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한적의 회담 제의에 북은 무시와 거부 입장을 명백히 했다. 통지문 수령조차 거부한 채, 이산가족 상봉을 말할 자격조차 없는 ‘역적패당’으로 이명박 정부를 비난했다. 김정은 체제 등장 이후 북한의 대남 입장은 상종불가의 강경 모드가 지속되고 있다. 이를 알면서도 당국간 대화 채널을 연결해보려던 이명박 정부는 결국 망신살만 뻗치게 되었다. 개성공단에 신규설비 반출과 증개축을 허용하는 등 5.24 조치까지 우회하는 공을 들이고 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관계 회복과 대화 재개를 위한 때늦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북관계는 지나가 버린 버스가 되고 만 셈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불과 몇 년전 만해도 이산가족 상봉은 북이 먼저 제의해서 적십자회담이 개최되고 실제 상봉이 성사되었다. 2009년 가을 북한은 아무 댓가도 받지 않은 채 이산가족 상봉을 제의하고 성사시켰다. 당시 일련의 대남 유화조치의 연장선에서 이산가족 상봉은 남북관계 개선을 바라는 북의 적극적 대남 메시지가 분명했다. 그러나 남북관계는 그게 다였다. 북측의 성의와 유연한 태도에 이명박 정부는 끝까지 화답하지 않았고 북이 절실히 원했던 금강산 관광 재개를 끝까지 거부했다. 이명박 정부는 당시 북의 유연성을 대북 압박의 성과로 오인했고 따라서 더 밀어붙이면 마지막 결실을 볼 수 있다고 오판했다. 북한의 대남 유연성은 그게 마지막이었고 이후 남북관계는 천안함과 연평도 사태를 거치면서 돌이키기 힘든 지점을 통과하고 말았다.

지금의 이산가족 상봉 제의가 북한의 냉소와 함께 거부되는 가장 큰 이유는 당시 이명박 정부의 ‘실기’ 때문이다. 2009년 하반기의 남북관계 정상화 기회를 불필요한 고집과 비현실적 오판 때문에 걷어차고 만 이명박 정부의 잘못을 생각해보면 오히려 당연한 일인 지도 모른다. 북한이 정성을 다해 관계 개선의 손을 내밀었을 때 모질고 혹독하게 그 손을 뿌리친 이명박 정부로서는 이제 와서 북에 손을 내밀어도 소용이 없게 되었다. 모든 일은 때가 있고 기회가 왔을 때 이를 잡아야만 일이 풀리는 법이다.

때를 놓쳤다는 이유 말고도 지금 이산가족 상봉이 불가능한 또 하나의 이유는 이명박 정부의 이른바 ‘퍼주기’ 담론의 허구 때문이다. 사실 이산가족 상봉과 대북 식량지원은 동일한 인도주의 사안으로서 맞교환되는 성격을 갖고 있다. 그러나 오랜 기간 동안 한나라당과 보수 진영은 대북포용정책하의 식량지원을 퍼주기라는 세 글자로 단숨에 매도해 버렸다. 북한한테 받은 것도 없이 우리만 일방적으로 퍼준다는 아주 왜곡되고 감정섞인 이 단어는 대북포용정책을 비난하는 대표적인 상표가 되어버렸다.

전임 정부의 퍼주기가 잘못되었다면 잘주기로 교정하고 개선하면 되는 것이다. 퍼주기의 반대는 ‘안주기’가 아니라 ‘잘주기’일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퍼주기 담론을 내세워 대북포용정책을 일방적으로 비난하고서 정작 자신은 안주기로 일관하고 말았다. 북한의 상응 조치와 분배의 투명성을 요구하면서 북한을 지원하는 것이 잘주기일 테지만 이명박 정부는 아예 주지 않기로 작정했다. 2009년 이산가족 상봉 이후 이명박 정부가 발표한 인도적 차원의 대북 식량지원은 고작 옥수수 만톤이었고 이마저 차일피일 미뤄져 제공되지 못했다. 2010년 수해지원용으로 제공한 쌀 오천톤이 이명박 정부의 처음이자 마지막의 식량지원이었다. 개미가 날라도 될 정도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이명박 정부는 임기 내내 퍼주기를 내세워 대북지원을 일절 끊어버리고 만 셈이다.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은 대부분의 국민이 원칙적으로 찬성하는 사안이다. 북미 적대관계와 북핵 와중에서 미국이 인도주의를 내세워 대북 지원에 나서는 것도 이 때문이다. 따라서 헐벗고 굶주린 북한 동포에게 인도적 차원의 식량을 지원하는 일을 퍼주기라는 이유로 아예 중단하는 것은 사실상 남북관계에서 최소한의 신뢰의 끈을 끊는 것과 같다. 비판대로 퍼주기라면 좀 더 잘주는 방식을 논의하고 찾으면 될 일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의 본심은 잘주고 싶은 게 아니라 안주고 싶었던 것이고 그 결과는 남북관계의 파탄으로 드러났다. 아무리 북에 제의를 해도 돌아오지 않은 메아리가 되어버린 지금의 처지가 이명박 정부 4년의 남북관계 현주소다. 스스로 자초한 결과다.

김근식(경남대 교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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