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5가 무색한 남북관계

김근식(경남대 교수, 정치학)

푸르른 신록의 계절이면 어김없이 6월이 찾아온다. 벌써 6.15 공동선언은 12주년을 맞는데 현실의 남북관계는 참담하기만 하다. 남과 북은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을 방불케 하는 치열한 공방을 주고받고 있다. 남북관계가 단순히 중단된 것이 아니라 냉전 시대에나 봄직한 적대적 강경 대응을 지속하고 있다.

북에서는 대규모 군중대회를 잇따라 열고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붓는가 하면 대통령 허수아비를 발로 밟고 돌을 던지기까지 하고 있다. 남쪽도 이에 질세라 김정은 제1위원장의 집무실을 타격할 수 있다는 고성능 미사일 동영상을 공개하고 군사력의 우위를 과시하는가 하면 통일부 장관이 나서서 통일항아리를 빚고 통일 재원을 마련해야 한다고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북한과의 대화는 뒷전이고 북한붕괴를 염두에 둔 통일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는 셈이다. 6.15 공동선언 12주년을 맞는 작금의 한반도는 한마디로 6.15 자체가 무색한 상황이다.

6.15 공동선언은 적대와 대결의 남북관계를 화해와 협력의 남북관계로 전환하는 역사적 계기였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조선인민군 육해공군 의장대의 공동 사열을 받는 장면만으로도 남북관계는 평화공존과 화해협력의 출발을 내딛는 것이었다. 대한민국의 군통수권자인 김대중 대통령이 주적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나란히 서서 북한군의 경례를 받는 것 자체가 남북정상회담의 상징적 의미를 충분히 담고 있었다. 6.15 공동선언에 따라 남북관계는 화해와 협력의 물꼬가 트이기 시작했고 각급 공식대화와 경제협력 및 사회문화 교류가 봇물 터지듯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금강산 관광과 개성관광이 시작되었고 경의선 연결이 착수되었고 개성공단에는 남북의 근로자가 함께 일을 하기 시작했다. 8.15 행사와 6.15 행사는 해마다 남쪽과 북쪽을 오가며 공동행사로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아시안 게임과 유니버시아드 대회에는 북측의 미녀 응원단이 참가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는가 싶은 민족화해의 진전이 이뤄졌다.

그러나 지금의 한반도는 남북대결이 상시화되고 일촉즉발의 긴장이 고조된 채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 화해와 협력의 6.15 정신은 사라지고 냉전시대의 적대적 대결만 존재하고 있다. 사실 완전파탄의 남북관계는 이명박 정부 등장부터 시작되었다. ABR(Anything But Roh)로 시작된 이명박 정부의 非포용(non-engagement) 정책은 '비핵개방 3000'과 '그랜드 바겐'이라는 선북한변화론과 선북핵포기론의 덫에 갇혀 임기 내내 하염없는 ‘기다림’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기다림의 결과는 북의 변화와 굴복이 아니라 강경대응과 긴장고조였고 결국 남북관계는 실종되고 말았다.

정부의 공식 대북정책으로 내놓은 이른바 ‘비핵개방 3000’ 구상은 북한의 선변화를 전제 조건으로 걸어 남북관계의 진전을 연계해놓은 논리적 구조인 탓에 처음부터 북한의 반발을 사고 말았다. 북이 먼저 핵을 포기하고 개방으로 나서야만 남북관계가 가능하다는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은 어떤 식으로든 북이 굴복해야만 대북지원과 남북협력이 가능해지는 갑을관계의 과시였지만 북한과 관계를 지속하기엔 지나치게 오만한 입장임이 분명했다. 비핵개방 3000은 상대방이 도저히 받을 수 없는 운명으로 인해 대북정책으로서의 효용성은 처음부터 불가능했고 오히려 국내용 정당화 담론의 성격이 더 강해 보였다. 비핵화와 개혁개방이라는 목표만 반복되어 강조될 뿐, 북한을 그 목표로 이끌어 낼 수 있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해법과 수단은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은 북한의 버릇을 고치고 북에 끌려가지 않겠다는 과도한 의욕과 고집만 있었을 뿐, 정작 어떻게 북을 변화시킬 것인지의 해법과 실천은 존재하지 않았고 따라서 처음부터 실패는 예고되어 있었다.

전임 정부에 대한 정치적 부인과 선북한변화론에 입각한 기다림의 무모한 전략, 북이 내민 손을 뿌리치면서까지 북을 굴복시키려 했던 고집과 오기, 그리고 찾아온 군사적 긴장고조의 정치적 부담을 다 겪고 나서야 뒤늦게 이명박 정부는 남북관계 개선의 실마리를 찾아보려 했지만 이미 기차는 지나간 뒤였다. 너무 가버린 탓에 이명박 정부도 자신의 입장과 노선을 돌이키기 힘들었고 이미 이명박 정부에 대한 기대를 포기해 버린 북한 역시 관계개선의 의지는 전혀 찾을 수 없었다. 더욱이 2011년 말에 닥친 김정일 위원장 사망 국면과 김정은 체제 등장은 남북의 기싸움을 더욱 첨예하게 만드는 조건이 되었다. 유훈통치를 내세워 이명박 정부와는 상종불가 입장을 일관되게 고수하고 있는 북한에게 이명박 정부는 이제 더 이상 대화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6.15 12주년의 남북관계는 완전 파탄의 긴장 상황으로 정리되고 있는 셈이다.

남북관계의 망실은 한반도 정세에서 우리의 개입력과 역할을 부정하게 만든다. 북한 지도자의 사망조차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새로 등장한 북한 지도부와 아무런 관계를 갖지 못한 채 북한정세에 수동적으로 끌려가고 국외자로 방관해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다. 북한이 ‘어디로 가는가’를 넘어 북을 ‘어디로 이끌어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할 중차대한 정세전환의 시점에 이명박 정부는 두 손을 놓고 중국과 미국만을 바라봐야 했다.

중요한 시기와 결정적 국면에 한반도 정세의 방관자와 국외자가 되어버린 이명박 정부의 근본적 결함은 바로 남북관계를 포기한 데서 비롯된다. 남북관계의 끈이 사라진 순간, 우리는 대북 개입도, 한반도 평화도, 북핵문제도, 북방경제도 사라지게 되고 한반도 정세는 최악으로 갈 수밖에 없음을 절감하게 되었다. 더욱이 김정일 시대가 가고 김정은 시대가 개막되면서 남북관계의 새로운 정립이 절실한 지금, 이명박 정부의 非포용정책 대신 이제 우리는 대북포용의 정당성과 함께 6.15 정신의 재확인을 다짐해야 한다. 금년에는 남북관계의 전환이 현실적으로 기대하기 힘든 상황인 만큼, 연말 대선을 통해 출범하는 새 정부는 반드시 6.15 공동선언을 계승하고 그 실천을 통해 망실된 남북관계를 재건하고 진전시키는 데 앞장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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