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안개 속을 헤맸지만, 이젠 어디로 가야할지 훤히 보인다”

짙은 안개 속에서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사람을 믿고 따라간다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래서 정치 지도자라면 자신이 어디서부터 출발했고, 현재 어느 곳에 있으며, 어디를 향해 가야할지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민주당 정동영 최고위원은 17대 대선 후보로 나섰지만, 안개 속에서 헤매다 결국 쓰디쓴 패배의 경험을 맛보았다. 참혹한 패배를 두고, 정치권에서는 그가 다시 일어설 수 없을 것이라는 암담한 관측이 쏟아지기도 했다.

하지만, 오뚝이처럼 일어섰다. 중앙 정치권에서는 ‘반성도 제대로 하지 않고 정치 일선에 복귀하려 한다’는 비난도 있었지만, 바닥 민심은 달랐다. 압도적인 지지로 그를 다시 국회에 보냈고, 이후 치러진 민주당 10.3전당대회를 통해서도 정동영은 사실상 재신임을 받았다.

그가 단순히 권력욕에만 빠져 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의 주변에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철저히 쇄신하고 반성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 보고 있다. 그는 이제 2007년 12월 당시 갖고 있지 못했던 나침반을 갖게 됐다고 말한다. 그 나침반이 ‘담대한 진보’로 가라고 명확히 길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동영이 걷고자 하는 ‘진보의 길’, 그것은 미래의 길이기도 하고 ‘신자유주의 안개 속’을 헤매었던 지난날들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따라서 더 솔직하게, 더 강력하게 진보의 길로 나아갈수록 그의 반성도 더 치열해지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 강한 불신을 가졌던 진보진영조차도 이제는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의 반성문의 진정성을 평가하고, 그가 제시하는 대안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차기 대선을 논하는 과정에서 정동영 최고위원을 결코 빼놓을 수 없다.

<폴리뉴스>와 자매지 월간 <폴리피플>은 2012년 대선 특집으로 여야 대선후보들에 대한 검증 시리즈를 준비했다. 2월 21일 정동영 최고위원은 그 첫 번째 손님으로 초대됐다. 2시간이 넘는 장시간의 인터뷰는 그야말로 청문회를 방불케 할 만큼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기자 시절의 정동영부터 지금 민주당 최고위원, 대통령 후보로서의 정동영, 그리고 미래 비전을 자신 있게 설명하는 정동영까지. 다양한 질의응답을 통해 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내다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진지하게 인터뷰에 응해준 정동영 최고위원과 휴일도 없이 자료준비를 도와준 의원실 관계자 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다음은 정동영 최고위원과의 일문일답>

-정혜신 박사는 “우리나라 정치인을 ‘정동영 스타일’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도 있다”고 했다. 정 최고위원이 사실상 미디어정치시대의 개막을 알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미디어 정치인’이라는 표현, 어떤가?

좀 억울한 생각이 든다. 텔레비전 기자를 했는데 텔레비전을 잘 모른다. 취재하고 기사 쓰고 방송기자를 했지만 미디어정치와는 다른 이야기다. 내가 프로듀서 했다면 미디어에 대해서 더 이해했을 텐데, 신문기자 출신보다는 더 알겠지만 미디어 전문가라고 할 수 없다.

박찬종, 조순, 정원식 빅3간 서울시장 후보들이 처음 TV토론 시대를 열었다. 그때 제가 토론 사회를 봤으니까 그런 점에서 미디어정치 시대의 개막과 관련 있다고는 할 수 있겠다.
또, 97년에 광장의 시대에서 미디어정치 시대로 넘어갈 때 제가 김대중 후보의 대변인이었다. 정동영을 기준으로 시대구분이 되는 것이 아니라 97년을 기점으로 바뀌었다고 말할 수 있다.

-정 최고위원에 대해 ‘잘 생겼다’, ‘말 잘한다’, ‘코디 좋다’ 등의 평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나쁜 이야기는 아닌데, 정치는 자기 생각으로 한다. 저에게 한나라당에서 정치를 제안하지도 않았지만 상상을 할 수도 없다. ‘정동영 생각이 뭐냐’가 중요한 것인데, 이는 잘 안 묻는다. 정동영을 위한 변명을 하자면 철이 든 19, 20살부터 지금까지 생각을 바꾼 적이 한 번도 없고 그런 제 인생에 대해 스스로 자부심을 갖는다.

-기자생활을 할 때 국민에게 가장 각인된 것은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 때였던 것 같다. 정 최고위원에게 있어서 삼풍백화점 사건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나?

워낙 충격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제대로 된 앵커를 해보고 싶었는데 앵커를 못한 기자 출신이다. 그럼에도 많이들 앵커로 기억해 주시는데, 큰 사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삼풍사건이었다. 그때 제 위치는 전국 부장으로 지방뉴스를 담당하는 데스크였는데 국장 지시로 현장에 가서 마이크를 잡게 됐다.

삼풍백화점 붕괴는 하나의 사건이면서 동시에 우리 사회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전환점이기도 하다. 건축물은 기술, 행정, 정치, 토목, 돈 등 총합적 요소가 다 들어간다. 60년대 이후로 7, 80년대를 거치면서 압축성장의 문화가 붕괴한 것이고 그 과정에 온갖 부실과 비리가 다 드러났다. 백화점 하나가 무너졌지만 지금까지 쌓아온 대한민국의 개발·건설·성장 기반의 허약성을 사람들은 느꼈고, 그 현장에 한 기자로 제가 서있었는데 사건이 워낙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제 이름을 많이 기억하고 있다.

-정치에 입문한 이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정풍운동’이다. 정 최고위원의 정치인생에서 당시 정풍운동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나?

고생길의 시작이었다. 그전까지는 순탄했다. 1996년 전주에서 국회의원 되면서 김대중 후보 대변인, 당 대변인으로 대변인을 40개월 했다. 2000년 재선에 성공해 40대 최연소 최고위원으로 지도부에 들어가게 된다. 제 정치경력에 걸맞지 않게 무거운 짐을 진 것이었다. 제가 최고위원이 아니었으면 당시 청와대 자리에 앉아있을 자격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고난의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이제 와서는 ‘정동영이 출세하는 기회였다’고 말하지만 당시는 고통스러운 순간들이었고 그것 때문에 개인적인 시련도 있었다.

당시 누구나 얘기는 했는데, 문제는 고양이 목에 방울 다는 사람이 없었다. 누군가 했어야 했다. 그것이 김대중 정부를 구하고 김대중 대통령을 돕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저의 그러한 순수한 뜻이 그대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여러 가지 억측과 정치적 야심, 계산이 있었다는 비난이 컸다.

-정풍운동을 돌이켜 보면, 동교동계는 극렬히 반발했지만 그럼에도 DJ의 암묵적 지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금시초문이고, 김대중 대통령이 그것을 암묵적으로 지지했으면 나중에 그렇게 불같이 화를 냈겠나? 제가 알기로는 굉장히 역정 내셨고, 한참 세월이 지난 뒤지만 제가 사과도 드렸다. 김대중 대통령께서 ‘나에게 와서 1:1로 해도 될 이야기를 펼쳐져 있는 회의 자리에서 했느냐’고 책망하셨는데, 1:1로 만나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 못했기 때문에 청와대 회의 자리에서 이야기한 것이다. 김 대통령이 그것을 암묵적으로 지지했다면 왜 총재직을 사퇴하고 탈당했겠나?

- 지금도 당시의 정풍운동은 옳았다고 생각하고 있나?

앞서 말씀드렸지만 생각이 바뀐 것은 아니다. 저는 김대중 정부를 구하고 김대중 대통령을 돕기 위해서는 이길밖에 없다고 생각했지만 방법에 있어서 그런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제가 생각이 짧았다는 이야기를 드렸다.

-2002년 16대 대선후보 국민경선에서 경선지킴이라 명명될 정도로 끝까지 완주했다. 다들 중도사퇴 할 때 한 번도 흔들린 적 없었나?

꼴찌하면서 따라가는 것도 고통스럽다. 그러나 국민경선은 한국정치 발전·개혁에 있어서 하나의 전환점이다. 정치개혁의 핵심은 정당개혁이고, 정당개혁의 핵심은 공천권인데 국민경선은 대통령후보 공천권을 아래로 내려 보낸 것이다. 이는 쇄신정풍운동의 열매로서 만들어졌고, 이를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저는 국회의원 4~5년차로서 국가를 경영할 만한 청사진과 전략을 제 스스로 다 갖췄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이 경쟁에 뛰어드는 것이 당과 정치 발전에 기여한다는 생각으로 갔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분이 그만둘 때 나는 이를 완성해야 할 책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작게는 당과 후보, 크게는 한국정치 발전에 기록으로 남을 것이고 이를 바탕으로 앞으로 지속 가능해진다는 확신이었다.

그 과정에서 많이 괴로웠다. 정치인은 사실 자존심·자부심으로 살기도 하는데 매주 토요일·일요일이면 링 위에 올라 KO패하는 것은 정말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또 그 과정에서 욕도 많이 먹었다. 번번이 깨지는데 기어이 일어나서 대드는 것을 두고 이해할 수 없다는 소리를 선배들로부터 많이 들었다. 소위 ‘판덕 잃는다’고 하는데 좋은 게 좋다고, 다들 그만 두라고 했다.

그렇지만 그냥 포기했다면 경선도 우습게 됐을 것이고,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 되는 데도 심각한 장애가 발생했을 것이다. 경선 완성이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 되는 데 큰 자산이 되었다고 저는 생각한다.

-대선 직전 날 정몽준 후보가 지지철회 할 때, 노 대통령이 연설하면서 ‘차기에 정동영도 있다’는 발언을 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당시 굉장히 곤혹스러웠을 텐데, 소회를 밝혀 달라.

벌써 10년 가까이 된 이야기여서 새삼스럽다. 12월 18일 저녁 종로에서 사건이 벌어졌다. 동대문 두타상가에서 유세를 마쳤는데, 정몽준 후보가 지지철회를 선언해서 난리가 났다고 들었다. 그 순간 아득해졌다. 다된 밥에 코 빠뜨린 격이 된 것이다. 당사에서는 긴급회의가 열리고 있는데 30분을 차에서 기도하는 심정으로 있었다. 회의에 가니까 전부 고개 푹 숙이고 있더라.

그 밤을 기도하면서 뜬눈으로 지새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리했으니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넋이 빠져 있었다. 당시 속으로 ‘주님 저에게 왜 이런 짐을 지우십니까? 만일 진다면 모든 화살과 손가락질이 나에게 쏠릴 텐데, 하필 그 시간 그 자리에 있었던가’ 하는 회한도 있었다.

-대선 이후 민주당이 열린우리당으로 분당되는 과정에서 노 전 대통령은 반대했고 ‘천신정’이 주도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분당이 민주정부의 토대를 약화시킨 이유가 됐다고는 생각하지 않나?

무한책임이 저에게 있다. 열린우리당을 만드는 과정에도 앞장섰고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을 다시 합치는 과정에도 앞장섰기 때문에 정동영을 빼놓고는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 많다. 돌이켜 보면 안타까운 점도 많고 책임감도 많이 느낀다.

열린우리당이 만들어지고 과반수를 국민이 주셨는데, 핵심은 97년 외환위기 이후 본격화되고 있는 양극화 등 사회경제 문제에 대한 해답을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오진했다. 정당개혁으로 본 것이다. 정당개혁과 정치개혁은 상당히 중요하지만 무엇을 위한 정당개혁이냐는 것이다. 정당개혁을 통해 무엇을 하겠다는 전략을 갖지 못했다. 그것이 바로 10년 민주정부의 한계이기도 했다.

민주정부를 위한 변명을 한다면, 그 10년 시기는 세계화, 개방화, 자유화, 규제완화의 흐름으로 가고 있었고 그 흐름을 정면으로 거부할 수는 없었다. 그것이 우리의 한계라 하더라도 그 문제들을 끊임없이 고민했어야 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할 때 눈물을 글썽이면서 “우리가 이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힘없는 사회적 약자들이 더 많은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다”고 한 대목에서 목이 메었다. 전임 정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지만 10년을 집권하면서 위기극복 과정에서 생긴 상처까지도 치유해내는 것이 우리의 몫이었고, 그 역할을 담당했어야 할 세력이 바로 열린우리당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예컨대 한미FTA만 해도 열린우리당은 따라갔다. 그 점에 대해서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연장선상, 향후 한미FTA는 어떻게 진행되어야 한다고 보나?

FTA는 우리 정부 때 시작했으니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 FTA를 체결하고 2008년 미국에 금융위기가 왔고, 노 대통령도 자서전에서 밝혔듯이 FTA와 관련해 생각을 바꾸셨다. 쉽게 이야기하면 FTA를 통해 금융서비스 등을 ‘네거티브 리스트’로 분류해 개방해서 미국식으로 돈 장사도 해보자, 싱가폴이나 홍콩처럼 금융업 일으켜서 산업화도하고 일자리도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그런데 2008년 월가가 무너지고 보니 파생금융상품이란 것이 금융사기고 따라가서는 안 되는 것으로 인식하게 됐다. 물론 FTA를 추진했던 2005~2006년은 금융위기 이전이기 때문에 이를 꿰뚫지 못한 한계를 고백할 수밖에 없다.

덧붙이면, 지금 FTA를 반대하는 이유는 가령 한미FTA 비준 동의하고 통과시키면 복지국가와 충돌한다. 한미FTA는 수출시장을 더 확대해서 시장이 자유, 규제완화 쪽으로 더 나아가는 것이다. 반면, 복지국가는 시장의 힘보다는 국가의 힘을 키우는 것이고 국가의 개입과 복지에 대한 투자 등 국가정책이 중요하다.

그런데 FTA는 브레이크를 거는 것이다. 한미FTA를 통해 시장국가로 가느냐 복지국가로 가느냐 이 두 가지 선택에서 참여정부 시절 우리가 FTA를 선택한 것은 이른바 ‘개방형 통상국가’를 비전으로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8년 미국 금융위기가 모든 것을 분명하게 했다. 그렇게 갈 것이냐, 그것이 대안이 아니라면 무엇이냐. 그렇기 때문에 FTA를 반대한 것이고 그 점에서 반성문을 쓴 것이다.

-개성공단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동영 최고위원 기획 하에서 이루어졌다는 자료를 접했다. 사실인가?

제가 아니었다면 시간이 더 걸렸을 것이다. 당시 핵심은 미국의 입장이 부정적이었다는 것이다. 2002년 말 우라늄 의혹 제기로부터 불거진 북핵 위기로 인해 미국은 6자회담 틀이 제대로 가동되기 전에, 다시 말해 북핵문제가 6자회담을 통해 해결의 전망이 설 때까지 북한에 가서 공장을 짓는 것은 난센스라는 주장이 강했다.

노 대통령 역시 ‘서둘러서 할 필요 없다’면서 속도조절론에 찬성하고 있었다. 가령 통일부장관이 관료 출신 장관이었다거나 개성공단에 대해 신념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대통령이 속도조절하자고 하고 미국이 반대하는데 그것을 뚫고 해내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개성공단 건립 속도와 관련해 노 대통령과 몇 번 의견충돌이 있었다. 노 대통령이 제기한 것은 ‘너무 가속페달 밟는 것 아니냐, 착수는 했지만 제대로 주변 살펴가면서 차근차근하자’는 것이었다. 이유는 남북관계가 불안정한 구조인데 만의 하나 남북관계가 악화됐을 경우 인질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으니 그에 대한 대비책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저는 강하게 반론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지금 밀어붙여야 한다”고 했다. 개성공단이 콩알만 하다면 나쁜 상황이 왔을 때 그냥 날아가 버릴 수 있지만, 집채만큼 키워놓는다면 어떤 상황이 와도 막을 수 있다. “햇볕 내리쬐고 있을 때 부지런히 가야 한다”고 제가 강하게 반론했고 노 대통령은 설득이 안 되니까 역정 내면서 ‘책임지시오, 알아서 하시오!’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속도를 냈기 때문에 바윗덩어리처럼 될 수 있었고 개성공단이 4만5천명 인력을 통해 121개 공장이 돌아가서 천안함, 연평도 사태 이후에도 날아가지 않았다. 남에서 북으로 가는 통로가 유일하게 어디에 열려 있나? 아침에 개성 가는 출근로만 열려 있다. 조금 더 갔어야 했는데 아쉽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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