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글은 월간 폴리피플 2011년 5월호(22호) ‘COVER STORY’에 게재되었습니다. >

2012년 대선을 앞두고 폴리뉴스·월간 <폴리피플>이 시도하고 있는 후보검증 토론회의 두 번째 순서는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다. 박 전 대표는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실시된 모든 여론조사에서 차기 대권후보 선호도 1위를 단 한 번도 놓친 적이 없다. 한나라당 내에서도 다른 주자들과 현격한 차이를 보일 뿐 아니라 야권에서도 뚜렷한 경쟁후보가 나타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이른바 ‘박근혜 대세론’이라 할 만큼 부동의 선두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아직도 대선으로 가는 과정에는 많은 변수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4월 22일 개최된 좌담에는 고성국 정치학 박사, 신율 명지대 교수, 이택수 리얼미터 대표, 김능구 e윈컴 대표가 참석했으며 본지 이명식 편집주간의 사회로 진행됐다. 이날 토론에서는 박 전 대표가 살아온 삶과 국민에게 비치는 모습 그리고 정치책과 철학, 비전에 대해 조명했고 향후 정치일정에서 예상되는 변수들과 과연 ‘대세론’이 유지될 것인가 하는 문제도 짚어 보았다.

사회: <폴리피플> 22호(5월호) 특집 좌담은 대선후보 시리즈 ② 박근혜 편이다.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는 차기 대선 주자 중에 부동의 1위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오늘 좌담을 통해 박근혜 전 대표에 대해 의미 있는 분석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우선 박 전대표의 살아온 과정부터 되돌아보면 좋겠다.
박 전 대표는 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후 97년까지 약 18년간 정치적 은둔기가 있었다. 97년에 한나라당 입당 후 97년, 2002년, 2007년까지 3번의 대선을 거쳐 2012년을 맞고 있는데, 그간의 과정을 회고하면서 말씀을 나눠보도록 하겠다.

이택수: 2007년 7월 대선과정에서 저는 참여는 못했지만 자서전 출판기념회가 있었다. 그때 동영상을 상영했는데, 그 내용의 첫 번째가 성심여고 시절 전철을 타고 통학했던 이야기였고, 두 번째가 육영수 여사 서거 이후 퍼스트레이디에 입문했던 시절, 세 번째가 박정희 전 대통령 피살 당시 입었던 피 묻은 와이셔츠를 빨면서 우는 장면이었는데 그 세 가지 주요 콘셉트가 우리 국민에게 대표적인 고정관념으로 새겨졌다. 그 이후 최근 들어 구축된 이미지는 2007년 대선 이후 세종시 수정안 논란 과정에서 보여준 모습이 약속을 지키는 원칙의 이미지인데, 나쁘게 보면 타협을 모르는 고집불통의 이미지이다. 당시 40%대 지지율을 보이다가 세종시 논란 이후 20%대까지 떨어졌다가 최근 들어 30%대로 지지율을 회복했다. 계보 관련해서 친박 좌장인 김무성 원내대표와 갈등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보여준 차갑고 냉정한 이미지 때문에 현재 지지율을 40%대까지 회복하지 못하는 듯하다. 곧 다가올 재보궐선거 이후 당내 혼란을 어떻게 수습하고 포용하느냐에 따라 지지율이 좌우될 듯하다.

신 율: 제가 볼 때 박근혜 전 대표가 어떤 측면에서는 굉장히 학습효과가 뛰어난 정치인이고 어떤 면에서는 학습효과가 제대로 발현되지 못하는 정치인이라는 양면성이 있다고 본다. 첫째로 제가 박근혜 전 대표가 학습효과가 뛰어난 정치인이라고 이야기한 이유는, 박근혜 전 대표의 경우 청와대 생활을 굉장히 오래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본인이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면서 굉장히 젊었을 때부터 권력이 한 순간에 어떻게 되는 것인지 쭉 봐왔다. 원칙주의라는 것은 바로 그러한 학습효과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없으면 실제 권력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분명히 가지고 있고, 그래서 원칙을 강조하는 것은 자신의 삶에 있어서 학습효과의 중요한 반증이다.
반대로 학습효과가 떨어진다는 것은, 박 전 대표는 어떤 발언을 할 시기에 제때 발언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사실 정치라는 것이 살아있는 생물이라고 했을 때, 시기를 놓쳤을 때 오는 데미지가 크다. 이번 신공항 문제도 왜 이제 이야기하느냐는 지적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 항상 시기를 놓쳐왔다. 그렇다면 대선과 점점 가까워져오고 있는 상황에서 과거에 있어서의 학습효과를 되살린다면 시기를 놓치는 일은 더 이상 반복되면 안 된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박근혜 전 대표를 둘러싼 친박진영의 의사결정 과정에서의 문제점일 수도 있고 학습효과가 떨어지기 때문일 수도 있다고 해석한다.

고성국: 저는 박근혜의 인간과 성격에 대해 많은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박근혜 전 대표가 52년생인데, 아버지가 쿠데타를 했던 61년에 우리 나이로 10살이다. 쿠데타는 목숨 걸고 하는 것이고 실패하는 죽는다고 봐야 한다. 10살이면 대체로 무슨 일인지 알 만한 나이이고 장녀로서 조숙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공개적인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쿠데타를 성공했으니까 그때부터는 사실상 대통령 가족으로서 생활하고 지금까지 왔다. 박정희 서거 후 18년간 정치활동을 재개할 때까지 감금 상태는 아니지만 전두환 정권 때는 거의 활동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기간까지 포함해서 현재 59세인데 49년, 짧게 잡아서 퍼스트레이디 생활을 시작한 75년부터 보더라도 40여 년 가까이 정치영역에서 뭔가 해왔기 때문에 간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하겠다.
그 과정에서 산전수전 겪어볼 것 다 겪어봤다. 대통령의 딸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경험도 했겠지만 세계사에서도 아버지, 어머니 다 암살당하는 경우는 드물 것이고, 어린 나이에 퍼스트레이디로 5년 이상 역할을 하지 않으면 안 됐던 사람도 드물다. 유신체제는 굉장히 폐쇄적인 동원체제였기 때문에 내부의 권력투쟁이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적 정치체제에서의 권력투쟁과는 유를 달리할 만큼 아주 치열했다. 서로 권총 뽑아든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비사를 보면 박종규, 차지철, 김재규 등이 조금만 엇갈리면 집무실에서도 서로 권총 뽑아들었다고 한다. 그러한 권력을 가장 가까이에서 체험한 사람이다.
그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아버지가 측근에 의해서 암살당한 후 나락으로 떨어진 직접적인 당사자이면서 다시 살아났기 때문에 권력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누구보다도 학습이 잘 되어 있다. 이는 목숨 건 학습이고 아버지, 어머니의 죽음으로 했던 학습이기 때문에 평생 잊으려야 잊을 수 없다. 이러한 특별하고 독특한 경험 속에서 지금 박근혜의 캐릭터가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바람직하다 그렇지 않다고 평가는 할 수 있지만, 고칠 수는 없을 것 같다. 지금 와서 이렇다 저렇다 분석은 할 수 있겠지만 ‘문제가 있으니 고치라’고 주문한다고 해서 될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분석이 굉장히 중요하다. 이 사람이 이런 사람이고 그것이 변화의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전제 하에서 ‘Reading 박근혜’를 해야 실수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능구: 박근혜 전 대표에 있어 하나의 큰 특징이 소통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왜 소통하지 않는 것일까. 이전의 왕정시대의 제왕들처럼 본인과 신하들 관계 같다. 최근 동남권 신공항 발언에 대해서 ‘저게 무슨 뜻인가, 대통령과 정면대결 하자는 것인가 아닌가’라는 것을 친박계 의원들이 박 전 대표에게 감히 물어보지 못해서 본인들 나름대로 해석할 정도로 친박 내에서도 소통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은 다들 아는 사실이다. 그러한 캐릭터 형성과 관련해 첫째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가치체계로 애국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과, 둘째 79년 이후 은둔의 18년간 부모를 앗아간 사람이 최측근이었고 그 이후에 평상시 본인을 그렇게 떠받들던 사람들이 하나둘 떨어져나간 성장기가 있었다. 자서전을 보면 아버지 암살과 관련해 엄청난 분노를 갖고 있었고 자기가 정계에 들어온 계기도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는 대목이 나온다. 여기서 강한 배신감,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심리, 이를 좋게 말하면 계파를 형성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면서도, 누구와도 진솔된 나눔과 소통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 자기의 인생스토리에서 나왔다고 보여진다.
현재 대세론 속에서 차기 대통령이 될지 안 될지는 몰라도 국가지도자급인 박 전 대표가 자기 인생 속에서 사람을 믿지 못하고 소통하지 못하는 ‘불통의 리더십’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면 그것은 큰 불행이라는 것이다.

신 율: 행태주의적 접근을 제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이 행태주의적 접근이 어떤 경우에는 맞고 어떤 경우에는 맞지 않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런데 실제 굉장히 역경을 많이 겪은 사람이 왜 이러한 행태를 보일까라는 것은 실제 행태주의적 접근이 들어맞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에서 박 전 대표가 딱 들어맞는다는 생각을 갖는다. 문제는 이것이 교정 가능한가라고 물었을 때 ‘그렇기 때문에 교정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데, 김 대표께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것이 소통과 애국을 한꺼번에 말씀하셨는데 이 둘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인가?

김능구: 어린 시절부터의 성장과정에서 본인이 추구하는 목표, 가치관은 한마디로 애국주의였다는 것이다. 79년도 10.26 난 뒤 가장 처음 이야기한 것이 북쪽(휴전선)은 안전한가 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 상황에서 나라의 안전을 이야기할 정도로 몸에 배었다는 것이다. 박근혜의 여러 가지 주장이나 가치를 하나로 묶어놓으면 한마디로 애국주의라 표현할 수 있지 않겠나? 불신과 배신 속에서 소통의 문제를 낳았다고 본다. 그래서 본인의 삶을 좋게 볼 때 애국주의와 소통의 문제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신 율: 제가 여쭤본 이유는 실제 우리가 애국주의라고 이야기하는 측면을 봤을 때, 물론 애국이 굉장히 중요하지만 애국이 표현되는 양태는 그 사회의 분화 정도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고 박사께서 말씀하셨듯이 박 전 대표 본인에게 그러한 것들이 굳어진 시기와 지금의 시기는 엄청나게 달라졌다. 저는 애국과 소통에 관계가 있다고 본다. 이분이 생각하는 애국주의는 자칫하면 이분법적 애국주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사회는 굉장히 다원화돼 있는데, 이 다원화돼 있는 사회 속에서 이분법적 애국주의 사고를 갖고 있다면 제가 볼 때 사회적으로 여러 가지 어려움이 크게 드러날 수 있다. 거기에 원칙주의와 합쳐져 버리면, 이때의 원칙주의는 예측 가능하지만 문제는 소통은 안 될 수 있다는 상황이 빠져버릴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들어 여쭤본 것이다.

고성국: 가까이에서 모신 사람들이 하나같이 하는 이야기가 ‘박근혜는 쇼가 없다’, ‘진정성 있다’, ‘한 입으로 두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 직접 이야기한 것이, 자기를 별칭으로 ‘수첩공주’로 이야기한다는 것을 알고 국민을 만날 때마다 민원사항을 다 적어 꼼꼼하게 확인하고, 이를 비서관을 통해 어느 유관 상임위 위원들한테 “해결될 수 있도록 노력해 달라”고 지시한 다음에 1, 2주 후에 문득 그 일에 대해서 물어보면 그 순간 “여기까지 와있다”고 대답하지 못하면 야단을 맞지는 않지만 상당히 분위기가 무거워진다고 한다. 그래서 비서실이 기계처럼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고 2007년 경선 당시에 비서실에 있는 사람들이 이야기했다.
그런 것을 보면 없는 말을 한다거나 쇼를 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냥 하는 이야기는 정말 진정성을 갖고 하는 이야기다. 앞서 애국주의 말도 나왔는데 자기 가치가 있고 자기 가치에 충실하면서 그 가치를 진정성을 갖고 실현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소통이 안 되는 상태로 간다면 자칫 도덕주의에 빠질 수 있다. 굉장히 위험한 측면이 있는 것이다. 대개 우려하는 것이 박근혜를 보면 정치감과 타이밍 등이 매우 탁월해서 대통령이 될 것 같기는 한데 국가경영을 국민과 더불어 함께해야 하는데 도덕주의적 국가경영으로 가면서 소통 부재의 문제가 발생하면 굉장히 심각한 어려움이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그 점을 걱정하고 지적하고 있는데 그 점에 대해서 설명하고 해명하면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앞으로 박근혜가 대선 과정에서 봉착할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어려운 질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박 전 대표는 가정교육을 잘 받은 사람인 것 같다. 통상 가정교육은 어머니 몫이다. 육영수 여사가 박근혜를 가르칠 때 굉장히 엄격했는데, 육여사가 교육을 잘 한 것 같다. 육영수 생가인 충북 옥천에 거부 중 한 사람이 육영수 아버지인데, 재상이 3대가 나온 집을 사서 집을 새로 지었다. 그 집의 햇빛이 잘 들지 않는 북향 맨 끝에 1.5평짜리 작은 방이 육영수 여사 시집 갈 때까지 살던 방이었데, 그 방 안에는 이불, 앉은뱅이책상 하나 있고 사람 한 명 앉으면 꽉 찰 정도의 크기였다. 실제 시집가기 전까지 육영수는 매우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으면서 컸다. 그래서 육영수 여사 이미지가 조작된 게 아니라면 영부인인 퍼스트레이디가 되고 나서도 계속 서민적으로 검소하게 살면서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려 한 것이 많은 부분 사실에 근거했으리라고 본다.
그러한 분위기와 정서, 마인드를 가지고 박근혜를 가르친 것 같다. 그것도 부모와 자식 간의 교육이 아니라 퍼스트레이디로 외국에 나가야 할 때 본인 대신 박근혜를 보냈다. 정상들끼리 만나면 선물 교환을 하는데, 고등학생인 박근혜에게 선물을 준비하게끔 해서 점수를 매기게 해서 지적도 했다. 이런 식의 교육이 만약 아들이었다면 제왕학이라 비판받을 텐데, 그런 범상치 않은 교육을 어렸을 때부터 매우 철저하게 받았다. 그래서 간단히 무너지지 않는다.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에게 저격당했을 때도 자세를 한치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그것은 평생을 쌓아오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박 전 대표가 커터 칼로 테러 당한 직후의 모습이 육여사가 죽어가던 모습과 굉장히 유사하다. 이는 굉장히 무서운 대목이다. 대를 이은 엄격한 교육이 내면화돼 있다는 점들도 같이 봐야 한다.

사회: 현재까지 보여지는 박 전 대표의 이미지는 성장과정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인데 정치를 하면서 부분적인 변화가 있었다고 볼 수 있는 측면은 없나?

신 율: 저는 정치인의 이미지가 하루아침에 형성되지 않는다고 본다. 특히 박근혜 전 대표의 경우는 물론 공백기간은 있었지만 일반 국민들이 어릴 적부터 봐온 것 아닌가? 그 정도 긴 시간을 쌓아온 이미지이기 때문에 본인이 보여줘서 사람들이 소통한다고 느끼기도 힘들고, 본인 스스로 바꿔서 보여주기도 힘든 이중고가 도사리고 있다고 본다. 박 전 대표가 썰렁개그를 한다고 하는데 이를 해서 정말 썰렁해지지 재미있지는 않다. 그래서 저는 그 점이 참 안타깝다.

김능구: 살아온 삶 중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게, 박 전 대표가 52년생인데, 유신이 72년에 발생했다. 이때 박 전 대표는 대학생이었다. 당시 대학생들은 사회에서 지식인으로 분류되었다. 저도 전두환 딸과 대학을 다녀봐서 알지만 늘 경호원이 붙어있었는데 박 전 대표의 경우 제한된 공간에서도 동문들과 잘 어울렸다는 이야기를 들어 있는데 그 시대의 대학의 흐름에 크게 갈등하기 보다는 안주한 것 같다. 그 이후 자신이 쓴 책을 보면 아버지 측근들에 대한 분노가 나와 있는데, 암울했던 70년대의 유신시대에 박정희 딸로서 안고 있는 어두운 측면인 독재자 딸 부분이 본인의 여러 가지 자아형성에 영향을 크게 미쳤을 것이다.

고성국: 전자공학과를 선택한 것은 본인 스스로 결정한 것이라 한다. 아버지에게 효도하는 길을 찾다가 그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이 공업입국을 표방했기 때문에 과학자, 기술자가 돼서 나라에 아바지하는 것이 좋겠다는 마음으로 전자공학과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당시 공대에 여자가 없어서 홍일점으로 다녔고 수석으로 졸업했다. 자서전에 그 대목이 잠깐 나오는데 학생들이 데모를 하러 가는데 본인은 같이 갈 수 없었다고 했다. 그 시대에 갈등이 있었던 것은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어둡게 지냈던 것 같지는 않고 대학 시절에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고 경호원도 가급적이면 대학 정문 근처까지만 오게 하는 등 비교적 학내에서 잘 지냈던 것 같다. 그러고 파리로 유학을 갔는데, 대학생이 사회문제에 막 눈을 뜰 때 동료들이 보여준 민주주의나 반정부운동에 대한 갈등은 있었던 것 같지만 애국주의라는 틀 속에서 해소되면서 크게 심적으로 갈등하지 않고 비교적 가볍게 앓고 갔다. 당시 육영수 여사가 딸을 어떻게 시집보낼지 고민을 했다고 하는데, 파리 유학을 다녀온 뒤 재원이 돼서 결혼을 시켰다면 굉장히 행복한 일생을 살 수도 있었을 텐데 유학 간 1년이 채 안 돼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때부터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됐다.
장준하 선생의 장남인 장호권 씨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는데, 2007년 경선 때 많은 사람들이 박근혜에게 과거 아버지 시절 있었던 역사적 아픔에 대해서 사과를 하고 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으로 권했고, 장준하 쪽과 박근혜 쪽을 잘 아는 사람들이 역할을 하면서 박근혜가 ‘사과를 하러 오겠다’고 했다. 장호권 씨 말에 따르면 당시 본인은 사과를 받을 준비가 안 돼 있어서 사과를 못 받겠다고 했고 대신 어머니가 사과를 받으셨다. 그의 어머니에게 박근혜가 와서 사과를 하고 간 뒤 어머니가 “걔도 불쌍한 애 아니냐. ‘앞으로 정치를 해도 사람 아프게 하지 말라’고 좋게 해서 보냈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 광경을 보면 박근혜가 억지로 했는지 정말 진정성을 갖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비록 아버지와 관련된 사과라도 자기 마음이 전혀 움직이지 않는 상태라면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본다. 자기 마음이 조금이라도 움직였기 때문에 가서 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평가할 수는 있지만 정치적으로 사과 더하라고 하는 것이 맞는 이야기냐. 그것은 생각해 볼 대목이다.

신 율: 미래희망연대 서청원 대표를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서 대표는 과거에는 그 반대에 있었다. YS계 아닌가. 서 대표가 말하길 “박 전 대표는 한나라당 대표 시절에 그 누구보다도 당을 민주적으로 이끌었다”면서 “‘아, 이런 모습을 보여주면서 과거를 극복하려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친박 쪽 인사들은 그런 이야기를 한다. 제가 보기에도 박 전 대표에게 또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하지만, 반면에 상대로부터 도전이 있으면 반드시 응징을 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예를 들어 이재오 장관이 예전에 ‘독재자의 딸’이라는 발언을 했을 때 박 전 대표가 보인 반응이나 그 이후 두 사람의 어긋난 행보를 봤을 때 사과를 안 한 것은 다른 문제이고, 그러한 이야기를 한 상대방에게 철저하게 맞붙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도대체 사과를 한 건지 안 한 건지 헷갈린다.

김능구: 이재오에게 “당을 떠나라”라고 했다. 2002년 한창 박근혜와 정몽준의 연합이 사람들의 관심사일 때 강신옥 변호사가 정몽준 캠프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아예 협상도 안 하려고 했다. 그런 데 있어서는 굉장히 단호하다.

고성국: 김 대표 말씀대로 박근혜 정치의 출발점이 아버지 명예회복이었다. 그것은 지금도 그렇다. 아비지와 관련된 부분에 있어서는 양보가 없다. 자기 정치의 출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별개로 결과적으로 유신시대에 억울하게 희생당한 분들이 있다는 생각을 박근혜라고 해서 왜 못하겠나. 당장 무죄판결 나고 하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 본인이 역사적으로 사과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도 누군가가 박정희를 독재자라고 욕하면 여전히 맞받아 싸울 것이다. 그 점에 있어서는 양보가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버지를 죽인 김재규를 변호한 변호사가 자기의 정치협상 파트너로 테이블에 나오는 사실에 대해 정치를 안 했으면 안 했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정서가 있다.

김능구: 박근혜 대세론이 만약 무너진다면 한 축이 될 것이라고 보는 것이,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젊은 층의 신뢰도가 급격히 떨어지고 있는 점이다. 2007년도 42.9%, 2009년도 30.2%, 2010년 22.6%로, 30대에서는 현재 13.8%다. 젊은 층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이다. 따라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신뢰도 부분이 급속히 떨어지고 있다. 아마 내년 대선 과정에서 지난 한나라당 경선 이상으로 ‘박정희 딸’에 대한 공격과 이에 대한 본인의 입장표명이 요구될 것이다. 이 부분은 본인과 한 몸이기 때문에 최대 위기관리 포인트인데, 이회창 아들 병역비리 문제처럼 어느 누구와도 협의하거나 연구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앞으로 큰 문젯거리가 될 것이다.

신 율: 김 대표는 한 몸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이 제일 중요한 포인트 같다. 우리가 지금 박 전 대표의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도 지금에 있어서의 정치인 박 전 대표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 있는 독립된 정치적 주체인가, 벗어날 수 없는 주체인가가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이는 우리가 박근혜 대세론, 지지율을 예측하는 데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이기 때문이다.

고성국: 저는 박근혜가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부터 독립했다고 생각한다. 출발은 아버지의 명예회복이었고 그 문제의식은 여전히 갖고 있지만 정치적 실체로서 박근혜는 이미 박정희의 딸이 아니라고 본다. 여기에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정치판에 들어와서 지금까지 박근혜가 만들어놓은 스토리가 많이 쌓여서 이제는 박정희의 딸로 설명하지 않고 박근혜의 아버지로 설명해도 무관할 정도로 자기 스토리가 쌓였다.
둘째 작년에 박정희를 규정하면서 “아버지가 진정으로 바랐던 것은 복지국가 건설이고 행복한 국가”라고 한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박근혜는 그동안 아버지를 자기 프레임으로 규정해본 적이 없다. 자기가 재규정할 수 없는 그 자체로서 아버지였는데, 이제는 아버지가 이러한 생각을 했다고 박근혜가 박정희를 규정하면서 복지를 주창하고 나선 것이다. 저는 긴급조치 세대이기 때문에 박정희가 복지국가를 건설하려 했다는 데 대해 동의할 수 없다. 그러나 박근혜는 아버지가 복지국가 건설을 원했다고 규정하고 아버지가 진정으로 원했을 복지국가 그림을 자기가 그려서 보여줬다. 여기서부터는 아버지를 넘어서서 박근혜 정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느꼈다. 그것이 생애주기별 맞춤형 복지국가를 낼 때였다. 그러한 사건적 계기를 통해서 박근혜가 박정희로부터 독립했다고 느꼈다.

김능구: 저는 박근혜가 박정희로부터 독립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박근혜는 박정희를 한 몸으로 가져가면서 좀 더 진화했다고 본다. 따라서 박근혜 대세론을 거품이라고 본다.

신 율: 거품 중에 박정희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는 계층이 많이 포함됐다는 것인가?

김능구: 그렇다. 지난 2007년 경선 때 박근혜 사과가 말만 나돌고 성사되지 않았다. 거기서 다수는 박정희와 관련된 지점들이다. 만약 박정희로부터 독립됐다면 분명한 자기 정리와 정립이 있었어야 했다. 사과 했는지 안 했는지 모르겠다고 했는데, DJ에게 한 사과도 애매모호하게 표현해서 물론 DJ는 받아들이긴 했지만 이렇게도 저렇게도 생각할 수 있게끔 잘 말하는 것 같다. 박정희로부터 독립된 정치인으로 봐야 한다는 데 반대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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