 때만 하더라도 전라남도에 야당 국회의원 수보다 여당(공화당) 국회의원이 훨씬 많았어요.

그리고 영남에도 대구나 부산에 야당국회의원이 많았어요. 유명한 조재천씨가 대구서 당선되고 현석호씨, 부산의 김응규씨, 김영삼 대통령도 물론 부산에서 당선되고 그래서 여야간에 어느 지역이나 국회의원이 있었지만 오히려 전라도에서도 여당 국회의원 수가 많았었어요.

: 그 이후 71년에 DJ가 대통령 후보로 나오셨는데 특이한 것이 경남 지역의 신민당 대의원 조직사업을 한 대표가 맡아서 했다고 들었습니다.

: 네 그 때 71년 대통령 후보 경선 때 김대중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서 저희들이 각 도를 맡아서 대통령 후보 만드는 조직을 1968년부터 만들기 시작했어요.

그때는 선거운동 하던 사람이 저를 포함하여 대부분이 전라도 사람이었어요. 도를 나누다 보니깐 나한테 배정된 것이 경상남도를 맡아라 이렇게 된 겁니다.

당시는 부산시도 경상남도 부산시였어요. 제 기억으로 경남지역 대의원이 아마 75명쯤 됐을 거예요. 김영삼 전 대통령이 경상남도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6대4 정도로 이겼어요.

: 경남에서, 오히려 이겼다는 것입니까?

: 그렇죠. 우리가 이겼죠. 정확한 자료는 없지만 그 때 당시 김영삼 전 대통령 쪽에서 움직인 사람은 최형우 전 장관입니다.

그쪽 사람들도 졌다고 시인했어요. 황낙주 의장도 시인했지요. 여담이지만, 왜 김대중이 이겼느냐. 제가 가서 설명하면 사람들이 김대중이가 똑똑하다. 실력은 김대중이가 낫다. 이걸 인정했어요.

막판에 이철승씨와 김영삼 측에서는 후보지명을 유진산 당수에게 위임하자고 하였고, 김대중은 당원에게 의사를 묻겠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보고 부산 민심이 김대중은 남자답다. 사람이 됐다. 당원의 뜻을 묻는 김대중의 자세가 옳다는 분위기였습니다. 부산 다방에서 앉아있는데 마치 당원들에게 불던 김대중 바람이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것 같았습니다.

DJ와 YS, 40대 기수론

: 당시 정당사에서는 40대기수론이 제일 유명할거 같습니다. 71년 대선을 앞두고. 또 그때 후보경선을 아름다운 경선이라 이야기 많이 하지 않습니까?

: 그 때 야당은 인물 부재상태였습니다. 1967총선 이후 71년 대통령 선거를 겨냥해서 고려대 총장을 지낸 유진오 박사를 신민당에서 대통령 후보로 영입을 해서 당수를 시켰어요.

그런데 유진오 박사가 건강이 나빠져서 물러난 겁니다. 그래서 유진산 당수가 당을 맡게 됐는데 ‘유진산은 사쿠라다’ 이런 소문이 나 있어서 야당은 희망이 없었어요.

우리는 김대중계를 조직하고 그렇게 하고 있는데 갑자기 김영삼 당시 원내총무가 40대 기수론을 주장하고 대통령 후보 나가겠다고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그래서 김대중 측에서도 경선에 나선 겁니다. 그 때 그 유명한 ‘구상유취’라고 유진산 당수가 한 말이 있습니다. 입에 젖 냄새나는 애들이 대통령하려고 한다고 말이지요. 김대중 대통령 후보가 탄생한 건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이렇게 조건을 만들어 주어서 가능했던 겁니다.

: 당시에 대단히 치열했던 경선이라고 아직도 회자되는데?

: 치열했죠. 민주당은 장면박사와 조병옥박사 때도 그랬지만 아주 치열했는데 그 때만해도 지역감정이 그렇게까지 없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경남에서 이길 수 있었던 거지요.

김영삼 후보 같은 경우 유진산계가 장악하고 있는데 대의원을 전부 내 표다 이렇게 생각한 것이고, 우리는 그 중에 우리 것을 만들어 내려고 한 것입니다.

더구나 유진산 당수가 김영삼 후보의 손을 들어주고 이철승씨가 떨어지고 나니깐, 대통령 후보는 김영삼으로 확정되다 싶은 분위기였어요.

전당대회 끝나기도 전에 신민당 사무실에는 김영삼 후보측에서 자축파티 하려고 맥주를 잔뜩 쌓아놓고 그랬어요.

: 1차 투표결과에서는 아마 YS가 1위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 그렇습니다. 그러나 결선투표에서 역전이 된 겁니다. 김영삼 후보가 1위였지만 과반수를 못 넘었어요.

그 때 우리가 내 기억으로는 382표를 얻었는데, 이철승 지지자 표가 60표가 넘었어요. 결선투표에서 이철승씨 쪽하고 협의를 해서 그 표를 가져와서 우리가 이기게 된 겁니다.

: 그때도 DJ가 협상을 아주 잘해서 이철승 측의 표를 받을 수 있었네요

: 그때 그 기류는 누가 뭐라고 해도 이철승 후보가 한 단계 위고, 그 다음에 김영삼, 김대중이라고 그랬는데, 김영삼보다는 김대중이 똑똑하다 분위기가 있었어요.

1971년 대선 DJ 대 박정희, 지역감정의 뿌리

: 71년 대선같은 경우 박정희 대통령이 당선됐지만 사실상 승자는 DJ 아니냐, 이런 말이 있었고 그 때문에 그 다음에 아예 유신으로 가버렸지 않느냐 이런 말도 있습니다.

: 그때 저는 경상남도에 있었습니다. 대통령 투표 당일 날 사람들이 투표장으로 몰려가요. 거기서 제가 그 때 이런 말을 들었어요.

투표장에 가시던 아주머니가 박정희가 대통령 후보로 나와서 투표하는 건 마지막이라 했으니까 다음에 대중이 찍으면 된다는 거예요.

그 선거 막바지에 지역감정이 난무했는데 경상도 쪽에 투표 전날 밤에 전부 삐라를 붙였어요. ‘호남사람들이여 단결하라’ ‘김대중 대통령 만들자’ 이런 문구를 써 붙여놨어요.

영남사람들의 지역감정을 자극한 겁니다. 국회의장 이효상이 ‘경상도 대통령을 전라도에서 뺏어갈라고 한다’고 유세 때 그랬어요. 그때부터 지역감정이 시작된 겁니다.

우리 쪽에서는 지역감정 이야기할 이유가 없어요. 왜 그러냐면 지역감정을 유발해서 이득을 봐야 되는데 호남이 수가 적으니깐 손해를 보는 겁니다.

그렇죠? 그런데 왜 우리가 지역감정을 자극하겠어요. 경상도 수가 많으니까 그렇게 유세를 하고 그런 것이지요.

: 1992년 대선당시 부산 초원 복집 사건 같은 것이 이미 당시에 벌어 졌네요.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게 선거전략 측면에서는 위력이 있었던 것이네요. 이에 대응하는 전략은 어떤 것이 있었습니까?

: 없었지요. 김대중 대통령은 유세를 가서 이효상 의장 발언을 규탄하면서 메뚜기 이마빡보다도 좁은 이 나라에 남북이 갈라진 것도 서러운데 왜 우리가 동서로 또 갈라져야 하느냐고 이런 말 했어요.

: 선거에서 지역주의 공세는 저쪽에서 취한 거네요.

: 그렇지요. 지역감정을 저쪽에서 유발했지요,

당시 YS의 DJ선거지원에 대한 일화

: 당시 YS가 기록에 의하면 전국을 돌면서 열심히 도와주었다는데, 사실입니까?

: 우리가 후보가 되서 첫 유세를 한 곳이 부산 구덕운동장인데 YS가 '내가 1차에선 이겼는데 2차에선 배신자가 나와서 졌다.

언제가는 내가 대통령 후보가 돼서 이 자리에서 나와서 지지를 부탁할 것이다' 라고 했어요. 자기 얘기만 했어요.

당시 김대중 후보는 그 자리에서 그런 말을 했어요. 대한민국 민주주의 주소는 서울특별시 부산구 목포동이다 그랬어요.

서울특별시에서 압승을 하고 부산에서 김영삼이 앞장서고, 목포에서 김대중이 앞장서면 이긴다는 것이지요. 민주주의를 살리기 위해서 신민당 후보를 지원해달라 이런 연설을 했죠.

1978년~1981년 3번의 감옥행, 모질던 시련의 세월

: 그때부터 85년도 DJ가 다시 귀국 하실 때까지 상당히 고초의 시절을 겪게 된 것으로 아는데 한 대표도 당시에 어려운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 시절을 회상하면?.

: 그 기간이 횟수로 16년이에요 김대중 대통령이 87년에 정치를 재개했으니깐 72년 유신 이후 횟수로 16년입니다. 16년이면 초등학교 입학해서 대학을 졸업할 연간입니다.

정치인으로 말하면 16년 공백이란 것은 젊었을 때 공부를 해야 될 나이에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학교도 못 다니고 다 지나간 겁니다.

그렇게 비유가 되요
그런데도 김대중 대통령이 그 과정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하고 민주화운동을 같이 하면서 시너지 효과를 가져왔어요.

1974년도에 유진산 당수가 돌아가시고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김영삼총재가 처음으로 탄생했는데 동교동은 야당의 장래를 위해 이철승씨보다는 YS가 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어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동교동에 연금됐을 때도 적극적으로 YS를 밀었어요. 조윤형, 이기택을 불러다가 사퇴하고 김영삼을 밀어라 이렇게 해서 김영삼 총재 탄생을 도왔어요.

내 기억으로는 79년도 박정희 대통령 저격당하기 전 그렇게까지 민주주의를 위해서 라이벌관계를 떠나서 도와줬어요.

: 그때 왜 감옥을 가 계셨습니까?

: 제가 78년에 감옥을 갔는데 죄명이 공무집행방해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3.1 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진주교도소에 계시다가 서울대학병원으로 옮겨왔어요.

그때가 제 기억으로 77년 12월입니다. 서울대학병원에 계신데 우리가 78년 1월 1일날 병실 앞에서 세배 좀 하자고 들어갔는데 교도관이 나와서 못 들어오게 해요.

그걸 무시하고 김옥두 전 의원이 밀어붙이고 들어가니깐 공무집행방해죄로 나는 9개월 살다가 나왔고 김옥두 의원은 1년 살다 나왔어요. 1월 3일 연행되서 9월 30일날 집에 돌아 왔었어요.

그해 박정희 대통령이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어서 김대중 대통령을 석방했어요. 서울대학병원에서 동교동 저택으로 모셔왔는데 그 때는 종로5가에 기독교회관에서 매주 목요일이면 목요기도회를 했는데 성명서를 내가 돌렸는데 그게 긴급조치위반으로 연행되었어요.

그래서 78년 12월 30일 연행돼서 79년 12월3일 집에 돌아왔어요. 그렇게 두 번째 감옥을 갔다 왔습니다.

다음에는 80년 5월 17일 전국 계엄을 선포했지요. 밤에 우리 동교동 사람들을 김대중 대통령부터 굴비처럼 엮어서 전부 중앙정보부 지하실로 끌고 갔어요.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그 때는 김대중내란음모사건 공동피고가 되서 81년 8월 15일날 석방되서 집에 돌아 왔어요. 그래서 내가 3번 감옥살이 했어요.

2부 다시 전선에 서다, 1987년 대선, 1988년 총선

4자필승론의 주창자는 바로 ‘나’

: 그래서 오랫동안 민주화운동을 전력했음에도 불구하고 50세 중반에 국회의원에 당선되셨습니다.

: 88년도 출마 등록을 했는데 감옥 3번 간 것 중에 1번이 복권이 안되서 투표 나흘 앞두고 등록취소가 됐어요. 그 때 국회의원이 못되고 14대 때 92년도 처음 국회의원이 됐습니다.

: 이 때 13대 총선이 처음으로 흔히 말하는 지역정당 출연하게 되는 시대가 되었는데, 87년 대선에 이야기가 많지 않습니까? 그 당시에 단일화가 되었더라면 이런 이야기를 많지 않습니까?

: 역사에서 가정이란 필요 없지만, 김대중도 ‘양보했으면 좋았을 것’을 하고 피력하셨다고 나도 간접적으로 들었어요.

하지만 당시 대세가 양 김 중에 하나가 양보해야 하는데 왜 김대중이 양보 안하나? 김대중이 YS보다 훨씬 사려분별이 있고 역사의식이 있는데 왜 양보안하나 이랬어요. 그때 저는 4자필승론을 주장 했어요

: 아! 한 대표가 그렇게 주장하신 겁니까?

: 네, 4자필승론을 그 때 당시 제가 만들었는데 지금 국회부의장하고 있는 문희상 부의장하고 같이 만들었어요.

나이나 민주주의 투쟁을 해온 관록, 세계적인 명성이나 준비된 면이나 당연히 김대중이 해야 한다, 더군다나 노태우, 김영삼 후보가 영남출신으로 서로 싸우기 때문에 호남이 뭉쳐있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 4자필승론이 타당성이 있다.

그렇게 우리가 주장했어요. 지금은 문건 다 없어졌지만 당시 밤새 머리를 짜고 만들어서 김대중에게 드렸어요.

: 이해찬 전 총리가 말씀하시길 당시에 비판적 지지를 하셔서 당시에도 선거운동을 도왔다고 했어요. 선거가 진행되면서 이렇게 가다가 진다 그래서 양보할 수 있는 사람은 김대중이라 보고 그 얘기를 했는데 김대중 측근들이 4자필승론으로 똘똘 뭉쳐있더라.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체념을 했다는데 당시 재야세력들의 이야기들이 기억 나십니까?

: 재야세력이 그런 주장을 했다는 말은 들었지만 누가 구체적으로 어떤 얘기를 했나 모르겠어요. 김대중에게 직접 했을 수도 있겠지만 나한테 했더라도 그건 안 되는 겁니다.

내가 4자필승론을 만들었는데요. 그걸 받겠습니까. 내가 대통령 선거를 4번 치렀거든요. 그런데 한 번도 나는 우리가 진다는 걸 생각한 적이 없어요. 나는 반드시 이긴다.

왜 그러느냐 하면 나는 거의 맹신하다시피 한 논리가 있어요. 김대중은 대통령이 된다. 반드시 된다. 왜 되느냐.

하느님이 김대중을 5번 살려줬는데 그 인생이 의미가 없다면 왜 그렇게 여러 번 살려줬겠나,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있어 살린 것이다, 그럼 왜 하나님이 살려주셔 겠느냐, 그건 김대중이 대통령을 할 운명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했어요. 선거 때마다 떨어진다는 생각 한 적이 없어요.

: 그 당시 4자필승론을 표로 계산해봤습니까?

: 당시에 어떻게 표로 구체적으로 계산하겠습니까만, 전체적인 유권자 분포도 조사하고, 민주화투쟁 경력이 YS에 비해 비교우위에 있다고 보았고, 세계적인 관심도 김대중에게 집중되었습니다. 당시 80년 1월초 뉴스위크에 지금 당장 대선을 실시하면 김대중이 된다는 기사가 보도된 적도 있었습니다.

: 4자필승론이 지금과 같은 여론조사가 있었다면 상당히 판단하는데 도움이 됐지 않았을까요?

: 그렇겠죠. 그때도 지금처럼 발전한건 아니지만 당시에도 여론조사는 있었죠.

(편집자 주 : 당시 시대적 분위기는 군사독재 시절에서 여론조사의 정확성에 대해서 의문을 품는 경우가 많았다고 함. 한 대표는 유권자 자신이 솔직한 정치적 의견을 전화로 피력하기 어려웠던 시대적 상황이었다고 판단하는 것 같았음)

1988년 총선, 평민당의 바람

: 1987년 대선패배이후 당의 존립이 위협받았다고 들었습니다. 1988년 총선에서 평민당 바람이 불었던 걸로 아는데 당시 상황은?

: 그 때는 경상도나, 전라도나, 충청도까지도 어떻게 하면 대통령을 차지할 수 있나 이건 염원이었습니다.

전라도는 박대통령 18년 동안 푸대접이었습니다. 우리도 우리 대통령을 가져보자는 전라도민의 염원입니다. 전라도는 배척하는 지역주의가 아니라 소외에 대한 한풀이입니다.

당시 분위기는 후보 단일화의 실패책임으로 김대중 책임이 더 크다는 분위기였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의 운신폭이 줄어들었지요.

당시 1988년 총선을 앞두고 YS 총재직 사퇴후 잠적, 김대중 총재도 사퇴하는 등 어수선하였습니다.

그 때 대부분이 당선자체가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국민이 살려주신 겁니다. 평민당은 전라도를 싹슬이 하였고 서울을 석권하여 서울에서 1당이 되었습니다.

국민이 살려주신 겁니다.

당시 일부에서 평민당을 지역당이라고 폄하하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그 때 저는 어떻게 전국팔도 출신들이 모여 사는 서울에서 1등한 평민당이 지역당이냐 하고 항변하면서 다녔던 걸 기억합니다.

2002년 민주당 광주경선의 비화

: 2002년도 민주당 대선 후보경선에서 한 대표도 정치인의 꿈이라는 대통령에 도전하는 시점이었는데 그때 사실 하이라이트는 광주경선이었습니다.

광주경선에서 당연히 대표님이 1위가 되면서 박빙의 3강구도가 되지 않았을까 예상 했는데...결과는 노무현 후보가 1위가 되면서 판이 바뀌었습니다.

: 그건 2가지에요 첫째는 제가 제주도서 1등했는데 그것이 나에게는 마이너스였어요. 제주도서 1등 할 때 세칭 동교동은 나를 안 도왔어요. 이인제를 도왔지요.

그리고 심지어 그쪽에서는 한화갑이는 조직의 배신자다라고 그런 사람도 있었어요. 그러니까 대통령 후보 나온 것도 저가 나왔지 대통령한테 허락받고 나온 그런 것 아니다.

그러니까 대통령 후보로 나선 건 한화갑 저 혼자 한 것이지 우리하고는 상관없다는 거다. 그런 논리였던 것 같습니다.

근데 제가 제주도 1등을 해버렸거든요. 한화갑이가 후보가 되면 전라도 사람이 또 대통령 되겠냐? 저건 정권재창출에 도움이 안된다. 되도 안할 것이 저런다. 이런 평가를 내린 것 같아요.

그래서 거꾸로 광주에서 우리 세력이 나를 조진 겁니다. 나는 그렇게 봐요. 그리고 또 전라도 사람이 대통령 되겠냐. 그러니 요번에는 동서화합하고 다음에 한화갑이가 나오면 밀자. 그런 사람이 실제로 있었어요. 그렇게 된 겁니다.

예전에 민주당 최고위원을 뽑는 전당대회에서 내가 1등 하게 될 것 같았습니다. 근데 그 때 당헌에는 1등이 대표가 되게 돼있었어요.

근데 내가 대표하면 지들끼리 다 해버린다 이럴 것 아닙니까? 그래서 내가 대통령에게 가서 당헌을 바꿉시다 그랬어요. 1등이 대표로 되는 것을 최고위원 중 총재가 대표를 임명한다는 식으로 바꿨어요. 당헌당규를. 그래서 서영훈 대표가 그때 대표가 된 겁니다.

그 때 한화갑은 노무현 대선후보를 흔들었는가.

: 그런데 또 우연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 후보가 되고 대표님께서 흔들었다라는 말이 있었는데

: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후보가 되고 나서 내가 적극 밀었어요. 후단협에서 막 탈당하고 그렇게 할 때 제가 지방에 갔더니 단일화되면 투표하러 가고 단일화 안되면 안간다 이러더라구요. 어떻게 하면. 단일화를 실현시키느냐, 좋다 내가 중립을 서겠다 그랬어요.

그래놓고 단일화 이전에 2가지 조치를 취했습니다. 노무현 후보는 지금 현재 민주당의 유일한 후보다 이것을 내가 발표했고 두 번째는 노무현 후보 측에서 추석 전에 선거대책기구를 구성해달라고 해서 해줬어요.

당내의 반대를 물리치고, 선거대책기구를 구성하면 당헌당규에 의해서 모든 당의 권한이 선거대책기구로 가요. 그러면 당대표는 로봇입니다. 왜 흔들었냐고 하냐? 당의 재정권을 후보에 주라 이겁니다.

그리고 후보경선 때 선거운동했던 사람 전부 당의 부장대우해서 월급을 주라 이겁니다. 그러면 당에서 감당을 못해요 그래서 못하겠다 그랬어요.

재정권 안준다고 난리치고 그랬어요. 돈이 있으면 후보가 필요한 것을 주는데 돈이 없는데 그래서 흔들었다 이겁니다.

당시 12월 18일이 마지막 유세날이었습니다. 그 전날 17일에 유세 마지막 피날레를 노무현 정몽준 한화갑이 명동에서 유세를 하자고 정몽준 측에서 연락이 왔다고 하더군요.

다음날 당사에 나갔다니 유세가 취소됐다고 했어요. 나하고 유세하기 싫은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날 명동에서는 노무현후보와 정몽준과 마지막 유세가 진행되었다.)

열린우리당 창당은 정치적 미숙

: 그렇게 하고 나서 당이 분당되는 아픔을 겪지 않습니까?

: 저는요. 이렇게 봐요. 그건 정치적 미숙입니다. 국회는 1당이냐 2당이냐를 의석수로 따지고 과반수도 넘고 당의 덩치가 커야 법안도 통과시켜요

그러니까 국회의원이 좋고 나쁘고를 따질 필요가 없어요. 수가 많으면 돼요. 근데 그걸 포기 하다시피 하고 코드에 맞는 사람들끼리 해요. 정치미숙이에요. 누구를 탓하고 할 필요가 없어요.

: 분당으로 민주당의 지지기반이 흔들렸고, 수도권의 호남향우회가 상당수 분열되고 와해되었다고 하든데.

: 저는 그 이유로 두 가지를 봅니다. 하나는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이 분열하였고, 아무래 여당으로 힘이 쏠리면서 전북 중심으로 새로운 향우회가 만들어지면서 호남향우회가 분열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전라도민의 염원이던 김대중 정부의 출범 이후에 조직이 많이 느슨해졌습니다. 호남향우회의 응집력이 과거보다 없어진 건 사실입니다.

2003년 분당, 그리고 또다시 닥친 시련

: 당시 2004년도에 분당 이후에 미니민주당이라고 표현하셨는데 그 때 민주당은 위기를 맞았습니다. 그런데 재보선에서 전남도지사로 민주당의 박준영 지사가 되고 그 이후에 민주당이 광주전남에서 부활하였습니다. 당시의 감회가 어떠셨는지?

: 총선에서 졌을 때 저는 정치자금법으로 기소 당했죠. 우리가 교섭단체라도 만들었다면 기소를 못했을 겁니다. 형평에 어긋나니까. 비참하지.

내가 그런 말 했지요. “내가 여당의 대표일때는 늦게 가도 내 자리 남겨놨고 아무리 늦게 가도 먼저 얘기하고 일찍 떠났는데 지금은 어디가면 말석에 앉고 일찍 가도 맨끝으로 말하고” 비참하지요.

내가 정치자금법으로 기소만 안됐다면 민주당이 확실히 살아났을 것이다 지금도 그렇게 확신해요. 수도권은 모르겠는데 호남은 확실히 살아나요 그건 확실해요.

2006년 지방선거에서 회생의 발판을 마련

: 당시의 2006년 지방선거 때 선거 때 압승을 했지 않습니까?

: 압승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열린우리당을 호남에서 우리가 이긴거죠.

: 그러고 나서 당시 유력했던 대통령후보였고 호남과도 인연이 깊은 고건 후보와 막후 교섭이 없었습니까?

고건선배, 우리 손잡고 민주당 한번 키워봅시다.

: 2006년 2월 달에 고건선배랑 저녁에 술 한잔 한 적이 있었어요. 신중식 의원도 있었고 돌아가신 동아일보 출신 남중구 선생도 계시고, 그 때 내가 고선배 우리 손잡고 민주당 키웁시다.

들어오시오. 지방선거 이기면서 승리로 이끕시다. 고선배에 대한 예우를 하겠습니다, 그랬어요. 답이 없었어요.

그 후에 또한번 그런 일이 있었어요. 고건 선배를 민다는 국회의원이 있었어요.
그 사람들 보고 내가 그랬어요. 고건선배를 민다고 이야기를 하려면 두 가지를 해라.

첫째 민주당을 탈당하든지 두 번째는 고건 선배를 모셔오라. 내가 민주당 대표인데 민주당 사람이 딴 집 가장을 따르고 이렇게 한다면 내 꼴이 뭐냐, 난 그건 용납 못하겠다. 탈당을 하던지 모셔오라 내가 그렇게 얘기 했어요.

: 두 가지 다 안했던 것 같은데

: 그 사람들이 안 한 거지요. 그 사람들은 정치인들이 자기가 개척해서 열매를 공유할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그늘에 섰다가 어느 쪽이 유리하나 보고 있다가 줄 설 연구를 하거든요. 여기 작지만 키워 볼려면 소신대로 당당히 하고 안 할려면 말아라 이겁니다.

왜 정당이 대통령 권한만 끝나면 없어지느냐, 한나라당은 경상도라는 무조건 지지기반이 있기 때문에 존속이 되요. 그거 없어지면 국회의원 못되니깐 야당이 돼도 깨버릴 수가 없어요.

2008년 대선 패배후 다시 합쳤지만 감춰진 균열
-구민주계와 열린우리당계

: 그런데 광주에서 금년 초만 하더라도 대표님 중심의 신당 추진등 이런 움직임이 상당히 많았고 내년 지방선거와 맞물려서 이전에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처럼 다시 분당 되는 게 아니냐 하는 그런 말이 많았었거든요

한 : 그게 그 전례 없이 그런 운동이 벌어졌습니다. 왜냐면 저번 지방선거 때 전남 광주에서 민주당이 열린우리당에 이겼거든요. 근데 민주당으로 당선된 사람들이 지금 공천 받는다고 보장이 없어요.

그러니깐 자기네들이 4년간 의정활동 열심히 했는데 공천 안되면 입후보를 못하지요. 그러니깐 한화갑이 니가 나서서 우리랑 손잡고 민주당 재건하자 이겁니다.

나한테 엄청난 압력이 와요. 그런데 내가 거기에 그렇게 하자는 말을 안합니다. 못합니다. 이제 나는 그런 사람들이 나를 필요로 하면 그것을 충족시켜 주는 것도 내가 할 일중 하나에요. 그렇지만 정치는 쌍리공생이어야 됩니다.

그 사람들이 나를 위해서 한화갑을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정말 급하니 우리를 구제해달라는 겁니다.

내가 작년 4월에 광주 간 것은 정상적인 판단이 아닙니다. 저는 정치인으로 입후보해서 낙선 해본 적이 없었어요. 김대중 대통령 모시고 공천이나 당선 걱정해 본 적이 없어요.

우리나라에서 어떤 지도자도 낙선경험이 없는 정치인이 없어요. 저한테는 이게 약인 겁니다. 엉뚱한 판단을 한 건 사실이지만, 패배를 경험한 건 앞으로 정치 방향 설계하는데 엄청난 플러스입니다.

저도 이제 주위 사람에게 기여하는 정치를 해야 합니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만 기여하는 건 큰 기여가 아니에요. 그래서 정당 만들자는 말을 안해요. 그리고 그 사람들한테 이야기 했어요. 나는 지금의 민주당에 들어가야 겠다고

: 그 때 광주에서 처음으로 조직의 쓴맛을 봤다 그런 말을 했는데 그 말 뜻이 그런 뜻입니까?

: 나는 내가 전라도 사람으로서 전라도 사람들의 명예 소신 지조 이것을 대변해왔다고 자부합니다.

또 김대중 대통령을 만드는 것을 평생 과업으로 해서 성공했기 때문에 전라도 위상이나 차별철폐에도 보탬을 줬다고 생각해요

광주는 전라도의 수도입니다. 내가 광주에서 한번 평가를 받아보자 그렇게 생각했는데 정말로 내가 물정을 몰랐구나. 후회하고 돌아왔죠.

어쨌든 광주가면 그래도 나를 알아 줄 것이다, 인정해 줄 것이다, 이게 못난 생각이었습니다. 내가 광주 간 것은 내가 광주 민주화운동 국가유공자입니다.

죽으면 망월동 묘지에 내 자리가 있어요. 나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망월동을 내 고향으로 정하고 간 것입니다.

대통령 DJ와 한 대표

: 대표님께서 김대중과 정치인생을 같이 해오시면서 성장하시고 이제는 본인 정치하시는데 좀 소회 몇 마디를 하신 다면 어떻습니까?

: 오늘 제가 있는 것은 김대중 대통령을 만났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김대중과 함께한 저의 수난은 전부 제 정치적 자산이 되었습니다.

감옥가고 반체제 인사라고 수난 받고 전부 제 재산이 됐어요. 그리고 심지어 국립묘지에 묻힐 권한 권리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묘소 이것을 자식들보고 돌봐달라고 할 필요가 없어요. 사실 특권도 있었습니다. 솔직히 공천에 있어서 걱정해본적도 없었지요.

이것이 모두 김대중과 생사고락을 같이 하고 대통령을 모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지요. 오늘날 한화갑 나의 모든 정치적 자산은 김대중 대통령의 덕택입니다.

: 그리고 대표님께서 지난 2002년에 인터뷰한 걸 보니깐 동교동내에서도 구파와 신파가 있고, 자신은 리틀 김대중라고 해서 국민의 정부시절에 모든 영화를 누렸다고 국민들은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오히려 한 대표께서 동교동 내에서도 사실은 조직이나 자금이나 이런데서 오히려 소외되어 왔다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 동교동의 역사와 함께 설명을 부탁합니다.

: 지금 생각해보면 짧은 생각이고. 지혜롭지 못한 표현이었어요. 그 때 그런 말들이 있어서... 그렇지만 사실입니다.

난 김대중 대통령한테 정치자금 이런 거 1원짜리 한 장 만져본 적 없고, 그러고 집권해가지고도 내가 누구를 대통령한테 청와대나 내각의 자리 추천해본 적 없고, 내 친동생이 둘이서 초등학교 교사하다 놀고 있어도 취직도 못시켜줬어요.

동교동 출신이라고 해서 무슨 일이 있으면 모여서 토의하고 그랬어요. 처음에는 나를 부르더니 나중에는 나한테는 연락도 없었어요.

: 그동안 당에서 많은 중책을 맡으시지 않으셨습니까?

: 근데 제가요. 원내총무할때는 대통령의 배려가 있었고 사무총장도 그렇고 그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최고위원 선거에 나올때 제가 대통령한테 ‘제가 나가겠습니다’ 라고 해본 적이 없어요. 제가 바로 나와요. 그리고 대표경선 나왔을 때도 제가 나와요. 대통령 승낙 받고 이런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저 사람은 지가 맘대로 하는 거야 그랬어요.

: 최근에 권노갑 고문하고는 자주 연락 하시고 그렇습니까?
: 권고문하고는 오늘 점심도 같이 했습니다. 건강합니다. 전에는 그런 일이 있습니다.

내가 생각할 때 권노갑 고문은 한화갑을 견제하는 것 같았고, 권고문 입장에서는 한화갑은 자기 고집대로만 한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내가 처세를 위해서 권고문과 잘지냈다면 좀 달라졌을텐데 하는 생각도 들어요.

: 김홍일의원과 자주 통화하시던데
: 요즘 통화를 못했습니다. 김홍일 의원 문병을 갈 생각입니다, 요즈음 사람들이 한화갑이 탈동교동하려고 한다고 말하고 다닌답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말합니다. 시절이 좋아서 잘나갈 때는 모두 동교동이라 하고, 시절이 어려울 때는 동교동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게 사람이 할 짓입니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난 잘되도 못되도 동교동입니다. 나는 시작도 끝도 동교동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합니다.

한화갑이 말하는 신화가 된 노무현식 정치

: 일전에 정치는 노무현식 정치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적 있습니다.

: 그건 내가 했어요. 노무현식 정치는 맨손을 가지고 후보가 된 것을 말한 것이에요. 남한강 연수원에 가서 한 말로 기억을 해요.

노무현처럼 해서 대선후보가 된 것은 노무현이 처음이에요. 처음부터 가능성이 있고 계보를 가지고 한 게 아니라

혼자 뛰어들어서 전국 바람을 일으키고, 결국 대선 후보가 된 것입니다. 노무현이 처음 시도해서 성공한 과정이었습니다.

: 그 이후에 노무현식 정치를 하셨습니까?

: 못했죠. 지금 노무현 대통령이 성공할 수 있었던 건 노사모와 같은 다른 방식의 조직적 접근도 있으며, 활동 자금이 뒷받침이 됐던 거라 봅니다.

: 활동자금부분에서 대표님께서 조사까지 주장하신 적이 있지 않았나요?

: 그건 그 때 내가 정치자금법에 기소를 당하여 나 역시 방어차원에서 압력을 넣는다는 표현이었지 나의 속뜻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 어떻습니까? 이번 노 전 대통령의 서거에 대해 말씀이 있을 것 같은데

: 저는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좋은 점을 말하고 싶어요. 제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봉화마을 갔을 때 대한민국 역대 정권 중에서 정체성을 시작부터 끝까지 가지고 쭉 지켜왔던 정권이 없었습니다.

우리도 집권했을 때 5공 사람이 비서실장 하고 국정원장 하고 그랬어요.

그런데 노무현 주변사람들은 청와대 들어갈 때 그 사단을 데리고 들어가서 끝날 때도 같이 나왔어요.

봉하마을 장례식장도 가보면 전부 그 사람들이 와서 있는 거에요. 이것이 무엇을 말하느냐 한국적 의리를 지킨 거다. 정체성을 지킨 거다 라고 보는 거죠.

그리고 나는 노무현이 신화라고 표현했어요. 좋게 표현해서 다른 대통령이 없는 것이 있다. 첫째 가장 가난한 사람이었지만 그 역경을 딛고 가장 성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다음에 약자 편이었고, 가난한 사람 편에서 일해 왔습니다. 죽어서도 많은 사람들의 애도를 받고 노무현이 처음 아니냐, 노무현 신화로 표현을 하자 라고 제가 그런 표현을 쓴 적이 있습니다.

: 친노신당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십니까.

: 신당이 출범하지 않아서 확실한 거는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해관계를 가지고 논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성공하면 역사적 필연이 되는 것이고 실패하면 잘못된 판단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모르는 겁니다.

통일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입니다.

: 한 대표는 외교문제나 통일문제에 대해서 DJ에 비견하는 식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남북관계가 고착 우려되는 것이 많은데 대표께서 생각하시는 방향이거나? 지금 남북문제 현황과 관련해서

: 남북문제 해결에 있어서는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이 그것이 바로 기본 마그나카르타(13세기영국헌법의 기초) 같은 정책입니다.

저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것 아니면 통일을 이루는 데 전쟁하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세계는 국익위주로 나가고 있습니다. 국익을 위해서 민족이익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북한하고 협력하지 않으면 세계적으로 나아갈 수도 없어요.

우리의 최대의 과제는 남북문제 해결입니다. 통일이 최대의 과제가 아닙니다. 통일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통일은 우리가 더 잘살기 위한 수단입니다. 그래서 최대과제가 우리 남북문제 해결입니다.

우리가 무역으로 먹고 사는데 수출입을 하는 것이 바다와 공중으로 밖에 못 합니다
그러니까 물류비용이 많이 들어요. 육지로 이용하는 것은 북한을 관통하지 않으면 단 한 뼘도 못 갑니다.

우리의 경제발전을 위해서 북한과 협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5자회담이니 뭐니 하며 북한을 압력해서 안 되는 겁니다. 미국 등 뒤에 서서 북한을 향해 야~너 이런 빽 같은 게 있어 하는 식은 안 됩니다.

미국이 북한하고 수교하는 건 미국의 이익때문이지 우리 민족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일본이 지금 북한하고 수교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처럼 남북대결구도로 가면 결국 한국이 닭 쫓던 개의 처지가 될 염려가 있습니다.

북한에 돈을 퍼줬다고 하는데 미국도 중유도 주고 식량도 주고 주자나요. 미국시민이 공짜로 줬는데도 퍼줬다고 합니까? 그런 건 없는 겁니다.

우리 국민들이 그것을 느껴야 됩니다. 금강산관광, 개성공단 등 교류하면 그것이 경제통합 아닙니까? 언어가 문자가 등 똑같은 문화적 배경을 활용해서 통합의 과정을 자꾸 넓혀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 정부가 남북교류를 차단하는데 이것은 큰 룰을 범하는 것입니다. 남북문제는 지금이라도 빨리 선회해서 햇볕정책을 중심으로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에서 약속한 것을 실행해야 합니다.

그것이 곧 남한 사람의 돈벌이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정책전환이 빨리 올수록 좋습니다.

한화갑의 三和주의

: 김대중 대통령 모시고 터득한 정치적인 사상과 철학 이것을 어떻게 국민들을 위해 봉사하느냐 이것이 저의 과제입니다. 이것은 제가 꼭 무엇이 돼야 하는 건 아닙니다.

지금 현재의 우리 과제에 대해서 제가 거창하게 삼화주의를 주장했었어요.

제가 2000년도 책에도 썼습니다. 국민화합은 동서화합이고 민족화합은 남북통일이고 세계화합은 세계평화입니다.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가 제 이름을 갖고 한국에서 화합으로 으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요새는 내가 뱃지를 만들려고 그래요. 한마음으로 화합하여 갑시다 라는 문구를 넣어서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배우고 터득한 것을, 그분의 철학과 정치사상을 확대발전시키고 우리 국민들에게 그것에 대한 진실을 알리고, 느끼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제가 역사의 주역이 못된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역사에 기여했다는 말을 듣지 않겠느냐 이것이 앞으로의 제 과제입니다.

정치의 요체란 ‘가난을 구제하는 것'

: 끝으로 한화갑의 정치는 무엇이며, 네티즌께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 정치의 요체는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습니다. 정치의 요체는 간단해요
잘사는 사람에게는 잘사는 거 간섭하지 말고 못사는 사람은 잘살게 이끌어 주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많이 주고 어떤 사람은 작게 주는 게 아니라 공정하게 하면 됩니다.

옛날에는 가난을 나라님도 구제하지 못한다고 하였지만 그러나 지금은 국가가 가난을 구제하는 시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정치가 최고의 정치입니다. 부자는 가만히 나둬도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기 때문에 가만히 나둬도 됩니다. 가난한 사람을 국가가 구제하여 가난을 없애야 합니다. 이것이 좋은 정치입니다.

네티즌 여러분

저도 컴퓨터를 가까이 하면서 여러 가지 정보를 주고받습니다. 좋은 제안이 있으면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인간의 평균수명이 늘고 있습니다. 100세까지 사는 시대도 금방 옵니다. 이제는 누가 오래 사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올바르게 사느냐 그런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네티즌 여러분이 건전하게 성장해야 대한민국의 장래가 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인터뷰어 : 김능구 폴리뉴스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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