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권의 기존 판례 뒤집은 미국 연방대법원의 판결

미국 연방대법원은 얼마 전인 6월 24일 낙태와 관련해서 1973년의 판례를 뒤집어 낙태가 헌법적 권리는 아니라는 판결을 내놓음으로써 폭발적 이슈에 불을 붙이는 사태를 낳았다. 이로써 낙태권 옹호자들이 대법원 청사와 의회 의사당 앞에서 연일 판결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고, 이에 뒤질세라 낙태권 비판론자들도 적극적으로 맞대응하였다. 향후 관련 사안이나 정치적 계절이 돌아오면 양 집단은 빈번하게 충돌을 빚음으로써 사회적 갈등을 첨예화할 것으로 예측된다.

이 사태가 남의 일로만 치부될 수 없는데, 그 연유는 우리에게도 동일 사안이 잠재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헌법재판소는 2019년에 낙태를 죄로 처벌하던 기존 형법이 헌법에 불합치한다는 판결을 내리면서 2020년 말까지 개정할 것을 명시하였다. 그런데 여야 정치권이 민감한 사안이라는 이유로 개정안 내놓기를 주저하면서 기한이 지난 폐기로 귀결되었고, 결국 처벌 조항이 사라짐으로써 낙태가 버젓이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에게도 낙태 문제가 언제든 수면 위로 부상하여 논란의 쟁점이 될 것이기 때문에 갈등의 첨예화보다는 이를 위축시킬 수 있도록 지혜를 모을 필요가 있다.

시민단체 세계시민선언 이설아 대표가 28일 오전 서울 종로구 주한 미국대사관 앞에서 미국 연방 대법원이 낙태 합법화를 골자로 한 이른바 '로 대(對) 웨이드' 판결을 공식 폐기한 것을 반대하는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2022.6.28 연합
▲ 시민단체 세계시민선언 이설아 대표가 28일 오전 서울 종로구 주한 미국대사관 앞에서 미국 연방 대법원이 낙태 합법화를 골자로 한 이른바 '로 대(對) 웨이드' 판결을 공식 폐기한 것을 반대하는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2022.6.28 연합

미국 연방대법원의 판결과 프라이버시권, 그리고 낙태

이번 낙태권 사태의 시발은 미국 연방대법원이 반세기 전인 1973년에 ‘로 대 웨이드(Roe v. Wade)’ 사건을 통해 텍사스주의 낙태금지법이 위헌이라고 결정한 데서 비롯된다. 당시 텍사스주는 생명이 수태 순간부터 시작된다는 견해를 수용하여 낙태를 죄로 단정하고 있었다. 이에 당시 대법원은 주 정부가 찬반이 엇갈리는 쟁점 현안, 즉 생명이 언제 시작되는지에 대해 합의에 이르지 못하는 만큼 이에 중립(neutrality)을 지켜야 함을 환기시키면서 “텍사스 주가 생명에 관한 하나의 특정한 이론을 채택해 임신한 여성의 권리를 유린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고 밝히고, 동시에 수정헌법 제14조에 명시되어 있는 자유 개념에 비추어 “이 프라이버시권은 임신을 종결지을 것인지에 대한 여성의 결정도 포괄할 수 있을 만큼 광범위한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처음에 프라이버시권은 개인이 공적인 국가 권력의 감시나 간섭으로부터 자유롭도록 사생활을 보호하는 것이었는데, 어느 순간 각 개인이 취하는 선택의 자유와 이에 상응하는 권리를 존중하고 보호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하버드대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 Michael Sandel은 바로 이와 같은 가치 판단의 전환이 미국 사회에서 자유주의의 득세로 인해 초래되었음을 비판적으로 밝히고 있다. 로 대 웨이드 사건의 대법원 판결에서 보듯이 헌법에 명시된 자유에 대한 권리가 프라이버시권을 포함하고, 그 프라이버시권은 여성 개인의 임신 종결의 결정 권한으로까지 확장된 것이다.

여성이 임신한 상태에서 이를 중단하려고 할 경우, 가능한 한 도덕과 거리를 두려는 심리를 반영할 때 임신종결(또는 중단)이라는 중립적 용어를 사용하게 되는 반면, 이와 달리 도덕적 판단을 내릴 경우에 태아를 탈락시킨다거나 죽인다는 의미의 낙태라는 표현을 쓰게 된다. 1973년의 대법원은 여성이 임신을 종결할 수 있음을, 또 달리 말해서 여성이 임신중단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갖고 있음을 승인한 것이다.

그러나 사태는 반세기 지나 반전을 맞이하게 되었다. 즉 2022년 6월24일에 연방대법원은 헌법이 여성의 낙태권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 반전이 과연 바른 것인지 아니면 역행인지 따져 보아야 할 상황이 된 것이다. 과연 우리는 여성이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특정 변화, 즉 임신을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중단할 것인지 선택하여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주장에 동의할 수 있는지 성찰하지 않을 수 없고, 이와 관련해서 반세기 사이에 왜 법적 최고 기관인 대법원에서 반전의 결정을 내린 것인지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strong></div>'대법원은 수치다' 규탄 시위 벌이는 미 낙태 옹호론자_</strong> 미국 연방대법원의 낙태권 보장 판례 폐기 결정 다음 날인 25일(현지시간) 인디애나주 인디애나폴리스의 주의회 의사당 앞에서 낙태권 옹호론자들이 '대법원(scotus)은 수치다'라고 적힌 피켓 등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전날 임신 6개월 이전까지 여성의 낙태를 헌법상 권리로 인정한 1973년 '로 대(對) 웨이드' 판결을 공식 폐기했다. 2022.6.26 연합
'대법원은 수치다' 규탄 시위 벌이는 미 낙태 옹호론자_ 미국 연방대법원의 낙태권 보장 판례 폐기 결정 다음 날인 25일(현지시간) 인디애나주 인디애나폴리스의 주의회 의사당 앞에서 낙태권 옹호론자들이 '대법원(scotus)은 수치다'라고 적힌 피켓 등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전날 임신 6개월 이전까지 여성의 낙태를 헌법상 권리로 인정한 1973년 '로 대(對) 웨이드' 판결을 공식 폐기했다. 2022.6.26 연합

미국 초기의 대세는 공화주의

미국은 1776년에 독립을 선언하였고, 뒤이어 1787년에 연방헌법을 제정하였다. 당시 헌법의 아버지로 불리는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은 건국의 아버지들의 하나인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등과 의논하면서 고대 그리스와 로마를 거쳐 중세와 근대에 이르기까지 제반 정치제도를 연구하면서 미국에 가장 합당하다고 여겨지는 사조로 공화주의(republicanism)를 채택하였다.

매디슨은 연방주의자 교설The Federalist Papers 10편에서 밝히고 있듯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온 시민들이 공적인 의사결정 과정에서 끼리끼리 모이는 파벌(결국 정파)을 결성하게 되는데, 자유(liberty)에서 유래하는 파벌이 사회에 해를 끼칠 수 있다고 해서 이를 원천적으로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파벌의 폐해를 최소화하면서 공익에 기여할 수 있는 제도를 짜게 된다. 그래서 연방주의자 교설 57편에서 언급하고 있는 데, 정치체제의 목표로서 사회의 공동선(common good)이 무엇인지 판단하고, 이를 추구할 지혜와 덕성을 갖춘 사람들이 최고 지도자로 부상할 수 있도록 체제를 정비한다. 결국 기초의 주들(states)을 단위로 연맹을 결성하고, 정의를 확립하고, 평화를 보장하며, 자유의 축복을 누리고자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가운데 공익과 그 너머의 공동선을 도모한다.

하지만 연방헌법은 주를 기초로 연방의 정부를 운영하는 제도를 구비하는 데 초점을 맞춘 나머지 개인의 권리 보호를 담고 있지 못했다. 이에 1791년에 권리장전이라고 불리는 수정헌법 10개 조가 채택되어, 연방정부에 의해 시민 개인의 권리가 침해되지 않도록 추가된다. 수정헌법 제5조는 “누구라도 정당한 법의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생명, 자유 또는 재산을 박탈당하지 아니한다.”고 명시하였다. 물론 매디슨은 처음부터 개인의 권리가 연방은 물론 각 주들로부터도 침해당하지 않는 법적 명문화를 주장하였는데, 일단 그 반쪽만 시행되었다. 그리고 세월이 훌쩍 지나 1868년이 되어서야 수정헌법 제14조의 발효로 주들 역시 함부로 개인의 권리를 침해할 수 없도록 하는 조항이 채택되기에 이른다.

초기의 미국 사회는 공화주의가 대세였다. 건국 초기 연방주의자와 반연방주의자가 대립하다가 곧바로 제퍼슨과 매디슨 등이 민주공화당이란 정당의 기치를 들면서 주류를 형성하였고, 이것은 잭슨 민주주의가 떠오르면서 간단하게 민주당으로 좁혀진다. 이즈음 휘그당이 출현하지만, 이후 노예제 문제에 대한 이견으로 민주공화당 내 공화파였던 인물들의 주도로 공화당이 창당되자 이에 흡수되고, 이로써 양당 체제가 조성된다. 공화주의는 헌법의 마련과 그에 따른 정치제도를 짜는 데 근간이 되었고, 민주당은 민주적 공화주의를, 공화당 역시 공화주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다만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공화주의의 무게 중심은 공화당으로 기우는데, 링컨A. Lincoln 대통령 후보 때 확연히 부상한다. 당시 민주당과 대통령 후보인 더글러스S. Douglas는 노예제의 도덕성에 대해, 즉 무엇이 좋은 것인지에 대해 사회적 의견의 불일치가 확실하므로 연방은 중립을 지키고 각 주가 자체 판단을 하도록 하자고 밝혔다. 남부가 노예제를 존속시킬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다. 이에 반해 공화당의 링컨은 정치가 노예제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 속에 나쁜 노예제 제도가 더 확산되는 것부터 막아야 한다고 천명하였다. 링컨의 당선으로 연방이 분열 위기에 처하면서 남북전쟁까지 발발하지만 북군의 승리로 연방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이후 19세기 말까지 무리 없이 공화주의가 존중된다. 그러나 20세기 들어서면서 산업 자본주의의 적극 유입에 따른 시장경제의 활성화와 더불어 사회적 진보운동이 두드러지는 가운데 마침내 자유주의가 득세하게 된다.

공화주의에서 자유주의로 옮겨 간 미국

미국 역사 속에서 자유를 촉진하는 진보적 분위기가 20세기 초에 활기차게 형성되었고, 이런 시대적 조류를 적극 대변한 때는 로크너 대법정의 시대였다. 1905년에 내려진 ‘로크너 대 뉴욕 주 (Lochner v. New York)’ 사건이 대표적이다. 뉴욕 주는 고된 노동의 지치는 삶을 살지 않게 할 목적으로 빵공장 노동자들이 1일 10시간, 주 60시간 이상 일할 수 없게 하는 주법을 제정하였는데, 이것이 위헌 소송으로 이어진 것이다. 대법원장 로크너의 연방대법원은 공공복리 증진이라는 목적 성취가 불분명한 상태에서 오히려 사용자와 노동자 간의 계약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위헌이라고 판결하였다. 이후 보다 뚜렷하게 경제활동의 자유를 제한하는 어떤 법도 공익을 목적으로 한다 해도 자유와 재산을 보호하는 헌법의 기본 취지에 비추어 위헌임을 연이어 판결하였다. 당시 산업 자본주의가 활성화되고 있었기 때문에 연방대법원의 판결에 자유방임주의laissez-faire 사조가 적극 수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로크너 시대는 1929년에 닥친 경제 대공황을 거치면서 수그러들기 시작하는데, 1937년의 ‘웨스트 코스트 호텔 대 패리시(West Coast Hotel v. Parrish)’ 사건이 변곡점의 계기가 되었다. 호텔 청소원인 패리시는 시간당 22-25센트를 받았는데, 워싱턴 주가 노동자를 보호할 목적으로 정한 주급 14달러 30센트에 훨씬 못 미친다는 사실을 알고 소송을 제기하였다. 최종심까지 올라온 판결에서 연방대법원은 당사자 간 계약의 자유를 중시했던 과거의 판례를 뒤집어서 여성 패리시의 손을 들어주는 판결을 내린 것이다. 이것은 로크너 대법정의 종언을 알리는 전환이다. 다만 판결 내용을 뜯어보면 계약의 자유에 대한 권리 존중에서 확장된 사회적 약자의 인권 존중으로 시선이 옮겨간 것일 뿐이다. 이것은 자유방임주의에서 확장된 인권을 존중하는 진보적 자유주의로 이행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워싱턴 주가 내세운 바로서 시민의 삶의 질을 유지하려는 좋은 목적은 여전히 뒷전으로 밀려난 상태였기 때문이다. 미국 건국의 공화주의를 소환하여 적극 설파하고 있는 마이클 샌델에 따르면, 개인들의 자유에 대한 권리가 공동선의 이름으로 제정된 입법적 정책들보다 우위에 있음을, 즉 좋음(선)에 대한 옳음(정의)의 우위를 나타내기 시작한 것이다.

20세기 중반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연방(또는 주)정부는 다양한 의견에 따른 합의 도출의 어려움을 이유로 목적으로 지향해야 할 (공동)선에 대해서는 괄호를 친다는 생각으로 중립을 지키면서, 개인의 자유(특히 선택의 자유)와 인권을 중시하는 데 초점을 맞춘 정의의 판결을 내리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마침내 공화주의의 정신과 내용은 실종되고, 그것의 합법적 절차만 남은 절차적 공화정(procedural Republic)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미국서 두드러진 정치적 사조

미국은 제반 제도와 정책이 헌법에 비추어 정돈되는 과정을 거치는데, 이에 최종적 권위를 지닌 연방대법원의 판결에 반영된 정치적 사조를 간략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건국 초기에 불을 밝힌 미국 공화주의는 고대 로마와 그리스의 현인(특히 아리스토텔레스)으로부터 지혜를 모아 조성된 것으로, 억압 받지 않는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가운데 공동선을 지향하되, 이를 가능하게 하는 기반으로 시민의 미덕을 함양하여 자치의 역량을 키우는 데 주안점을 두는 사조이다.

근대에 발아한 자유주의 역시 산업 자본주의의 태동과 확산 과정에서 두드러지는데, 존 로크John Locke로 대변되는 고전적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생명, 사유재산에 대한 권리가 타인으로부터 침해당하지 않을 소극적(negative) 성격의 것으로 규정된다, 다만 자유주의는 역사 과정에서 크게 둘로 분화한다. 하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활성화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자유방임주의로 먼저 출현했고, 이때 자유는 어떤 제약도 받지 않는 최고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사상과 양심, 언론 및 표현의 자유와 같은 것으로 국한된다.

경제적 성격이 짙은 자유방임주의는 20세기 중후반에 하버드대 정치철학자 로버트 노직Robert Nozick에 의해 체계화된 사상적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로 새로운 단장을 하게 되고, 경제학의 거두 하이에크F. Hayek나 프리드먼M. Friedman 등이 이에 적극 동조함으로써 신자유주의로 부상하는 데 기여한다. 자유지상주의는 절차적 공정성을 지키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보면서 권리를 소극적 성격의 것으로 최소화한다. 인간의 권리를 자유권적 기본권으로 제한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기조에 따라 결과로 드러난 분배적 불평등의 사태를 교정하려는 어떤 정책적 시도도, 대표적으로 보편적으로 체계화하는 복지정책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는 이유로 단호히 거부한다.

또 다른 자유주의 사상가 칸트는 이성의 보편화 가능성을 토대로 의무론의 사회윤리를 내세운다. 가령 갑이 을에게 “S라는 상황에서 X를 하는 것이 옳다”면 을도 갑에게 “S라는 상황에서 X를 하는 것이 옳다”고 말해야 하며, 이것은 갑이나 을만이 아니라 병과 정 등 누구에게나 통용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합의를 보게 되는 실천이성의 근본 법칙에 대해서 이성을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법 제정을 요구하게 되므로 당연히 이를 지킬 의무가 발생한다고 본다. 이렇게 대륙법의 기본 규범이 정당화 논거를 거쳐 마련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지켜야 할 의무는 그 상대편 짝으로서 선택하여 누릴 권리(rights)로 이행한다.

하버드대 정치철학자 존 롤스John Rawls는, 로버트 노직에 앞선 1971년에 칸트의 자유 개념에 의거하여 사회정의론A Theory of Justice 을 출간하여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광범위하게 미쳤다. 이런 경우 정의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는 옳음의 체계가 되는데, 칸트의 보편성 개념을 수용하여 원초적 입장에서 무지의 베일을 쓰고 맺는 사회계약의 핵심으로 전개된다. 여기서 누릴 개인의 권리는 확장된 것이기에 고전적 자유주의의 기본권을 훌쩍 넘어선다. 대표적으로 사회적 약자가 스스로 기초교육이나 영양섭취, 의료수혜를 누릴 수 없을 때 누군가, 즉 사회로부터 받을 권리를 갖는 것으로 분별된다. 개인의 적극적(positive) 권리 지평이 정의의 이름으로 정당화되고, 이로써 평등주의적 자유주의(egalitarian liberalism)라고 일컫게 된 것이다. 그리고 평등주의적 자유주의는 케인스주의와 합세하여 미국의 진보정책을 견인하는 동력이 된다.

문제는 권리 개념이 탄성을 받아 더욱 확산되기에 이르면서 풍선 효과를 낳았고, 오늘날 복지권은 물론 낙태권, 심지어 동물에게도 주어지는 동물권으로까지 나아간다는데 있다. 물론 이와 같은 미국의 진보적 자유주의와 복지정책은 서유럽의 사민주의로부터 일정하게 영향을 받았음도 분명하다.

끝으로 전통적 질서를 존중하는 보수주의(conservatism)도 미국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친 사조이다. 본래 에드먼드 버크E. Burke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산업계 경제인들은 소극적 자유권에 기인하는 고전적 자유주의를 선호하는 방향으로 선회하였고, 초기 개척자들인 프로테스탄트는 어떤 변화 속에서도 성경의 가르침을 일정하게 고수하려는 입장을 견지하고자 했으니 이들의 행보가 미국의 보수주의로 평가를 받게 된다.

연방대법원의 낙태권 판결의 정치철학적 의미와 지향

역사적으로 미국은 초기에 공화주의에 근거하여 통치권의 삼권분립으로 견제와 조화를 이끌면서 연방과 주, 개인의 관계를 설정하고, 의회조차 상하원의 둘로 나눔으로써 파벌의 영향을 최소화하는 가운데 자유 시민의 덕을 함양하고 자치의 역량을 키움으로써 누구나(흑인 포함) 함께 좋은 사회 건설을 목표로 지향하였다. 그러나 이후 자본주의의 확산으로 자유주의가 대세를 이루게 된다. 자유주의도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자유방임주의(자유지상주의)가 먼저 주도를 하게 되고,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복지정책을 펼치게 되면서 점차 평등주의적 자유주의도 함께 부상한다. 바로 이즈음 미국은 간략한 표징으로 공화당은 자유지상주의와 보수주의로 무장하여 보수로 위치하고, 진보의 민주당은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와 케인스주의로 단장하여 진보로 자리 매김이 이루어진다. 이에 연방대법원 역시 사회 조류를 반영하는 판결을 내리게 되기 때문에, 대법관의 성향과 분포 비율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고, 이 과정에서 낙태권 판결이 상반되게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 사회에서 정치적 사조의 부침 여하에 따라 연방대법원의 판결이 그 취향을 드러내기 때문에, 정치철학의 차원에서 낙태권을 조망해 보도록 하자. 먼저 1973년의 대법원 판결은 낙태 사안에 대해 도덕과 일정하게 거리를 두면서 중립적 자세를 견지하였고, 무엇보다도 여성에게 임신유지와 종결 여부를 결정할 선택의 자유를 적극적으로 폭넓게 허용했다는 점이다. 여기에 정부는 선(good)에 대해 중립을 지켜야 하고 또 인권을 적극적으로 확장해서 적용해야 한다고 보는 평등주의적 자유주의가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2022년 대법원의 판결은 5대 4의 비율이지만 낙태권이 헌법에서 보장하는 자유에 대한 권리일 수 없다는 것이고, 이에 따라 각 주가 자율적으로 판단하여 결정하라는 것이다. 어떤 주(대표적으로 캘리포니아 주 등)에서는 낙태가 허용될 수 있지만, 다른 주(대체로 남부에 속한 주들)에서는 죄로 처벌받게 되는 길이 열린 것이다. 이번 판결에는 헌법이 보장하는 자유의 권리를 좁혀서 소극적으로 판단하는 고전적 자유(지상)주의와 더불어 낙태란 태아의 생명을 앗아가는 심각한 도덕의 문제로 보는 보수주의가 합세하여 이루어진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문제는 양자의 입장 차이가 너무 극명하게 벌어져서 합의에 이르기 어렵기 때문에 보수와 진보의 진영 대결로 비춰진다는 점이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이 사태가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에 예의주시하지 않을 수 없다. 헌법재판소의 헌법 불합치 판결 이후 국회가 개정안 내놓기를 지연함으로써 관련 법안은 폐기되었다. 중요한 것은 처벌 조항이 사라짐으로써 결과적으로 낙태가 허용되는 분위기이고, 이로써 태어나 삶을 피웠어야 할 적지 않은 태아가 곳곳서 죽음에 갇히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다시 공화주의를 소환하여 열린 자세로 지혜를 모을 방도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첫째, 임신종결(중단)은 임산부 자신의 몸에 대한 선택적 결정의 영역에 속한 것으로 비춰지지만 또 달리 태아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는 것이기에 도덕적 권리로 승인될 사안이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공화주의는 권리를 존중하지만 기본적으로 권리 체계에 방점을 두고 있지는 않다.

둘째, 현대사회에서 여성들이 온갖 위험에 봉착하기 십상임을 감안하더라도 낙태를 마음먹는 임산부는 성숙한 도덕적 판단을 내린 경우가 아니라면 달리 행동해야 할 것이고, 사회는 이런 결정에 후회가 없을 정도로 자녀 출산과 양육이 제대로 이루어지도록 배려하고 지원하는 체계를 갖추도록 해야 한다. 실제로 낙태권 판결을 이끌어낸 1973년 ‘로 대 웨이드 사건’의 로는 가명으로 실제는 노마 맥코비인데, 원하지 않게 세 번째 아이를 임신하자 낙태할 궁리를 모색하면서 변호사 자문을 구하였고 마치 강간당한 것처럼 꾸미려다가 이를 입증할 경찰서 증거가 없음을 알고 마지막 방편으로 여성이 자유롭게 낙태할 수 있는 권리를 허용하라는 소송을 낸 것이다. 로의 경우에서 보듯이 낙태를 하지 않아도 될 사안에 대해 낙태권을 도덕적으로든 법적으로든 쉽게 승인할 경우, 쉽게 낙태에 동조를 하게 됨으로써 많은 태아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깊은 성찰을 요구한다고 여겨진다.

셋째, 여성이 강간이나 의학적 권고 등으로 인해 숙고 속에 임신종결을 결정한 것이라면, 사회는 비난이 아니라 존중하고 위로하는 자세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현대사회가 폭력적일 뿐만 아니라 화학물질로 인한 환경적 위해도 곳곳에 드리우고 있다는 점에서 임산부가 진중하게 내린 낙태에 대해 상당히 수긍이 갈 수밖에 없는 경우가 적지 않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경우 현실을 무시한 채 무심하고 획일적인 잣대로 임신중절을 죄로만 몰아붙일 일은 아니라고 본다. 우리가 덕을 갖추거나 따뜻한 심성을 가진 사람으로서 좋은 사회를 지향한다면, 죄의 잣대를 함부로 들이대는 데 매우 신중해야 할 것이다.

최종적으로 성경 속 예수께서 비유로 든 교훈을 살펴보자. 정성으로 신께 제사 지내는 임무를 지닌 유대인 제사장과 이를 지원할 레위인은 강도 만나 봉변으로 쓰러져 있는 행인을 외면하고 해야 할 일이 있다면서 가던 길을 계속 간 반면, 유대인들이 몹시 천대하던 한 사마리아인은 봉변당한 행인을 정성스레 보살펴주었다. 이 상황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진정한 이웃이 누구인지를 물으셨다. 이때 강도 만난 유대인 행인이 지나가던 사마리아인을 가리키며 바로 당신으로부터 도움 받을 권리가 내게 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좋은 공동체 사회에서는 상대방이 내게 권리를 갖지 않고 있다고 해도 나는 그를 도울 책임이 얼마든 있을 수 있다. 즉, 권리 없는 책임(의무)를 지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부모로서 자녀를 양육할 때의 자세가 바로 이런 유형의 것이다. 물론 이런 책임 의식은 근원적으로 (이웃)사랑에서 연유할 것이다. 자유주의는 보수든 진보든 이 상황을 바르게 해명하기 어려운 반면, 자유와 덕성, 공동선을 함께 중시하는 공화주의는 이를 풀어갈 제도적 방도를 마련할 수 있다고 본다.

한면희 (철학박사, 공화21 공동대표)

현재 성균관대 초빙교수이고 21세기공화주의클럽 공동대표
전 창조한국당 대표(비대위원장), 한국환경철학회 회장
전 녹색대학 대표, (사)환경정의 연구소장, 전국대학강사노동조합 위원장
저서로 초록문명론, 동아시아 문명과 한국의 생태주의, 제3정치 콘서트 등

 

※ 외부 필자의 기고는 <폴리뉴스>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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