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12일 일본의 <아사히신문>은 남북의 고위당국자들이 8월 중순 비밀접촉을 가졌다고 보도하였다.

이 보도에 따르면, 남은 북에 천안함 사과와 비핵화를 위한 구체적 조처를 요구했고, 북은 남에 햇볕정책으로의 복귀를 요구했다고 한다. 그리고 아사히는 이같은 요구사항을 둘러싸고 “양측 간에 큰 진전은 없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 뒤 대한적십자사가 북측에 수해 지원 의사를 표시했고, 북측은 한국측에 쌀 지원을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청와대와 통일부는 이러한 보도에 대해 ‘소설같은 이야기이며 터무니없다’면서 즉각 부인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부인에도 불구하고, 많은 전문가들과 언론, 특히 <동아일보>와 같은 보수적인 언론조차도 남북의 비밀접촉에 대해 개연성이 높다고 보도하고 있다. 이들은 심지어 북한의 일련의 제안들, 수해지원 요청, 쌀 지원 요청, 이산가족 상봉 제안, 군사접촉 제안 등이 남북 사이의 사전교감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상대 의중 읽기’가 없다면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포스트 천안함 국면의 모색

이와 같이 정부의 강력한 부인에도 불구하고 비밀접촉설이 심상치 않아 보이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한반도를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움직임이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북한 방문과 그 방문 기간중 급작스럽게 이루어진 김정일 위원장의 중국방문, 그리고 그를 전후하여 이루어진 우다웨이의 북한, 한국, 미국 방문과 보스워스 미 대북정책 특별대표의 한국, 일본, 중국 순방 등은 한반도를 둘러싼 새로운 국면의 변화가 전개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움직임들이다. 이러한 움직임의 기본 방향은 ‘천안함 국면에서 6자회담 국면으로 어떻게 넘어갈 것인가’라고 말할 수 있다.

이 흐름들은 일단 두 개의 해법 제시로 모아진다. 하나는 중국이 제시한 3단계 해법이다. 중국은 천안함 출구 전략의 필요성과 6자회담의 조속한 재개를 위해 ‘북미접촉→6자 예비회담→6자 본회담’의 3단계 방안을 제시했고, 북한도 이 방안에 동의했다면서 한국과 미국의 설득에 나섰다.

이에 대해 한국과 미국은 일단 북한이 천안함 사태와 관련한 ‘책임있는 행동’이나 비핵화와 관련된 구체적인 조치 없이 6자회담 재개에 동의하기 어렵다는 부정적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언술과 별개로 한국과 미국은 남북간 접촉을 비롯해 다양한 형태의 양자와 다자접촉을 거쳐 6자회담으로 가야한다는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즉 남북접촉→3자 혹은 4자 등의 다자접촉→6자회담의 프로세스이다.

그런데 이 프로세스는 사실 형식적인 측면에서만 보면, 북미접촉부터 시작하던 중국의 3단계 방안을 출발점만 남북대화로 바꾸어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형식적으로는 ‘북미접촉에서 6자회담으로’라는 안과 ‘남북접촉에서 6자회담으로’라는 두 안이 대립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어떤 식으로든 천안함 사건을 해결하고 다양한 다자접촉을 거쳐 6자회담으로 복귀하자는 취지는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결국 천안함 사건 이후의 남북관계 경색을 해소하는 것인데, 중국은 당장 남북관계를 바꾸기 어렵다고 보고 6자회담 프로세스를 통해 남북관계의 자연스러운 변화를 유도하려는 입장인 반면, 미국은 남북 간 접촉을 통해 천안함 사건을 어떻게든 마무리 짓고 6자회담국면으로 전환하려는 입장인 것이다.

남북화해를 권유하는 미국의 속내

이 지점에서 미국은 입장은 사실 좀 미묘하다. 천안함 사건 이후 미국은 ‘동맹의 중시’라는 입장과 ‘핵무기 확산 저지’라는 투 트랙(two track)을 동시에 추구해왔다.

그것은 한미합동군사훈련을 통한 압박과 독자적인 대북 금융제재를 통해 동맹국인 한국을 지지하는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대량살상무기 확산을 막기 위한 군사·외교적 노력에 힘을 집중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천안함사건 직후에도 북한에 대해 도발 행위 중단을 요구하면서, 한편으로는 “비핵화 의무를 이행하는 조치를 즉시 취하고 국제법을 준수하라”는 대량살상무기와 관련된 미국 본심의 요구를 빼놓지 않았다.

천안함 사건 발발 이후 6개월이 지난 지금 미국의 입장은 더욱 분명해지고 있다. 즉 동맹을 중시하지만, 동시에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를 위한 군사·외교적 자원을 분산시키고 싶지도 않다는 것이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남북이 만나) 천안함 국면을 최대한 조속히 종결짓고 대량살상무기 방지에 초점을 두는 국면으로 넘어가고 싶은 것이다.

커트 캠벨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가 최근 “진전이 있기 위해서는 남북한 사이에 모종의 화해 조치가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공개적으로 언급한 것도 이런 미국의 의중을 반영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더구나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오바마 정부가 지금은 자국 내 비판여론을 피해가기 위해 동맹 중시와 대북압박기조를 유지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분위기가 바뀔 가능성도 있다.

미국이 대북 추가 금융제재 수단으로 강력한 법률 제정 대신 비교적 탄력적인 행정명령을 선택한 것도 언제든지 ‘퇴각할’ 수 있는 길을 열어둔 것을 의미한다. 어쩌면 중간선거 이후 오바마 정부는 핵 확산 방지 등을 위해 평양과 직접 대화에 나설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동맹에 목을 걸고 있는 이명박 정부로서는 미국이 이런 방향으로 움직일 경우, 홀로 반대만 할 수도 없는 입장이다.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에 대해 한국정부가 반대 입장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오바마 정부가 방북 일정을 단축하면서까지 이를 강행한 것은 이런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만약 미국의 행보를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북한 내부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올 수 있다’는 이명박 정부의 입장에 계속 맞추게 하려면, 이명박 정부로서는 향후 한중간 갈등 확대는 물론이고 한미 FTA 재협상론이나 이란 경제제재 확대 등 ‘동맹의 대가’를 매우 비싸게 치를 각오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수면으로 떠오른 포스트 천안함 국면

결국 이명박 정부는, 국민의 60%가 정부의 대북정책에 불만이라는 여론조사 결과에서 보듯이, 대북강경책을 고수하는데 따른 국민적 부담은 물론이고, 한반도를 둘러싸고 전개되는 외교환경 속에서도 대북강경책의 전략적 한계를 인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더구나 정부 여당 내부에서 ‘남북관계의 안정 없이는 정권 재창출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가진 대북 협상파들의 압력도 점점 확대될 것이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G20회의와 미국 중간선거가 끝나는 올 11월 이후 한반도 정세는 다시 한번 변화할 가능성이 크다.

현재 한반도 정세는 이명박 정부의 ‘천안함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대북 응징론과 그에 따른 남북관계 경색으로 인해 비핵화와 6자회담, 한반도 평화체제와 동북아 안보협력의 출구가 봉쇄되어 있는 상황이고, 이에 따라 미중 간의 갈등도 더욱 첨예화되고 있는 형국이다. 이 지점에서 이명박 정부의 행보는 결국 ‘천안함 사건과 관련하여 현실적으로 북에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 모아진다.

그러나 이미 유엔 안보리 성명에서 천안함 사건에 대한 북한의 책임문제가 애매하게 처리된 조건에서, 북한이 천안함 사건에 대한 책임을 인정할 가능성도 없고 중국이 이를 인정할 가능성도 없다. 이명박 정부로서는 천안함과 관련하여 사실상 출구가 없는 셈이고, 계속 ‘응징’의 입장을 유지하기 어려을 것이다.

따라서 “이명박 대통령이 당초 천안함 사건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할 것을 북한에 요구했지만 지금은 애도를 표시하는 수준으로 물러선 것으로 보인다”는 <워싱턴 포스트>지의 보도에 대해 이명박 정부가 NCND(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은 천안함에 대한 ‘현실적 수준으로의 입장 변화’를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정도의 미봉이라면 천안함 사건에 대한 남북 사이의 타협은 얼마든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남북간 비밀접촉이 사실이든 아니든, 천안함에 대한 적절한 미봉과 포스트 천안함 국면으로의 전환을 둘러싼 남북 사이의 힘겨루기는 이미 물밑을 벗어나 수면으로 떠 올라와 있다고 판단된다.

특히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이산가족 상봉과 금강산관광을 둘러싼 남북 사이의 협상과정은 결국 포스트 천안함 국면에서 상봉의 정례화와 보다 성과있는 고위급 접촉(정상회담을 포함하여) 가능성을 확인하려는 이명박 정부의 입장과 금강산관광 재개와 과거 남북관계로의 복귀 가능성을 타진하려는 북한의 입장이 교차하는 상황으로 볼 수 있다.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협상이 지속되고 있는 것은 좋은 신호이다. 만약 이 협상이 끝내 무산된다면 포스트 천안함 국면으로의 진입은 그만큼 더 늦어질 것이다.

이승환(민족화해범국민협의회(민화협) 집행위원장/폴리뉴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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