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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의열단원 박재혁과 그 친구들 (3-3)

[부산경찰서 투탄 100주년 특별기고]격동의 시기, 부산에서 태어나다

 

박기종 철도 건설 사업을 하다



박기종은 철도 건설에 관심을 가져 ‘철도왕’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청일전쟁 이후 열강의 철도부설권 획득을 위한 치열한 경합하는 과정에서 국내의 철도는 민족의 기업으로 건설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국가를 부강케 함은 상무가 제일이요, 상무를 흥왕케 함은 철도가 제일이다’라는 취지 아래 1898년 5월 한국 최초의 민족철도회사인 부하철도회사(釜下鐵道會社)를 창설하였다. 자본금 약 10만5,000원의 주식회사로 경편 철도를 계획하였으며, 당시 조선인의 주목을 받으며 다수의 유지가 동참하였다.

박기종과 기차와의 인연은 1차 수신사 일행이 승차했던 특별열차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기수를 대표로 약 75명으로 구성된 수신사 일행이 일본 요코하마에 당도하자, 일본 외무성 관리가 마중 나와 특별열차를 타고 도쿄로 이동했다. 김기수는 이 특별열차를 앞에 두고 이게 긴 복도가 이어진 집(장행랑, 長行廊)인 줄로만 알았다. 박기종도 이 특별열차를 통해 처음 기차를 접했다. 1880년 2차 김홍집 수신사 일행의 역관으로 참여하여 재차 일본을 시찰하면서 박기종은 철도라는 근대 기계문명을 신뢰하게 된다.

부산항과 하단포(下端浦)를 연결하는 10km의 하단철도에 박기종이 10만 5,061원을 투자했지만, 조달자금 부족 등으로 힘들었다. 그는 일본인들의 경부선 부설권을 따내는 데에 도움을 주었지만, 그들이 경부선 종착역을 하단으로 하지 않고, 한반도를 관통하며 왜관-밀양-삼랑진-구포 등 낙동강 중하류의 주요 포구도 경유하는 경부선의 개통이 확정되면서 낙동강 하구에서 부산항을 연결하는 철도를 따로 건설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물산 집산지로서 하단의 지리적 이점은 사라졌기에 경제성 자체가 사라졌다. 결국 기술과 자본의 부족과 사업 안목의 협소함으로 철도 경영을 통한 부의 축적 시도는 일제의 경제적 군사적 목적의 철도 부설과는 상충 되었다. 철도는 근대와 문명 개화의 상징이지만, 철로는 식민지 수탈의 길이었다.


박기종은 결과적으로 3만 5천 원가량의 어마어마한 빚을 지게 되었다. 그 이후에도 철도 사업을 시도하지만, 일본의 집요한 농간으로 자금 조달이 여의치 못해 공사를 중단하고 많은 부채를 지게 되었다. 박기종이 구상했던 부하(하단)철도는 부산항-하단포 구간이었다. 그의 꿈은 1995년 부산 지하철 1호선이 연장되어 서대신-신평간 구간이 만들어지면서 실현됐다.

자본가이자 사업가로의 박기종의 철도부설사업은 실패하였다. 대규모 자본이 투입되는 공공사업을 조선인 1인이 계획하고 실현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고 무모한 일이었다. 일본인과 이해관계가 좋을 때와 나쁠 때를 당시에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의 ‘근대의 꿈’은 좌절되었다. 학교와 마찬가지로 선각자로서 뜻을 가지고 시도하였으나 결국은 일제 침략의 길을 터주는 불행한 결과를 가져왔다.

 

박기종은 일본 근대의 경험을 알고 그것을 부산에 적용하려 한 부산의 토박이였다. 부산 개항 이후 대일 외교가이자 기업가로 일본을 가장 잘 알았지만, 일본의 침탈 야욕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만큼 일본 제국주의의 힘은 막강했고 그것을 이길 민족의 능력은 부족했다. 박재혁 출생의 시기는 그러했다. 1893년 9월 순사청이 세운 ‘행경찰관박공기종영세불망비’와 1895년 3월 교리군민들이 세운 ‘행첨사박공기종영세송덕비’가 현재 정공단 안에 있다. 그는 1907년 88세로 임종 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나라 없는 민족은 슬픈 민족이다. 지금은 왜인들의 침략은 날이 갈수록 심해가고 있다. 우리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모두가 산골짜기나 산꼭대기로 밀리고, 들판은 모두 왜인들이 차지하고 말 것이다.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정신을 차려야 할 때이다.”

 

박영효의 활빈당, 통도사에 나타나다

박기종의 사위가 구포 구명학교-구포 물상객주 장우석, 윤상은 등이 1907년 설립한 학교로 현 구포초등학교이다. 백산 안희제가 한때 교장으로 있었다. 상해 임정 재무차장 윤현진이 제1회 졸업생, 2・8동경 독립선언에 참여한 양산의 김철수는 3회, 부산대학교 초대 총장 윤인구는 4회 졸업생이다-와 구포은행을 설립한 윤상은(尹相殷, 1887~1984)이다. 훗날 경남은행장이 되어 경영하였다. 윤상은의 형인 윤필은(尹弼殷, 1861~1903)이 1900년 동래부사로 부임을 했다. 백산무역의 전무 취제역(이사)을 했던 윤현태와 상해 임정 재무차장을 지낸 윤현진의 부친이다. 그가 동래부사로 있을 즈음 일본에 망명해있던 박영효가 조직한 활빈당이 나타났다.


활빈당은 부산에서 양산을 거쳐 경주로까지 이동하면서 지역 부호들에게 거사 자금을 모집하였다. 박영효는 1900년(광무 7) 7월에 이승린 등 일본에 망명 중인 동지들을 규합, 의화군(義和君) 이강을 국왕으로 추대하기 위한 정변을 계획했다. 자금 조달을 위해 비밀리에 한규설과 윤석준 등 측근을 조선에 파견했다.


1900년 7월에 양산에 활빈당이 나타났다. 7월 25일 통도사에서 활빈당 40여 명이 점심을 먹고 난 뒤 한전(韓錢) 1,300냥을 탈취하고 그날 해 질 무렵 언양 방면으로 향해 출발했다. 그다음 날에도 통도사에 나타나 아침을 먹고 난 뒤 그날 정오(음력 7월 27일 일 오후 1시경) 이 활빈당 중 20명이 양산군의 부자인 황산읍(黃山邑, 현 양산시 상북면 상삼마을) 김재복의 집에 가서 폐하의 어의(御意)라며 통도사까지 동행을 청했다. 활빈당들은 김재복에게 “너는 부유한 처지이므로 국가를 위해 축재한 것을 우리 당에 내놓아야 한다. 만약 이를 응낙하지 않으면 너를 살해할 것이다.” 하고 총을 내밀며 협박했다.


77세 고령의 김재복은 상삼마을에서 통도사를 거쳐 언양 석남사까지 끌려갔다. 물품이 아닌 돈 10만 냥을 일본 지폐로 바꿔 상납하라는 독촉을 받았다. 하지만 그 돈은 땅을 팔아도 마련할 수 없어 1만 냥이라면 상납하겠다고 제안하였다. 김재복은 자택을 출발할 당시 지니고 있던 한전(韓錢) 4관(貫)과 언양에서 곡물을 매매한 돈 10관문(貫文)의 수표를 활빈당에 주고 풀려났다. 박영효의 공작은 발각돼 수포가 되었다. 박영효는 궐석재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항일 자본가와 독립운동가를 낳은 동래부사 윤필은

활빈당이 나타나자, 동래부윤 윤필은은 울산 부호 박장호와 양산의 김진사와 의논하여 각각 1만 원을 내게 하여 박영효를 속여 체포할 계략을 꾸몄었다. 하지만 이것이 박영효에게 들통나 활빈당은 오히려 두 사람을 잡아 일본으로 데려가게 할 작정을 꾸몄으나 실행되지는 못했다. 한편 박영효가 김재복에게 은밀히 편지를 보냈다고도 한다.

당시 일본에 있는 박영효에게 금전적 편의를 제공한 사람이 바로 울산 출신의 김홍조였다. 김홍조의 부친은 울산의 염포에서 소금을 생산・판매하여 거부가 되었다. 아들이 관료가 되기를 빌어 서울에 유학을 보냈는데 김홍조는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와 교류하였다. 이때부터 김홍조는 평생 박영효와 함께하였다. 철도왕 박기종과 달리 김홍조는 경부선 철도의 침목을 팔아 거부가 되어 ‘목재왕’이라 불렸다. 김홍조는 동향의 송태관과 같이 사업을 같이하기도 하였다. 김홍조는 윤상은과 사돈으로, 윤상은의 조카 윤현진과 함께 상해 임정 의정원 활동을 잠시 하였다. 1911년 김홍조는 양산 만석꾼 김재복의 증손자 김정훈의 장인이 된다. 1929년 김정훈은 박재혁의 여동생 박명진과 재혼을 하였다.

동래부 주사로 있었던 최유붕은 활빈당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는 박영효가 소유한 경성 부근과 기타 지방 소재 토지의 감독을 맡아 했던 인물이었다. 개화파 박영효와 관계를 맺고 있었던 인물들이 1906년 부산지역에서 한국인에 의한 최초의 근대적 사립학교인 초량소학교를 건립하였다. 동래부윤 윤필은은 활빈당 사건과 직접 관계없이 9월 10일 중추원 의관(中樞院 議官)으로 전임된다. 이에 동래부 아래에 있는 일반 인민은 물론이고 한인상무회사원(韓人商務會社員, 도매상과 중개인 등도 포함) 부상·보상 및 부인에 이르기까지 매우 격앙하여 12일 이후 수백 명의 한인이 주야로 감리서의 문밖에 집합하여 감리 및 경무관이 한 발자국도 감리서 밖으로 나오는 것을 막고 후임자의 부임도 막고 있었다. 윤필은은 원래 부잣집에서 태어나 강직하며 작은 이익에 급급하지 않았다. 낙동강 연안의 가혹한 세금을 감면해주었기 때문이다. 윤필은의 면직은 후임으로 오게 될 밀양 군수 박병욱의 무고에 의한 것이었다. 그의 공덕비가 남아있다.

 

 19세기 말, 괴질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
 
부산은 대륙의 끝이자, 바다의 시작이었다. 모든 문물의 출입구였다. 모든 것이 머무는 곳이었다. 개항 이후 부산에는 근대화를 지향하려는 선각자들이 있었다. 당시 친일은 근대화의 길이고 문명화의 길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은 역사의 질곡에서 결코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개화인으로 일본 의사로부터 우두법을 배워 민중을 마마(천연두)로부터 해방하고 한글학자로 의료인으로 활동했지만, 동학의 토벌 공적으로 지석영은 동래부사가 되었다. 갑신정변을 일으켜 개화의 길을 걷다가 실패한 박영효는 일본 망명지에서 조선으로 활빈당으로 보내 국권회복의 거사 자금을 모으고 자주의 길을 가고 했지만, 친일의 굴레를 결코 벗어나지 못했다. 민족 자본으로 교육과 철도 사업을 하여 개화와 부의 축적을 실현하려 했지만, 일본의 침탈에 좌절한 박기종이 있었다. 개성학교 졸업생 송태관은 일본어 교육을 통해 일본 유학을 하고 황실에서 황제를 보좌하다 물러나 사업을 하면 부를 축적하였다. 대지주로 민족 자본가의 삶을 사는 것은 친일과 항일의 길 사이에 있었다. 관료였지만 그 아들이 민족 자본가로 항일 운동의 길에 있었던 동래부사 윤필은이 있었다.


선각자들은 그 삶의 역정이 험난했지만 문명개화의 꿈을 이루고자 했던 희망이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혹은 삶의 과정에서 은수저나 금수저를 물었던 사람이었다. 그들과 다른 동수저 출신 사람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19세기 말 대한제국의 역사는 개인의 삶을 온전히 그만두지 않았다. 괴질은 한시라도 멈추지 않았다. 호열자의 고통은 해방 때까지 있었다. 그런 가운데 박재혁의 친구이자 동지들이 좌천동 정공단 거리에서 보통 집안의 아이로 태어나기 시작했다.

 

 

* 이병길 : 경남 안의 출생으로, 부산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주변인과 시』, 『주변인과 문학』 편집위원을 역임하고 현재 울산민예총(감사), 울산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부산・울산・양산 지역의 역사 문화에 대한 질문의 산물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를 저술하였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 폴리뉴스 동시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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