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모습을 가리켜 선문답(禪問答)이라 하던가.

열린우리당에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비판과 청와대 쇄신 요구가 터져나온 이후, 세간의 관심은 노 대통령의 반응으로 향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반응은 매우 간결했다. "당이 정치의 중심이 돼서 가야 한다". "잘 된 일이라 할 수 없지만 흔히 있던 일이고, 흔히 있는 일이다."

쉽게 말하면 대단한 일이 아니고, 당이 알아서 하면 되는 일이라는 이야기로 받아들여진다. 여당에서 터져나온 대통령 책임론이나 청와대 쇄신론에 대해서는 일언반구(一言半句) 말이 없다. 자칫 다른 생각을 말하면 당(黨)-청(靑)간의 갈등으로 비화되는 것을 염려한 신중함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여당에서 터져나온 목소리들을 대수롭지 않은 문제로 여기는 듯한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노 대통령은 출입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내년초에 미래국정구상을 발표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대통령은 이제 당의 문제에 휘말리거나 개입하지 않고 미래사회 대비에만 전념하겠다는 의미일지 모른다.

그러나 지난 토요일 여권 수뇌부 회동과 일요일 간담회에서 보여준 노 대통령의 모습을 보면, 작금의 열린우리당 사태에 대해 오불관언(吾不關焉)하겠다는 것으로 비쳐진다.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제기한 대통령 책임론이나 청와대 쇄신론에 대해서는 아예 무시하는 듯한 분위기가 깔려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의 혼돈이 과연 노 대통령과는 상관없는 일이었을까. 열린우리당 자신의 무능함과 무기력함도 여당의 위기를 낳은 주요 원인이었지만, 노 대통령도 여당을 무기력한 존재로 전락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여당과는 아무런 상의도 없이 대연정이라는 정치적 화두를 던지며 논란을 증폭시켰던 것도, 결과적으로 여당을 주변적 존재로 전락시켰던 것도 노 대통령 자신이었다. '당'이 아니라 '청와대'가 정치의 중심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러다가 이제 여당에서 청와대를 향한 항변들이 터져나오니까, 당(黨)의 일은 당에서 알라서 하라는 식으로 나오는 모습에서, 지극히 편의적인 당정분리 인식을 읽게된다.

우리 정치문화에서 여당의 인기는 대통령의 인기에 종속되게 되어있다. 노 대통령도 "재선거 결과는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대한 평가"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 말이 빈말이라는 느낌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대한 평가가 '완패'로 나타났음에도, 청와대는 아무런 쇄신의 필요성을 느끼지않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여당 내에서는 청와대 쇄신론이 터져나왔지만, 정작 청와대에서는 대통령의 국정운영 방식을 바꾸려는, 혹은 자기쇄신을 하려는 어떤 구체적인 의지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열린우리당의 사태는 어디까지나 그들의 문제일 뿐이지, 청와대와는 무관한 문제로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여당 내부에서 제기된 비판들이야 그렇게 무시한다 하더라도, 국민들에게라도 청와대 나름대로의 선거결과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같은 것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선거는 여당이 치른 것이지 청와대가 치른 것이 아니라는 형식논리를 받아들일 사람이 얼마나 될까.

집권여당이 청와대를 향해 사실상의 반란을 거행한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민심을 잃고 있는 청와대가 여당의 마음조차 잃고있다는 현실이 드러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눈앞에 두고 '흔히 있는 일'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간다면 그 둔감증이 불러올 향후의 상황들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청와대는 작금의 상황을 좀더 엄중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유시민 의원이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여당 144명 가운데 대통령을 인간적으로 존경하는 의원은 몇 명이겠는지 살펴봤더니, 그 수가 원내 교섭단체가 되기도 어려울 것이다”라고 말이다. 유 의원이야 그런 여당을 개탄하며 꺼낸 말이겠지만, 듣는 사람들의 느낌은 단순하지가 않다. 어떻게 하다가 다른 사람들도 아닌 여당 의원들로부터 그런 시선을 받게되었을까. 노 대통령은 지금의 상황을 훨씬 무겁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아닐까.

여당의 쇄신 움직임을 강건너 불구경하는 식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청와대 또한 자기쇄신이 있어야 함을 느껴야 한다. 완패의 선거결과가 청와대와는 무관하다고 누가 생각하겠는가.

정동영 장관이 며칠전 광주에 갔다가 지역인사들에게서 쓴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참회해야 한다", "무능을 고백해야 한다",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겸손해야 한다"..... 고언을 가슴에 새기고 있다며 그가 전한 말을 청와대도 귀담아 들어야 한다. 여권이 더 큰 위기를 막을 수 있는 길은 그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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