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28일 영결식을 마침으로써 북한의 최고통치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장례절차는 일단락되었다. 김정일 위원장 없는 북한은 급변사태와 붕괴론의 우려를 잠재우고 신속하게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후계자 김정은으로의 권력승계가 순탄하게 진행되면서 엘리트와 주민들의 동요는 찾아보기 힘들다. 최고지도자의 유고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안정적 권력이양에 성공하는 모습이고 오히려 북한붕괴론이라는 외부의 주관적 기대가 스스로 붕괴하는 형국이다.

우리가 부고 소식을 접하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 바로 그의 삶에 대한 평가이다. 지난 생애를 돌이켜보고 공과 과를 따져보고 그를 통해 교훈을 찾는 것이다. 그러나 김정일 위원장 사망 이후 우리 사회에서는 사망 원인과 경위를 둘러싸고 설왕설래하더니 이제는 그의 후계자 김정은의 권력승계와 측근들의 일거수 일투족에 감각적인 관심을 보일 뿐이다. 영결식이 끝난 이제라도 한반도 북쪽의 상속자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인간적 평가를 시도하는 것은 늦지 않다. 물론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객관적 평가는 매우 논쟁적이고 당파적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을 주조하고 지배했던 최고통치자에 대한 평가는 이뤄져야 하고 시도되어야 한다.

필자는 그의 삶 전체를 선악의 기준으로 참과 거짓의 판단으로 평가할 의도가 없다. 김정일 위원장의 인생 자체가 북한 역사의 우여곡절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고 따라서 그에 대한 평가는 북한 역사에 대한 평가가 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인간 김정일의 삶을 이른바 수령제라는 관점에서 들여다보고자 한다. 지구상 유례가 없는 수령제를 정착시키고 체계화하고 끝까지 지켜내고 결국 아들에게까지 물려준 이가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1964년 김일성대학을 졸업하고 노동당 조직지도부에서 당생활을 시작할 때만 해도 그는 혈기왕성한 청년이었다. 그러나 수령의 아들이라는 자신감은 아버지의 절대 권력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타났고 1967년 이른바 갑산파 숙청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당내 리더쉽을 확보하는 계기였지만 자신감을 넘어 지나친 충성심으로 변질되는 계기였다. 1974년 정치위원으로 선출되면서 당내 후계자로 내정된 그는 결국 유일사상 10대원칙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주체사상을 아예 수령론으로 일체화시키고 말았다. 이제 주체사상은 수령의 절대적 권위와 무오류성 그리고 무한한 충실성만을 강조하는 일인 지배 정당화의 시스템으로 전환되고 만 것이다.

1970년대 중반 김정일에 의해 주도된 유일사상 체계화와 절대적 수령론은 결국 당내 이견을 봉쇄하고 창의적이고 주체적인 사고를 말살시킴으로써 역동성 없는 정치체제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 1980년 6차 당대회에서 조선로동당은 결국 맑스레닌주의를 삭제하고 주체사상만을 당의 지도이념으로 명기했고 김정일은 명실상부한 후계자로서 공식 선포되었다.

그러나 그때부터 사실 북한은 어려운 길로 접어들었고 야심차게 제시한 10대 전망목표의 달성은 갈수록 힘들어졌다. 1984년 김정일이 시도한 합영법 역시 미국의 레이건 행정부가 주도한 신냉전의 국제정세로 인해 서방자본의 유치에 성공하지 못하고 총련계 자본에 만족해야 했다. 대외개방의 시도가 국제정세에 의해 좌절되는 경험이었다. 그리고 1980년대 말 사회주의 붕괴와 더불어 북한은 이제 만성적인 체제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소련과 동구의 붕괴를 목도하면서 북한은 체제붕괴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고 그 답은 바로 군대를 흩트리지 않고 장악하는 것이었다. 1991년 김정일이 최고사령관에 추대되고 1992년 헌법개정으로 국방위원장을 신설한 뒤 1993년 국방위원장에 취임하고 나서 1994년에 김일성 주석이 사망한 것은 어찌 보면 절묘한 선견지명이었다. 수령 사망 직전에 군대를 착실하게 체계적으로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고 이는 김정일 위원장 사망 직전 김정은에게 당중앙군사위 부위원장직을 신설해 취임시킨 것과 일맥상통한다.

오랜 동안의 후계체제 구축 작업과 군 장악에 성공했던 탓에 1994년 이후 최대의 위기상황에서도 김정일은 체제를 유지하고 버틸 수 있었다. 수령제의 확립과 더불어 쇠락하기 시작한 북한이 고난의 행군이라는 최악의 위기에 봉착하지만 그 위기에서도 망하지 않고 버틸 수 있게 한 것 역시 역설적이게도 수령제 시스템이었다. 수령제라는 유일 절대권력체계가 권력 엘리트의 이탈과 저항을 제압했고 물리적 통제와 감시라는 수령 시스템이 또한 주민들의 동요와 저항을 봉쇄했다. 북한을 위기로 몰고 온 수령제가 위기를 버티게 한 역설적 효과를 낸 것이다.

김정일 위원장은 자신이 만들고 강화시키고 체계화시킨 수령제 때문에 사회주의 붕괴의 절대위기에서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다고 자위할지 모르지만 오히려 북한 체제의 위기는 수령제로 인해 더욱 깊어만 갔다. 절대절명의 위기에서도 당은 결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았고 모든 조직과 단위는 수령의 지시만 기다릴 뿐 결코 주체적 의지를 갖지 않았다. 이미 수령제는 북한내 모든 조직의 역동성을 뿌리뽑은 지 오래였다.

수령제는 위기를 버티게 할 뿐 결코 위기를 극복하게 하지 못했다. 1994년 우여곡절 끝에 북미 제네바 합의가 도출되었고 북은 일단 미국으로부터 체제인정과 안전보장을 담보 받게 되었다. 그러나 탈냉전 이후 처음으로 미국과 공존할 수 있었던 그 시기에도 북은 위기극복을 위한 주도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못했다. 북한이 선제적으로 개혁개방을 결심함으로써 미국을 견인해야 한다는 유연함은 아무도 수령에게 말하지 못했다. 미사일 문제를 가지고 여전히 미국과 기싸움을 지속했고 금창리 의혹 등으로 미국과 불편함을 계속했다. 뒤늦게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남북정상회담을 갖고 그 여세를 몰아 북미관계 진전을 시도했지만 클린턴 방북은 무산되었고 김정일 위원장이 타려던 기차는 이미 떠나고 말았다. 이후에는 부시 행정부와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했다.

2004년 김정일 위원장이 중국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신사고’를 강조하며 당 조직과 각급 조직의 주체적 노력을 강조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각 단위의 자발적 노력을 동원하는 건 불가능했고 신사고라는 단어만을 외우는 게 전부였다. 수령이 나서서 주체적인 노력을 독려했지만 주체성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9.19 공동성명 이후 6자회담이 공전될 때, 미국과의 기싸움 대신 선제적인 양보로 미국과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는 건의를 하부에서 올리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이견과 반대가 발본색원되어 버린 수령제 하에서 핵실험 강행과 핵무기 보유라는 돌이키기 힘든 길로 수령이 갈 때, 누구도 아니라는 말을 김정일 위원장에게 건의할 수 없었다. 2006년 핵실험은 강행되었고 2009년 또 핵실험이 강행되었다. 갈수록 미국과의 불신은 깊어지고 미국내 북핵문제 해결에 대한 피로현상이 누적되고 확산되었다. 북한이 미국을 협상테이블로 끌어들이기 위해선 더욱 더 센 위기조성을 해야 했고 이젠 미국도 벼랑끝 전술에 반응하기보다는 버티는 게 익숙해지고 있다.

조직의 활성화는 반대를 허용하고 이의를 수용할 때 가능하다. 그러나 김정일 위원장이 만들어 놓은 수령제는 수령의 지시에 대해 그 부작용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불가능한 시스템이다. 일사불란한 통일단결은 이룰 수 있을지언정 문제해결을 위한 각 단위의 창의적이고 자발적인 노력은 봉쇄되어 있다. 사회주의 붕괴의 위기 상황에서 북한이 붕괴되지 않고 버틸 수 있었지만 결국 위기를 해결하지 못한 것이 바로 지금 수령제의 딜레마인 것이다.

김정일 위원장의 수령제는 그의 후계자 김정은에게로 계승되었고 김정은 체제 역시 수령제로 인해 신속하게 정치적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그러나 수령의 유고라는 위기상황을 버티게 하지만 김정은 체제 역시 위기해결의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여전히 위기는 지속되고 해결은 난망해 보인다. 김정일 위원장의 수령제는 그의 통치와 권좌를 지켜내고 북한을 망하지 않게 했지만 영영 북한을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하는 최대의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수령 김정일의 안타까운 결과이다.

김근식 (경남대 교수/폴리칼럼니스트)

※ '열린칼럼'의 글은 본 사이트 논조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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