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대선 이슈] 초졸 소년공에서 집권여당 대선후보 '이재명' 그는 누구인가

2021.11.11 16:29:32

대한민국 제20대 대통령선거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선출된 소년공
초졸 출신 중앙대 법학과 장학생이 대권을 노린다

 

[폴리뉴스 박철성 기자] 폴리뉴스가 마침내 흙수저로 태어나 비주류라는 꼬리표에도 거침없이 대한민국 정치 대세가 된 이재명의 파라만장하게 살아온 인생과 걸어온 정치발자국을 조명한다.

스스로를 ‘흙수저’도 아닌‘무수저’라며 천민도 못되는 향소부곡의 부곡민이라고 부르는 이재명은 호적에 1964년 12월 22일생으로 기록되어있다. 하지만 본인의 말에 의하면 실재는 63년이라고 한다.

어머니께서 아무리 생활이 어려워도 자식 생일은 제대로 챙겨줘야지 하는데 안타깝게 날짜가 22일인지 23일인지 헷갈려 안타까운 마음을 지닌 중에 마침 초등학교입학 등록(1968)을 하기 위해 생년월일이 필요하여 동네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가 날짜를 정해달라고 했는데 점쟁이가 “당신의 넷째 아들이 크게 성공해 당신을 호강시켜 줄 것”이라며 액운을 막기 위해 본래 나이를 숨겨야 한다고 해서 64년생이 되었다.

하지만 당시 어린 이재명은 점쟁이를 일컫는 ‘점바치’란 말을 몰라 그저 ‘밭’이 어머니한테 내 생일을 정해주었구나 하고만 생각했다고 했다. 그래서 항상 어렵고 힘들 때마다 ‘밭’이 나를 지켜주고 도와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견뎌왔다고 한다. 결국 토템사상으로 힘든 시기를 극복해 나간 것이었다.

이재명은 본래 5남 4녀였지만 누이 둘이 일찍 세상을 떠 5남2녀 중 다섯째로 경북 안동군 예안면 도촌동 지통마에서 화전민의 자식으로 자랐다.

이 시절 집안이 너무나 어려웠다. 겨울엔 방안의 물이 전부 얼어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먹을 것도 항상 부족해 설익은 개복숭아를 따다가 삶아서 밥 대신 먹고 지낼 정도로 정말 지독히도 가난한 집안이었다.

게다가 이재명이 유일하게 다녀본 초등학교도 집에서 6km나 멀리 떨어져 있어 장마철에 많은 비가 내리면 개천에 다리가 잠겨 학교를 갈 수가 없었다. 결국 무단결석을 밥 먹듯이 했다.

하지만 날씨가 너무 좋아도 이재명은 학교에 가지 않고 형들과 개천에서 징거미를 잡아다 먹으며 놀면서 어린 낭만을 즐겼다.

어머니는 하루 종일 공중변소 앞에 앉아 요금을 받는 화장실 수금원 일을 했다.

이재명의 부친은 경북 영양군 사람으로 대구 청구대를 중퇴하고 순경, 교사 등을 하다 그만 당시에 유행하던 ‘도리짓고땡’이라는 화투판 노름으로 가산을 모두 탕진하고 1976년 이재명의 정치적 터전인 경기도 성남시의 중원구 상대원동 시장통으로 가족들을 모두 이끌고 이사갔다.

거기서 부친은 상대원시장의 쓰레기 치우는 청소부를 했고, 어머니는 하루 종일 공중변소 앞에 앉아 손님한테 사용료를 받는 화장실 수금원 일을 했다.

하지만 어려운 가정형평은 여전했기에 이재명은 1976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3살 어린 나이에 성남 상대원 공단에 나이를 속이고 일당 400원을 받는 소년공이 됐다.

첫 직장은 목걸이 공장이었다. 거기서 어린 이재명은 월급 1만원에 독한 염산과 황동을 다뤘다. 게다가 인체에 해로운 납 증기까지 들이마시며 일을 했다.

하지만 이렇게 혹사를 당했지만 사장은 밀린 월급 석 달 치를 한 푼도 주지 않고 야반도주해버리고 말았다.

두 번째로 들어간 직장에선 붕산으로 땜질을 하는 고무공장인데 거기서 그만 벨트 속으로 손가락이 말려 들어가는 사고를 당했다.

그런데 회사에선 오히려 이재명의 잘못으로 몰고는 일체 치료비는 물론이고 월급조차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도 이재명의 손가락에는 당시 사고 때 말려들어간 고무조각이 남아있다. 구타도 많이 당했다.

항상 이재명이 비틀어진 손목을 감추기 위해 긴소매만 입고 다니게 만든 네 번째 공장인 야구글러브 만드는 공장에서 가죽 절단용 프레스 칼날에 손목이 눌려 뼈가 부러지는 산재를 당했다.

그런데 어느 누구 하나 병원에 데리고 가지 않아 치료를 못 받았다. 결국 장애6급의 판정을 받고 이로 인해 가고자 했던 군대도 제2국민역(5급)으로 면제되고 말았다.

그리고 오리엔트시계 공장에선 안전장비 없이 작업을 하는 바람에 흡입한 독한 화학약품으로 후각세포가 55% 이상 괴사해 버려 지금까지도 냄새를 잘 못 맡는다.

하지만 이렇게 어렵고 힘들 때 공장에서 만났던 동료들이 이재명이 성남시장과 경기도지사 선거에 출마했을 때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와 선거유세에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그 인연은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선생님이 돼서 애들을 때려보겠다는 복수심에 교사가 되려고 했다,

어느 날 공장(대양실업)에 출근하던 이재명은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여자아이들 무리와 마주치자 '나도 공부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1978년 15살에 중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그런데 공장에서 ‘반장’이라는 사람이 소년공들에게 군림하면서 함부로 대하자 내가 ‘반장’이 되어 막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만 된다고 해서 곧바로 하면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보고 1980년 합격했다.

이때 전두환정권이 들어서면서 대학교 장학금제도가 대폭 확대실시 되었다. 그래서 오직 가난과 폭력이 난무하는 생활을 벗어나기 위해 공장을 다니면서 주경야독으로 공부했다. 공장에서 일하고 돌아온 뒤에도 피곤해서 혹시나 졸까봐 책상위에 압정을 뿌려놓고 공부를 했다 하지만 항상 얼굴에 압정이 두어 세 개 씩 박힌 채 잠에서 깨어났다.

이재명은 학력고사에서 전국 순위 2,000등 대의 서울대 합격권에 드는 고득점을 받았다. 하지만 고심 끝에 졸업 때까지 매달 30만원씩 생활비를 주겠다고 제안한 중앙대 법학과에 4년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1982)했다. 당시 공장 월급이 8만 원 정도였다.

팬덤북스 출간의 '이재명의 나의 소년공 다이어리(190년 8월 20일)' 중에 나오는 말에 "어떨 땐 내가 팔 병신이란 게 믿어지질 않는다. 어쩌다가 그 많은 사람 중에 나만 이렇게 팔이 병신이 되어야 한단 말이냐, 그리고 난 야간 대학에 절대로 가기 싫다. 학교엔 초등학교밖에 못 나오고, 중고교는 얼렁뚱땅 교복 한번 안 입고 졸업해 버리고, 대학만이라도 시간 좀 가지고 공부하고 싶다"는 게 있다. 그 만큼 이재명은 삶과 현실에 고민이 많았다.

그리고 또 이재명은 "우울증과 장애로 힘든 나머지 17살 때 자살을 시도했다. 여러번 자살을 시도했지만 마지막 시도 때에는 다량의 수면제를 사러갔다 눈치 챈 약사가 소화제를 줘서 죽지 못했다"고 가슴아픈 고백도 했다. 

그래서일까 한때 이재명은 선생님한테 집안이 가난해 학교에서 준비해 오라는 준비물을 전혀 가지고 갈 수가 없었다. 심지어 미술시간에 도화지 한 장 사가지고 가지도 못했다. 결국 그때마다 선생님한테 불려나가 사정없이 맞았다. 물론 선생님도 집안처지가 가난해서 준비해 올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알고 있다는 것 뿐이다. 심지어 어느 날에는 빰을 맞아도 곳곳이 고개를 쳐들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무려 27차례나 빰을 맞았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이 한이 되어 뭉쳐 가슴에 멍울이 졌을까? 이재명은 선생님한테 가난한 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너무 많이 맞아 나중에 자신도 꼭 선생님이 돼 애들을 때려보겠다는 복수심에 교사가 되려던 철없는 생각도 했다,[출처:“그럼에도 절대 굴복하지 않겠다!”(이재명 저, 위즈덤하우스 발간) 참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법연수원 강의에 감명 받아 인권변호사가 되었다.

이재명은 중앙대 법대를 졸업하고 1986년 10월 23일 2수만에 28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그리고 사법연수원에 들어가 정성호(민주당 의원), 문무일(전 검찰총장), 문병호(바른미래당 전 의원) 등을 '노동법학회' 모임에서 만나 함께 활동하면서 진보적 성향을 품게 됐다.

1988년 판사냐 검사냐 하며 진로를 고민하던 중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법연수원 강의에 감명 받아 연수원 성적이 3할 안에 들어 판검사가 될 수 있었지만, 1990년 26살에 인권변호사가 되어 성남에서 본격적으로 시민운동에 발을 들였다.

2004년 성남시민들이 공공 의료원을 설립하는 운동에 앞장섰던 이재명은 2004년 국내 최초로 2만 명 주민 발의가 된 조례가 성남시의회에서 47초 만에 날치기로 부결되자 성남 시민들과 함께 의회에서 항의를 하고 다시 회의를 속개시키기 위해 의회를 나간 의원들을 붙잡으러 다녔다.

결국 주민 30여 명과 같이 연행 된 이재명은 특수공무집행방해 및 공용물건손상죄를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재명은 이 시위 사건으로 인해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되면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번 사건의 계기로 정치입문을 결심하게 됐다.

이재명은 저서에서 이 당시 심정에 대해 "이대로 주저앉으면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세상을 바꾸는 방법밖에 없다"고 저술했다.

이재명은 노무현 전 대통령과 닮았다.

이재명은 노무현 전 대통령과 닮았다. 인권 변호사 출신의 달변가에 노빠구다 후퇴가 없이 밀어 붙인다 그래서 별명이 ‘불도저’다. 또 속 시원하게 일을 처리한다 해서 ‘사이다’라고도 불린다.

한편 룰라 전 브라질 대통령과도 닮았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에다 유년시절 학업을 제대로 끝마치지 못하고 공장 생활을 한 것과 이재명은 왼팔이 프레스기에 눌려 비틀어졌지만 룰라는 왼손 새끼손가락을 잃었다. 이렇게 공장에서 부상 입은 것 까지도 닮았다.

거기에다 인권 변호사로 사회 약자를 대변했다는 것과 소득 재분배 정책시행에 적극적이라는 것조차도 닮았다.

여기서 잠시 이재명의 아내 김혜경과 인연을 맺게 된 사연을 보면 이재명의 성격이 보인다. 이재명은 '1989년 8월에 만나는 사람 중 한 명과 무조건 결혼하겠다'라는 원칙을 세우고 5명의 여자와 차례차례 소개팅을 했는데 3번째 만난 김혜경을 보고 무조건 '이 사람이다'하고 결혼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마지막 5번째의 여성을 보자 '내가 왜 마음을 미리 정했을까' 하고 무척 아쉬웠지만 자신과의 약속이기에 그대로 3번째 여성인 김혜경하고 결혼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프로포즈 할 때 자신의 힘들었던 삶의 기록을 당신에게 바친다는 의미로 소년공 시절에 썼던 일기장을 주고 결혼했다.

"백성은 가난 보다 불공정에 분노한다(불환빈 환불균 不患貧 患不均)

이재명은 2010년 6월 2일 지방선거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경기도 성남시장 선거에 출마해 51.2%의 득표율로 생애처음으로 선출직에 당선됐다. 그리고 이어 2014년 6.4 지방선거에서도 55.1%의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다.

성남시는 2001년 3월까지 경기도 광주시였다. 1969년 3월 박정희 군사정권은 서울 청계천 재개발을 시행하면서 당시 판자촌에 거주하던 주민들을 상하수도 없는 허허벌판의 광주시(성남)로 강제 이주시켰다. 강제이주 당한 주민77%가 월수입 1만원도 못 벌고 살아가는 절대빈곤의 생활을 해야만 했다.

이러한 곳에서 소년공이었던 이재명에겐 성남시가 정신적 고향이자 빈부격차를 없애야 할 부채였다. 그래서 이재명은 성남시장에 취임하자마자 너무 넓고 호화로워 ‘아방궁’이라고까지 불리던 9층 시장실을 2층 작은 공간으로 옮기고 아이사랑놀이터와 북카페로 만들어 시민들에게 개방했다.

그다음에는 부실한 시의 재정부터 키우기 위해 전무후무한 ‘모라토리엄’을 선언(2010)했다. 그리고 부채 청산과 복지를 함께 진행하기 위한 부정부패, 예산낭비, 세금탈루를 없애자는 ‘3+1 원칙’을 실행했다. 결국 그렇게 아낀 예산으로 3년 뒤 4,572억원의 부채를 모두 갚았다.

어느새 이재명은 전국에서 제일 존경하는 정치인이 되었다. 이재명은 시민들과 원활한 소통을 위해 SNS를 적극 활용했다.

2013년 이재명의 정치입문의 계기가 되었던 ‘시립의료원’ 설립 첫 삽도 떴다. 그리고 ‘청년배당·산후조리·무상교복’의 이른바 3대 무상복지를 전국 최초로 실시했다.

독립유공자 예우 및 지원에 관한 조례도 제정(2013)했다. 그리고 생존애국지사의 보훈명예수당을 인상시키고 아울러 무공수훈자회원을 위한 일자리도 마련했다.

2014년 성남시장에 재선된 이재명은 2015년 청년기본소득, 면접수당, 중소기업 청년노동자 지원사업, 노동자 통장, 군 복무 상해보험 가입지원 등 50여개에 달하는 청년정책사업을 시행했다.

의회에서 다른 연령층을 소외시킨다는 비판에도 ‘청년이 가장 불이익을 당한다’며 굽히지 않고 밀고 나갔다.

이재명은 2016년 의회에서 청년배당에 강한 비판이 일자 그래도 끝까지 밀고 나갈 것이라는 의지를 암시하는 ‘나는 돌멩이…밟히면 또 자라는 살아있는 돌멩이…커지고 또 자라서 언젠가 차는 발 뭉개주는 바위가 될 거다’라는 자작시를 썼다.

이렇게 이재명은 ‘시민이 주인인 성남’이라는 슬로건아래 자신은 언제나 시민의 대리인일 뿐이라는 신념으로 지냈다.

경기도지사 이재명, 어린이에게는 싱싱한 과일을 먹이고 싶었다.

이재명은 2018년 전인 시장인 자유한국당 남경필 후보를 누르고 56.4%라는 높은 지지율로 20년 만에 민주당계 출신으로 경기도지사 당선되어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경기도가 서울의 변두리가 아니다라는 의미로 ‘경기도 퍼스트’ 정책을 펼쳤다.

통일경제특구로 경기북부를 남북교류협력 사업 중심지로 육성하고 경의선·경원선 복원사업과 미군 반환공여지도 국가주도로 개발 프로젝트를 세웠다. 또 지역화폐를 발행하여 청년배당이나 산후조리, 전통시장 등에서 사용하도록 하여 골목상권을 일으켜 순환경제 활성화를 구상했다.

거기에다 성남시에서 성공적으로 시행한 무상교복·산후조리비지원·무상급식의 3대 무상시리즈를 경기 전역에 확대할 계획도 잡았다. 미취학 어린이를 위해서는 임산부까지 포함된 ‘경기도 가정보육 어린이 건강과일 지원’을 시행했다.

이는 자신이 어린 시절 과일이 먹고 싶어 쓰레기통에 버려진 썩고 시든 바나나를 주워 먹었던 기억이 남아 있기에 자라나는 어린이에게는 싱싱한 과일을 먹이고 싶었던 마음의 발로이다.

이재명이 성남시장 때 2018년 3월 2일 tvN ‘어쩌다어른’에 출연하여 ‘성남시 청년 배당 복지정책’에 대해 설명하다가 “그걸(청년 배당 복지)로 3년 만에 처음으로 과일을 사먹었다는 기사가 났는데, 그거 보고 가슴이 짠했다”고 했다.

그리고 이어 “내가 과거 가진 로망 중 하나가 냉장고에 있는 과일을 꺼내먹는 거였다. 아버지가 환경미화원이셨는데 아버지가 가져온 과일을 놔두고 먹을 수 없었다"며 "냉장고도 없었지만 버려진 것이나 버릴 수밖에 없는 과일을 가져오셔서 가져온 즉시 다 먹어야 했다. 신선한 과일을 먹는다는 건 가난한 사람들에게 일종의 로망이다”고 밝힌 적이 있다.

이재명은 2021년 10월 25일 대선에 나서기 위해 경기도지사직을 내려놓는 마지막 날까지도 경기도민을 챙기는 시정결재를 했다.

바로 한강 다리 중 유일하게 1,200원의 통행료(승용차기준)를 내야 하는 일산대교를 일산대교 운영사 사업시행지정 취소 공익처분 통보다. 다른 민자도로보다 평균 6배나 높은 통행료였지만 지난 11월 27일부터 무료통행하고 있다.

바닥에서 구르던 돌에서 하늘의 대권을 잡으려는 자 이재명

이재명은 도지사직으로만 머물고 있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의 야망은 더 높은 곳을 향했다. 바로 태양이 되고자 했다. 하지만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 더불어민주당 후보 경선에서 21.2%의 누적 득표율로 3위를 기록하며 실패했다.(2위 안희정(충남도지사). 1위 문재인)

그러나 드디어 2021년 6월 30일 자신의 대선 캠프인 열린캠프를 조직하고 또다시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그러자 우원식 의원이 달려와 공동 선거대책위원장직을 맡으며 중심을 잡았다. 이어 김근태 의장 보좌관을 지낸 박상혁 의원이 홍보본부장을 맡았다. 후보 비서실장은 박홍근 의원이 떠안았다.

정책총괄은 친문 3선의 윤후덕 의원이 버티고, 수석대변인에는 재선 박찬대 의원이 버텼다. 남인순, 이학영, 진성준 등 재선 이상 의원과 홍정민, 이해식 등 초선 의원은 각자 충실히 소임에 임했다.

서울 강서갑 초선 강선우 의원과 민주당 내 초, 재선 친문 강경파 ‘처럼회' 소속 의원들도 앞 다퉈 이재명 캠프에 올라탔다. 율사 출신 박주민 의원은 총괄본부장을 이재정 의원은 미디어본부장이란 중임을 짊어졌다. 캠프전략 총괄은 ’처럼회‘ 소속 민형배 의원으로 최초의 호남지역이다.

현직 최고위원 신분이라 캠프합류가 어려운 김용민, 백혜련 의원은 뒤에서 지원했다. 대전 지역은 황운하 의원이 관리하고. 초선 이탄희 의원은 미래정치기획위원장을 맡았다.

판사출신 이수진(서울, 동작을) 의원은 법률특보단장을 책임진다. 수행실장은 김남국 의원이다. 공동 상황본부장에는 권인숙 의원, 전용기 대변인, 김병주, 유정주, 이동주, 이수진(비례), 정필모, 최혜영, 양이원영 의원이 자리를 잡았다.

여기에 친문공천의 비례대표 11명 중 8명이 캠프에 합류하여 수행했다. 그리고 이해찬계의 친문 5선 조정식 의원은 전국 조직인 '민주평화광장'을 확대 개편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김성환, 이해식, 이형석 의원 등 초, 재선 의원도 거들었다. 특히 이해찬 전 대표가 직접 측면 지원에 나섰다.

지난 총선 선거 전략을 총괄했던 이근형 전 전략기획위원장은 기획단장을 맡았다. 친문 송재호 의원의 주선으로 2017년 문재인 대선후보 싱크탱크였던 '정책공간 국민성장'의 주요 인사들도 정책파트에 몰려들어왔다. 마지막으로 이재명의 7인회가 팔걷고 나섰다.

이재명의 최측근으로 분류되는 '풍운의 18기'로 불리는 사법연수원 동기들인 ‘7인회’는 정성호 김영진(경영 86), 김병욱, 임종성, 문진석(정외 82), 김남국(행정 01), 이규민 의원들이다. 이중 일부는 중앙대 학연도 갖고 있다.

드디어 10월 10일 김두관 이낙연 정세균 박용진 추미애 등과 맞붙은 더불어민주당 제20대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이재명은 11번의 지역 순회 경선에서 광주·전남을 제외하곤 모두 과반 확보 1위로 압도적 승리를 거두어 누적 득표율 50.29%로 결선 투표 없이 바로 민주당의 제20대 대선 후보로 선출됐다. 새로운 역사가 쓰여지기 시작했다.

이재명을 땅 밑에서 하늘 높이 뛰워 올리려는 사람들

더불어민주당은 2021년 11월 5일 이재명이 어린 시절 가난했던 아픔과 배고픔에서 나온 대선공약의 핵심인 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돕는다는 의미의 ‘억강부약(抑强扶弱)’과 가난 보다 불공정에 분노한다는 ‘불환빈 환불균(不患貧 患不均)’를 실천하기 위해 '드림 원팀'이 결성하고 제20대 대통령선거 선거대책위원회 1차 인선안을 발표했다.

송영길 대표가 관례에 따라 상임선대위원장을 맡았다. 그리고 상임고문단에 이낙연, 정세균, 이용희, 김원기, 임채정, 오충일, 이용득, 이해찬, 문희상 등 당 상임고문들이 이름을 올렸다.

공동선대위원장은 이낙연 측 인사인 설훈, 홍영표 의원을 비롯해 윤호중, 김두관, 박용진, 김진표, 변재일, 김상희, 김영주, 우원식, 이광재,, 이상민 의원 등 총 12명으로 꾸려졌다. 총괄특보단장에는 이원욱, 정성호, 안민석 의원이 공동으로 맡고, 위성곤 의원이 수석부단장을 맡았다.

국제통상특보단장에 김현종 전 청와대 외교안보특보, 외교특보단장은 박노벽 전 대사가 맡았다. 비서실장은 최인호, 박홍근 의원이 공동으로 맡았으며, 강희용, 허종식, 정진상, 천준호 의원이 부실장 자리를 맡았다.

수행실장은 한준호 의원이 정무조정실장은 강훈식 의원이다. 공보단 수석대변인에는 조승래, 박찬대, 고용진,오영훈 의원 공동이다. 이외에도 많은 의원들이 각자 중요 직무를 맡았다.

그런데 지난 2017년 제19대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경선 때 문재인 대통령과 거칠게 맞붙었던 앙금이 잊혀지지 않았는지 대선후보수락연설에서 이재명은 속마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날 연설문에서 자주 언급된 어휘가 경제(10회)·공정(9회)·민생(9회)·개혁(8회)·기득권(6회)·변화(4회)였고 경선을 도운 동료들을 거명하고 “동지들이 계셔서 민주당이 더 커지고 단단해졌다. 4기 민주정부, 이재명 정부 창출의 동지로 끝까지 함께 하겠다”며 ‘이재명 정부’가 시작 될 것임을 공개적으로 천명했다.

하지만 아직도 40% 안팎의 높은 지지율을 지닌 문재인 정권 정신 계승이나 이념계승이란 단어가 삭제되어 있다. 이는 문재인 대통령과의 차별화 의미로 현 문정권의 가장 뼈아픈 실책인 부동산정책을 들어 “당선 즉시 강력한 부동산 대개혁으로 불로소득 공화국이란 오명을 벗겠다”며 나섰다.

하지만 대장동 개발의 화천대유 의혹 등 여러 문제들이 마지막 대선 종착지까지 넘어야 할 장애물이 첩첩산중이다.

하늘 높이 뛰려는데 발목이 잡힐 것이 사방에 도사리고 있는 험난한 상황을 이재명은 특유의 불도저 뚝심으로 밀고 나가 목적지까지 도착할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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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성 pcsnews@poli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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