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기 어려운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대북사업의 선구자였던 현대아산의 정몽헌 회장이 끝내 투신자살함으로써 비운의 생을 마감하고 만 것이다. 이런 일이 터지면 남북관계를 전공하는 연구자는 정회장 죽음 이후 남북경협과 남북관계를 전망하는 데 시간을 할애해야 할 일이지만 이번 만큼은 그럴 기분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누가, 무엇이, 우리 사회의 어떤 현실이 대북사업을 정력적으로 추진했던 한 기업가를 죽음으로까지 몰아갔는지 되씹어 봐야 할 것 같다.




정회장의 자살 원인을 놓고 의견이 분분하지만 아마도 필생의 과업으로 추진했던 현대의 대북경협사업이 우리 사회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자괴감과 상실감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공과가 있긴 하지만 현대는 과거부터 국가경제의 미래와 민족의 비전을 생각하면서 사업방향을 잡아가고 이를 한발 앞서서 준비하는 독특한 모습을 보여왔다. 현대그룹이 경부고속도로 건설부터 시작해서 중동 건설 붐, 자동차 산업과 조선산업 시작 등 아무도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대한민국 경제발전을 위해 누군가가 해야 했던 분야를 스스로 개척하면서 회사의 명운을 걸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를 통해 대한민국 대표기업으로 자리잡게 된 현대는 1980년대 후반부터 새로운 사업방향을 모색하게 되는 바, 그것이 바로 북한과의 대규모 경협사업이었다. 현대의 대북사업은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고향을 향한 수구초심과 함께 남북화해 시대 민족의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소명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물론 거기에는 초기 투자비용이 든다 하더라도 결국은 21세기의 한반도가 민족의 대결이 아닌 평화와 화해협력의 대세로 결정날 것인 만큼 미리 준비하면 경제적으로도 큰 이익을 낼 수 있으리라는 손익계산도 작용했다. 정몽헌 회장이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던 '현대의 미래이자 아버지 평생의 꿈'이 바로 대북사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대북사업은 최근에 와서 위기에 봉착하고 말았다. 민족의 화해와 통일에 밑거름이 된다는 역사의식을 갖고 출발한 것이었지만 금강산 관광사업의 적자지속과 개성공단 사업의 지지부진으로 인해 기업의 재정상태는 최악으로 빠져들었다. 설상가상으로 대북송금 의혹이 불거지면서 금년에는 특검의 수사까지 진행되었고 그 결과 정몽헌 회장은 실정법을 어긴 범죄자로 낙인찍힌 채 검찰에 의해 기소까지 되었다.




아직도 논란거리로 남아있는 남북정상회담의 대가성과 대북송금의 불법성 여부를 이유로 정몽헌 회장의 대북경협사업 전체가 부정과 비리에 의해 저질러진 파렴치한 범법행위로 매도되는 현실에는 분명 이를 부채질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챙기려는 일부세력들의 의도가 개입되어 있다. 대북사업은 당연히 남북관계의 개선과 민족의 화해를 전제조건으로 할 수밖에 없는 특수사업이다. 그리고 현대가 추진했던 금강산과 개성공단 사업은 적대와 대결의 역사를 뒤로 하고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진전시킨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민족화해를 반대하고 남북관계 개선을 못마땅해 하는 우리 사회 일각의 냉전색안경은 현대의 대북사업을 '일방적 퍼주기'나 '김정일 정권 연장책'으로 폄하하는 데 익숙했다. 특히 햇볕정책과 남북정상회담을 비난하는 데 열심이었던 특정 정치세력과 일부언론은 그 비판의 예봉을 확대하기 위해 현대의 대북사업을 도매급으로 욕하고 나섰다.




분단의 멍에를 벗고 통일의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현대의 대북사업이 정당한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하고 오히려 민족대결세력과 이를 정치적으로 악용하려는 일부진영에 의해 매도당하는 현실은 정회장이 견디기 힘든 보이지 않는 벽이었다. 금강산 육로관광이 실현되는 날 회한의 눈물을 보이고 어려울 때마다 선친의 묘소에서 눈물을 흘리곤 했던 정몽헌 회장이 끝내 자신의 뜻을 펴지 못하고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은 아직도 우리 사회에 냉전과 분단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음을 입증한 비극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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