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적 폭우 속 「대응매뉴얼」은 실종

폭우가 쏟아졌던 지난 8월 8일 밤은 生과 死를 가르는 끔찍한 시간이었다. 저녁 일정을 중단하고 서둘러 찾아간 대림동 반지하 밀집촌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어둠을 뚫고 무섭게 내리는 폭우 못지않게 당혹스러운 광경은 「대응매뉴얼」이 실종됐다는 점이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던 것이다. 반지하에 차오른 물을 빼낼 양수기를 어디서 어떻게 구해와야 할는지, 피해 주민들을 체육관으로 대피시켜야 할는지 경로당으로 대피시켜야 할는지 그 어느 것도 미리 정해지고 준비되지 않았던 것이다.

수재민 가구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박용찬 위원장
▲ 수재민 가구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박용찬 위원장

필자는 물론이고 주민센터 직원들과 동네 통장들까지 현장으로 달려와 지원에 나섰지만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양수기가 충분히 준비되지 않아 급한 대로 양동이에 의탁해 힘겹게 물을 퍼낼 수밖에 없었다. 대피장소를 찾기 위해 주변 경로당과 체육관에 연락해 보았지만 연락도 쉽지 않았으며 연락이 된다 해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아 피해 주민들을 대피시킬 수 있는 여건도 아니었다. 비는 계속 쏟아지고 있었고 시간이 흘러가도 양수기는 오지 않았고 대피할 장소도 마련되지 않았다. 결국 주민들은 반지하에서 빠져나왔다는 사실에 위안을 삼은 채 주변 이웃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거나 주민센터 회의실 바닥에서 불편하고 불안한 밤을 지새워야 했다.

「대응매뉴얼」은 인명 구조의 기본

지금 우리에게 그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는 사람을 구하는 대책을 신속하게 내놓아야 한다는 점이다. 폭우 피해 직후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들은 저마다 대심도 지하터널을 건설하겠다, 펌프장을 증설하겠다, 하수관로를 정비하겠다 등등 경쟁적으로 대책을 쏟아놓고 있지만 이같은 대안들은 상당한 시간과 돈이 소요되는 대책들이다. 기록적 폭우가 언제 또다시 쏟아질는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상황. 따라서 사람을 구하고 인명피해를 줄이는 특단의 대책이 지금 즉시 마련되어야 한다. 그같은 차원에서 큰 돈과 시간을 들이지 않고서도 취할 수 있는 대책이 바로 「대응매뉴얼」이다.

폭우가 쏟아질 때 반지하에 거주하는 독거노인과 장애인들을 누가 어떻게 구조할 것인가, 양수기는 어떤 방식으로 공급할 것인가, 대피 장소는 어디로 정해둘 것인가 등등 사람을 구하는 일체의 시스템을 미리 설계하고 준비해 놓자는 게 「대응매뉴얼」의 핵심 내용이다. 인명구조 「대응매뉴얼」이 제대로 작동했다면 동작구 상도동 반지하에서 발생한 50대 발달장애 여성의 안타까운 죽음도 사전에 막았을 것이다. 「대응매뉴얼」이 제대로 가동됐었다면 반지하 장애인이나 독거노인에 대한 구조 및 대피 계획을 미리 세워놓았을 것이고 그에 따라 반지하 밀집지역의 인명과 재산 피해는 지금보다 훨씬 줄었을 것이다.

「침수 취약가구 돌봄서비스」 활성화

그렇다고 대응매뉴얼이 없는 것도 아니다. 서울시가 지난 2014년부터 실시하는 「침수 취약가구 돌봄서비스」가 바로 그것이다. 가옥이 침수된 경험이 있거나 침수에 취약한 가구를 선정, 가구당 공무원 1명씩을 연결해 일대일로 관리하는 체계이다. 공무원들은 평소엔 펌프, 물막이판 등 수해 예방시설을 사전점검하고 재난 발생 시에는 비상연락을 취하거나 직접 현장에 방문하는 그야말로 일대일 밀착 관리시스템이다. 긴급한 경우 취약가구 근처에 사는 자원봉사자가 결합하기도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침수 취약가구 돌봄서비스」는 이번 폭우사태 때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시사주간지인 시사IN에 따르면 관악구와 동작구에 확인한 결과 사망자가 나온 반지하가구 모두 이 서비스 대상자가 아니었다고 보도했다. 제도는 마련돼 있지만 지방자치단체는 물론 주민들 역시 이같은 서비스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아 유명무실한 서비스로 전락한 것이다. 이같은 지적이 제기되자 「침수 취약가구 돌봄서비스」를 진짜 도움이 필요한 소외계층에 닿을 수 있도록 재점검하고 활성화하자는 제안이 현실적인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없는 정책을 새로 만들 것이 아니라 있는 정책을 제대로 실천될 수 있도록 보강하고 개선하자는 것이다.

「침수주택 지도」 적극 구축

또 하나의 대응매뉴얼로 「침수주택 지도」를 신속히 구축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최근 10년간의 호우 피해를 통계화한 뒤 저지대 상습 침수지역과 침수 가구를 도표화하고 지도화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집중호우와 같은 재난 발생 시 훨씬 더 체계적이고 기민하게 예방하고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상습 침수가 우려되는 지역과 가구에 대해서는 모래주머니와 차수막 등 예방설비를 곳곳에 설치하고 지원 인력을 사전에 마련하는 등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는 꼼꼼한 준비가 가능할 것이다.

100년만의 기록적인 폭우는 우리에게 엄중한 교훈을 남겨 주었다. 우리에게 남겨진 가장 큰 숙제는 그 어떠한 재난에도 사람을 살려내는 대안을 신속하게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폭우 피해와 같은 재난을 당하면 통상 너도나도 거창한 대책을 주문하면서 당장 실천가능한 작은 일은 외면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악마는 작은 디테일에 있다고 하지 않던가? 대심도 지하터널과 같은 대규모 토목공사도 중요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실현가능한 「대응매뉴얼」부터 신속하고도 야무지게 구축해보자.

 

박용찬
국민의힘 서울특별시당 영등포을 당협위원장
미래통합당 대변인
자유한국당 대변인
자유한국당 서울특별시당 영등포을 당협위원장
MBC 논설위원실장
MBC 시사제작국장
MBC 앵커
MBC 뉴욕특파원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 석사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 학사

 

 

※ 외부 필자의 기고는 <폴리뉴스>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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