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로 냉전해체의 주역으로 인식되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이 30일(현지시간) 사망했다고 타스, 스푸트니크 통신 등이 보도했다. 향년 91세.

고르바초프는 집권이전에는 철저한 공산주의자였지만 집권이후 그 사상이 변화되기 시작했으며 소련 해체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사회민주주의 쪽으로 신념을 바꾸면서 소련의 정치, 경제 체제를 개혁하려 시도하면서 공산주의를 폐기하려 했다.

옛 소비에트 연방(소련)의 마지막 지도자인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이 30일(현지시간) 사망했다고 타스, 스푸트니크 통신 등이 보도했다. 향년 91세.
▲ 옛 소비에트 연방(소련)의 마지막 지도자인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이 30일(현지시간) 사망했다고 타스, 스푸트니크 통신 등이 보도했다. 향년 91세.

그는 1985년 소련 최고 권력자가 되었지만 경제난 극복과 실추된 공산당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페레스트로이카의 이념을 천명했다. 페레스트로이카는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확대하고 개혁 정책을 통해 경제의 비중앙집권화와 사기업화, 시장경제의 도입, 민주화 등과 같은 급진적인 개혁조치를 수반하면서 혁명으로까지 불려졌다.

고르바초프는 1988년 12월 유엔총회에서 소련군은 더 이상 동유럽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고 아프간에 파견한 군대를 철수시켰다. 이어 미국 대통령과 핵무기 감축과 냉전 종식을 위한 정상회담을 벌이고 독일 통일에 동의했다. 그러나 소련의 경제는 회복되지 않았고 국내에서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과 충돌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소련은 건국 74년 만에 공산주의를 불법화하면서 해체되고 연방 소속국가들도 다수가 서구형 민주주의 국가로 전환했다.

고르바초프는 군대라는 무력으로 국제문제를 해결하려 하거나 해외에 군사력을 파견하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평화로운 방식을 선호했다. 그는 독일 통일을 반대하거나 무력으로 저지하지 않았다. 당시 세계 1,2차 대전의 주범 독일에 대한 서구의 우려가 커서 독일 통일은 한반도 통일보다 훨씬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만약 고르바초프가 소련군으로 독일 통일을 저지하려 했다면 독일 통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는 세계가 열광하는 것에 도취했을까. 소련에서는 자신이 계속 집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오판했다.

그의 집권 하에서 소련의 경제난이 해결되지 않자 지지 세력이 등을 돌렸고 연방에 참여했던 국가들이 대중 선거에 의한 민주주의 방식의 정치체제로 전환했다. 이 과정에서 소련 공산주의 세력이 고르바초프를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실패하면서 공산주의 세력이 불법화되고 그는 우여곡절 끝에 실각했다. 그가 세계사에 큰 획을 긋는 지도자의 역량을 과시했지만 그것이 자신의 집권 기반을 파괴할 것으로 예측하지 못했다. 소련이 완전히 지구상에서 자취를 감출 당시, 소련 건설 전후 발생한 엄청난 유혈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소련이 해체된 지 30년이 지났고 마르크스-레닌이즘에 따르면 사회주의로 대체되어야 할 것이라는 자본주의는 여전히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많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소련이 해체된 것은 마르크시즘이 역사적으로 실패한 것인가, 아니면 제대로 실천되지 못한 탓인가? 하나의 정치사상과 그 체제가 종말을 고할 때 그것은 누구의 선택인가? 대중이 원할 경우 그렇게 되는가 아니면 지도자의 역량에 의한 것인가? 소련 해체 원인은 자본주의가 그 모순에 의해 종말을 고하고 사회주의, 공산주의로 진화할 것이라는 마르크시즘의 예언이 증발했기 때문인가?

자본주의는 영원할 것인가? 자본주의는 인류가 채택할 마지막 정치경제 이념과 체제인가? 여기에 대해 확답을 내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인가? 이념, 체제와 관련해 수많은 의문이 제기된다는 것은 그 해답을 모색하는 작업이 생략될 수 없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가? 이런 의문에 대한 해답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소련이 어떻게 사라졌나를 다각도로 분석해야 할 것이지만 아직 그런 시도는 이뤄지지 않았다.

국가 지도자와 그 지지 세력은 기득권 세력이기 때문에 도전세력이 있을 경우 방어, 격퇴시키는 방식을 취한다. 이러니 정권이나 정치이념이 바뀔 때 유혈사태를 피하기 어렵다. 대부분의 권력 쟁탈전은 말로 끝나지 않는다. 그러나 소련 해체 당시 그렇지 않았다. 고르바초프는 혁명이라고 일컬어지는 개혁개방 조치를 도입해 민주적이면서 합리적 제도를 시행하려했고 군사력을 동원해 외국을 침략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소련 최고 권력자였기 때문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물론 그도 권력욕구가 강했다. 개혁개방 조치 등도 권력을 계속 장악하기 위해서였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 가운데 소련 권력의 하부 구조 – 연방국 15개 국 대부분 - 가 한술 더 뜨는 형식으로 공산주의와 결별하고 서구식 민주주의를 택했다. 이런 급격한 변화를 고르바초프는 예상치 못했다.

그는 소련을 개혁하고 연방제가 계속 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오판이었다. 결국 그의 기대는 깨지고 그는 권좌에서 물러났다. 고르바초프는 20세기는 물론 인류 역사에서 그 유례를 찾기 힘든 인물이다. 동서고금의 권력자는 대부분 권력을 자신의 개인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휘두르면서 집단학살, 인권유린은 물론 국내의 관심을 해외로 돌리기 위해 외국 침략도 자행했다. 고르바초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소련의 최고 권력자의 위치에서 몰락할 때까지 독재자의 작태는 보이지 않았고 개인으로 돌아갔다. 이런 점에서 고르바초프와 그의 집권 방식 등 주요 사항에 대해 살피는 작업을 생략할 수 없다.

고르바초프는 1931년 3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혈통의 가난한 농부의 가족으로 태어나 스탈린 치하에서 성장했다. 그는 청소년기에 집단농장에서 콤바인 수확기의 운전을 했으며 후에 공산당에 입당했다. 당시 소련은 일당 지배국가로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지배이념으로 삼고 있었다.

그는 모스크바 대학에서 공부하고 1955년 법학대학을 졸업할 때 논문은 ‘사회민주주의의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에 대한 우월성’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스탈린 치하에서 억울한 희생자들의 복권을 담당하는 업무를 맡았다. 그가 그 일이 자신에게 적합지 않다고 생각했을 때 대학교에서 석사과정으로 집단농장 법에 대한 전공제의를 받았지만 거절했다.

그는 러시아 남부에 있는 스타브로폴 지방의 주도에서 집단농장의 청년조직을 위해 일하다가 스탈린 사후 집권한 후르시초프가 취한 반 스탈린 개혁의 강력한 지지자가 되었다. 그는 1950년대에는 확실한 스탈린주의자였다. 그는 스탈린 사망이후 교조주의적 성향을 보이지 않았지만 소련체제에 대한 진실한 신봉자였다. 그는 진보적이거나 급진적 개혁주의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브레즈네프 사망 3년 뒤 총서기로 선출되었고 1985년 3월 12일 체르넨코의 뒤를 이어 소련 사상 8번째의 당서기장으로 선출되었다. 출범 당시의 고르바초프 정권은 경제문제의 해결에 총력을 기울였으나, 기존 체제 내에서의 활동에 한계를 느끼게 되었고, 마침내 1986년 6월의 당중앙위원회연설, 7월의 하마로보스크 연설에서 차례로 페레스트로이카의 이념을 천명했다. 하지만 그는 1986년 공산당 27차 회의에서 여전히 전통적 마르크스 레닌주의자로 비춰졌다.

페레스트로이카는 당초 실추된 공산당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시도된 것이었으나, 1987년 이래 급진적인 개혁조치를 수반하면서 혁명으로까지 불리게 되었다. 즉 페레스트로이카는 ①공개성, ②경제의 비 중앙집권화, 사기업화, ③ 시장경제의 도입, ④민주화 등을 기본이념으로 하여, 소련이 직면한 여러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전략적인 어프로치로서 발전한 것이다.

그는 소련을 유지하고 그 사회주의적 이상을 신봉했지만 1986년 체르노빌 사건이후 주요한 개혁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고르바초프는 1988년 12월 유엔총회에서 소련군은 더 이상 동유럽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일방적인 선언을 했다. 그는 아프간에 파견한 군대를 철수시키고 미국 대통령과 핵무기 감축과 냉전 종식을 위한 정상회담을 벌였다. 국내적으로 개방 정책을 통해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확대하고 개혁 정책을 통해 경제적 결정을 지방으로 이전하면서 효율성 증대를 꾀했다.

그의 민주화 조치와 인민대의기구를 선출하는 방식은 공산당 일당 지배체제를 붕괴시켰다. 그는 동구권의 위성국가들이 1989-90년 기간 동안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포기하려 했을 때 군사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거부했다. 1989년 이후 동구권의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신봉하던 국가들은 다당제에 의한 선거를 치르고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그 가운데 폴란드, 헝가리 같은 나라는 이런 과정이 평화롭게 이뤄졌지만 루마니아에서는 혁명이 발생해 폭력사태 속에서 24년간 장기 집권한 차우셰스쿠의 실각과 처형으로 이어졌다. 고르바초프는 국내문제가 심각해 이 같은 외부 변화에 신경을 쓸 수 없었다. 그는 민주적 선거가 동구권 국가들이 사회주의를 포기하도록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빗나갔다.

국내에서는 점증하는 민족주의 정서가 소연방체제를 와해시키려 위협했으며 이는 1991년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신봉하는 강경파들이 그를 실각시키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키는 사태로 비화됐다. 이런 상황에서 소련은 그의 의도에 반해서 와해되기 시작했다. 페레스트로이카의 실시로 소련사회는 많은 변화를 겪었으나 경제면에서는 뚜렷한 성과가 없었고, 오히려 악화되는 양상까지 보였다, 게다가 소연방내의 정치적·사회적 불안정까지 겹쳐서 페레스트로이카는 답보상태에 빠져들었다.

고르바초프는 1989년 동독을 방문해 건국 40주년 행사에 참석했고 그 후 독일정부가 시민들에게 베를린 장벽을 통행하도록 허가했다. 고르바초프는 이를 환영했다. 다음해 동서독을 가로막았던 장벽이 허물어졌다. 고르바초프나 프랑스 미테랑 수상은 독일이 신속한 통일을 할 경우 유럽의 지배세력이 될 것을 우려해 독일의 점진적 통합을 희망했지만 서독 콜 수상은 그 반대였다. 고르바초프는 독일이 북대서양조약기구와 바르샤바 조약의 회원국으로 남아있어야 한다는 중재안을 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독일이 통일되면서 냉전이 종식되었다.

고르바초프는 1990년 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자신을 총서기에서 축출할 것을 우려해 정부 형태를 대통령제로 바꾸고 의회에서의 간접선거 방식으로 자신이 선출되었다. 그는 경제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경제개혁 조치를 취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1991년 8월 19일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에 반대하는 보수파 측의 쿠데타가 시도되었지만 실패했다. 이어 옐친 대통령이 추진한 독립국가연합(CIS)이 결성되면서 소연방의 11개 국가의 지도자들이 이 기구 가입에 합의했다.

고르바초프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사퇴했다. 그 해 12월 31일 소련은 그 존재가 사라졌고 모든 소련 정부기구 등은 그 기능이 정지되어 러시아에 흡수되었다. 고르바초프는 관직을 떠난 뒤 앨친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의 비판자로 등장했고 러시아의 사회민주화 운동을 지지했다. 그는 냉전을 종식시키고 소련에 새로운 정치적 자유를 도입했으며 동구권의 마르크스레닌 정부를 촉발시키면서 독일 통일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아 노벨 평화상 등 많은 수상을 했다.

그는 러시아 국내에서 소련을 와해시켜 러시아의 위세를 실추시켰고 러시아의 국제적 영향력을 약화시키면서 경제난을 악화시킨 장본인으로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고르바초프는 국제사회에서 근현대사의 정치적 거목으로 인정받아오다 자신이 종식시켰던 냉전이 재개될 조짐이 확실해지는 상황에서 눈을 감았다.

러시아는 소련 해체 뒤 30년 동안 경제난과 국제사회에서 정치적 소외 등을 겪으면서 부정부패와 민주화 후퇴 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중국의 G-2 부상으로 초라해진 러시아는 지난 1999년부터 한 권력자에 의해 20년이 넘게 지배받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이다. 푸틴 대통령은 강력한 군사력을 정치에 이용하는 강력한 지도자 이미지를 강조하는가 하면 과거 소련 시절의 강대국 흉내를 내면서 러시아 국민들의 감정적 지지를 받아 장기 집권하고 있다.

러시아 국민들은 소련 시절이 좋았다는 식의 향수에 젖어 푸틴 대통령을 지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2018년 대선에 출마해 76.7%%의 득표율로 4선에 성공하면서 2024년까지 집권하게 되었다.

푸틴 대통령은 주변 국가를 향한 대외정책을 공세적으로 취하고 있고 러시아 기득권층은 러시아 주변국들이 러시아의 영향권아래 놓여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는 러시아가 지난 2008년 조지아와 전쟁을 벌인데 이어 크리미아를 둘러싼 우크라이나와의 갈등으로 비화되었다. 푸틴 대통령은 수 개 월 전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것으로 서방세계에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러시아 국내에서는 상당한 정도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외신들이 전하고 있다. 고르바초프 집권이후 해체의 길을 걸었던 옛 소련 70 여년이 좋았던 시절이라는 향수에 젖어 있는 러시아인들은 푸틴을 통해 대리만족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자칫 큰 사태로 비화할 가능성이 염려되는 부분이다.

 

※ 외부 필자의 기고는 <폴리뉴스>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SNS 기사보내기

관련기사

기사제보
저작권자 © 폴리뉴스 Poli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