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환 민화협 집행위원장

이명박 정부가 등장하게 된 배경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아마 남북관계도 중요한 이유의 하나였을 것이다.

이들은 지난 정부 시절의 남북관계에 대해, 특히 ‘북한에 대한 퍼주기’와 ‘대북 저자세’를 문제로 삼았다. 북에 열심히 퍼다 줬지만 실제 북한 주민의 삶은 하나도 개선되지 않았고, 오히려 북한 핵무기 만드는 것만 도와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북한에 그렇게 퍼주면서도 북한으로부터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듣지 못했고 늘 저자세로 북한에 질질 끌려가기만 했다면서, 이제 이런 식의 남북관계는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의 이런 인식이 얼마나 실제 현실에 부합하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이명박 정부의 논리는 남북관계의 일방성에 답답해하던 많은 국민들에게 ‘통했고’ 이 정부의 성립에 적지 않게 기여하였다.

룰인가 게임인가

그런데 이명박 정부의 출범 이후 상황은 매우 ‘이상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애초에 이명박 정부가 내건 것은 남북관계 운영의 ‘룰’을 바꾸겠다는 의미로 읽혔다. 일방성과 저자세가 아니라 상호주의에 좀 더 근접한 남북관계의 ‘룰’을 새롭게 정립하겠다는 의미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의 정식 출범도 전에 ‘대북 핵 선제공격설’ 비슷한 발언이 나오더니, 이어서 김정일 건강이상과 북한 급변사태설에 이어 ‘개념계획 5029의 작전계획으로의 전환’이 논의되고*, 드디어는 올해 8.15경축사를 통해 이 정부의 구상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5029는 북한 유사시를 대비한 계획이며, 이는 구체적인 작전계획이 아니라 개념계획의 수준에서 정리되어 있는 것이었다. 이것을 작전계획으로 바꾸는 것은 북한 유사시 점령계획을 공식화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올해 8.15경축사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분단관리를 넘어 통일을 목표로’라는 표현으로 북한 급변사태와 그에 따른 ‘(흡수)통일에 대한 확신’을 언급하였고, 그러한 프로세스와 재정적 준비를 위해 ‘3단계 통일계획’과 ‘통일세’를 제시하였다.

8.15경축사에 나타난 이명박 정부의 이러한 구상은 88년 노태우 정부의 7.7선언 이래 남북관계의 근간을 이루던 ‘포용정책’을 폐기하고, 사실상 대북압박과 흡수통일을 불사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촉구한 것이었다. 8.15경축사 이후 흡수통일론이라는 논란이 일자, 통일부는 경축사가 흡수통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부정하였지만, 이는 ‘진정한 부정’으로 받아들여지기보다는 이 정부가 들어선 이후 보여주던 전형적인 ‘치고 빠지기’식 패턴으로 이해되었다.

따라서 그간의 이명박 정부의 전반적인 남북관계 구상은, 맞다 아니다 하는 혼선을 거듭하면서도 그 기본방향은, 남북관계 운영의 룰을 바꾸겠다는 것이 아니라, 남북관계를 ‘먹고 먹히는’ 새로운 게임,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만드는 쪽으로 전반적으로 이동해왔다고 보인다. 이는 룰을 바꾸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문제이다. 이는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말을 듣지 않으면 우리가 흡수통일에 나서겠다’고 선언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언술의 이면에는 ‘북한의 위기와 급변사태’에 대한 희망적 예측이 자리잡고 있다.

북한위기론은 얼마나 현실적인가

북한위기론이 우리 사회에서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것은 물론 계속되고 있는 북한의 경제위기 때문이지만, 이명박 정부 들어와 특히 급변사태론이 확산되고 있는 이유는 김정일 건강이상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김정일 건강이상이 북한 정치질서의 혼란을 가져올 것이라는 희망 섞인 기대는(wishful thinking) 애초부터 북한의 정치사회시스템을 과소평가하여 김정일 사망 등이 북한체제의 혼란과 붕괴를 가져올 것이라고 믿는 ‘전제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 대부분의 학자들의 공통된 입장이다.

따라서 북한위기론은 이명박 정부의 남북관계 패러다임(게임) 전환을 위한 강력한 논리적 근거를 제공하고 있지만, 그 자체가 현실적 담론은 아니며 실제 정책으로 추진되는 플랜A의 추진논거가 되기는 어렵다.

현실 근거가 없는 담론이 정책화되면서 나타나는 문제는 예상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천안함 사건으로 상징되는 오늘의 남북관계 위기가 이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문제는 남북관계의 위기도 심각하지만, 현재의 남북관계 운영방식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이 상상 이상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점이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실시한 ‘남북경협에 대한 기업 인식 조사’(9월 8일 발표)에 따르면, 이명박 정부 하에서 남북경협기업의 66.5%가 ‘경영난’을 겪을 정도로 심각한 피해를 입고 있다고 답했으며, 기업당 평균 피해 액수가 9억 7천 4백만 원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천안함 사건에 대한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소의 국민의식 조사 결과는 더 심각하다. 천안함 사건에 대한 정부의 조사결과 발표에 대해 신뢰한다는 응답은 32.5%에 불과하고, 신뢰하지 않거나(35.7%) 혹은 반반이라는(31.7%) 답변이 거의 70% 가까이 되고 있다. 또 천안함 사건이 우리 정부의 대북정책에도 원인이 있다는 문항에 대해서는 국민의 54.6%가 동의하고 있으며, 동의하지 않는다는 답변은 17.3%에 불과하고, 반반이라는 응답이 28%로 나타났다. 반반이라는 응답도 정부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 의견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 국민의 83% 정도가 천안함 사건이 우리 정부의 잘못된 대북정책에 원인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부는, 좋게 말해서 여전히 ‘원칙적’이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변화를 보이면 남북관계를 발전시키겠다는 ‘비핵개방3000’의 원칙은 천안함 사건 이후 ‘사과와 재발 방지’라는 전제조건이 하나 더 붙었다. 즉 천안함 사건 사과와 핵 포기라는 이중의 전제가 있어야 남북관계를 추진한다는 것이고,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5.24 대북관계 단절조치의 선포였다. 이러한 이중의 전제는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을 꽁꽁 옥죄고 있다. 말하자면 이중으로 스스로를 결박한 꼴이다.

자승자박의 상황에서 벗어나야

정부는 이제 첫 지점에서 문제를 다시 검토해야 할 상황에 있다. 우리의 대북정책 목표가 무엇인지, 운영의 룰을 바꿀 것인지 아니면 게임을 바꿀 것인지를 분명히 해야 할 상황이다. 즉 한반도의 지속적 평화와 그를 통한 남한 경제의 지속적 발전 및 북한의 점진적 발전과 변화인지, 아니면 계속적인 압박을 통해 북한의 위기를 현실화시키는 기회를 노릴 것인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이명박 정부는 지금이라도 남북관계 운영 ‘룰’의 변화도 아니고 아예 게임 자체를 바꾸겠다는 비현실적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 게임을 바꾸려는 집착에서 벗어나는 길은 매우 간단하다. 남북관계를 지속하면서, 협상을 통해 ‘운영 룰’에 대해 협의하면 되는 것이다.

앞서 제시한 서울대 통일의식 조사에 비추어보면, 정부의 5.24 대북관계 단절조치는 그야말로 썰렁한 농담이 아닐 수 없다. 천안함 사건은 반드시 진실이 밝혀져야 하지만(정부 주장대로 북한의 어뢰공격이 원인이라면 북한의 사과와 책임을 묻는 문제도 결국은 진실공방의 일환이다), 이제는 남북관계 발전과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조처들과 병행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최근 북한은 신의주 수재와 추석을 계기로 쌀지원 요청과 이산가족 상봉 실현 등 일련의 대남협상을 제안해오고 있다. 이에 대해 정부는 이산가족 상봉 제안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겠다면서도, 북의 통지문을 사흘이나 지나서 마지못해 공개하는 등 소극적 태도로 일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수해지원에 대해서도 애초에 예상하던 쌀 1만 톤 지원에도 못 미치는 5,000톤 정도 지원의 입장이다. 쌀 대북지원 문제는 올해 예상되는 남한에서의 쌀값 대란을 해결하기 위한 가장 경제적 방법이며, 또한 수해 등으로 고통받고 있는 북한 주민에 대한 인도적 지원의 가장 효율적인 방안이기도 하다.

농민단체들의 주장에 따르면, 약 50만 톤 정도의 쌀지원이 이루어져야 쌀값 안정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부는 스스로 설정한 이중의 구속에 얽매여(천안함 사과와 북핵문제 해결 전제조건) 대규모 쌀 지원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우리 농민도 도탄에 빠트리고 북한 주민에 대한 인도지원도 외면하면서 추진하는 대북정책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게다가 뒤로는 비밀접촉을 하면서 겉으로는 원칙을 내세우는 그 ‘이중성’까지 국민에게 이해를 요구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게임을 바꾸어보려는 이명박 정부의 시도가 북한체제의 경직성만 강화시키고 남북의 적대적 공생구조를 강화시켜, 결국 북한 주민의 삶을 악화시키고 또 남한에 대한 적대의식만 확대할 것이라는 지적은, 상투적이지만 틀리지 않다. 또한 진상에 대한 국민적 동의가 이루어지기도 전에 이명박 정부에 의해 성급하게 국제정치화 되어버린 천안함 사건은, 그 ‘국제정치화’로 인해 당장 긴급한 진상규명은 이미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천안함에 억매여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자승자박 상태를 지속하는 것은 결코 현명한 태도라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올해 추석의 기회를 정부는 남북관계 전환의 기회로 잘 살려야 한다. 정부는 줄 것은 제대로 주고 북한 주민의 마음을 어루만지면서, 이 기회를 통해 남북대화를 정례화하고 그 속에서 운영 룰을 협의하고 타협해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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