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가 21일 오후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문재인 정권 헌정 유린 중단과 위선자 조국 파면 촉구' 대규모 장외집회를 마친 뒤 참가자들과 함께 청와대 방향으로 행진하고 있다. <사진제공=연합뉴스>
▲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가 21일 오후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문재인 정권 헌정 유린 중단과 위선자 조국 파면 촉구' 대규모 장외집회를 마친 뒤 참가자들과 함께 청와대 방향으로 행진하고 있다. <사진제공=연합뉴스>

 

나라는 다시 두 동강이 나버렸다. 조국 사퇴와 문재인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쪽, 조국 지키기와 검찰개혁을 요구하는 쪽이 각기 촛불집회를 열고 있다. 3년전 이 나라는 박근혜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을 들며 하나가 되었지만, 이제는 서로의 촛불이 오염되었음을 비난하며 쪼개졌다. 그 사이 어디쯤에선가 나라의 앞길을 걱정하고 있는 사람들은 끼어들 엄두를 내지 못한채 이 사활적인 대결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다.

언제나 그랬듯이 대결의 대오 맨 앞에는 가장 격렬한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다.

“우리는 이 나라가 처한 상태가 비상시국임을 선언한다. 문재인은 하야하고 조국은 감옥으로 보낼 것을 전 국민의 이름으로 선언한다.” (‘문재인하야 범국민투쟁본부’ 결성식 선언)

“저들은 총집결했습니다. 이건 국지전이 결코 아닙니다. 전면전입니다. 우리가 총집결해야 합니다.

반란군을 반드시 진압해야 합니다.”(‘검찰개혁 촛불집회’ 발언)

이미 강을 건넌 모습이다. 한쪽이 다른 한쪽을 완전히 제압해야 끝날 수 있는 대결.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현실에 딜레마가 있다. 사회의 갈등을 조정할 수 있는 정치의 역할은 여와 야 어느 진영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언제까지나 끝날 수 없을 것 같아 보이는 이 사활적 진영 대결의 악순환은 그대로 방치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촛불 시민혁명을 등에 업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을 때 그런 악순환에 종지부를 찍어주기를 내심기대했었다. 국민의 압도적 지지를 받으며 시작한 정부였기에, 반면 박근혜 국정농단에 가담했던 자유한국당 세력은 거의 궤멸 직전의 상태였기에, 문재인 정부가 조금만 국민 전체의  마음을 얻는 국정을 편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 되고 말았다

누구의 책임인가. 물론 반성도 변화도 없는 자유한국당의 저급한 정치는 우리 눈살을 찌푸리게 해왔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목소리를 키워주고 부활의 발판을 마련해주고 있는 책임이 민심의 등을 돌리게 만든 문재인 정부에게도 있음에 눈감을 일이 아니다.

16일 서울 중앙지검 앞에서 열린 검찰개혁 촉구 촛불문화제에서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제공=연합뉴스>
▲ 16일 서울 중앙지검 앞에서 열린 검찰개혁 촉구 촛불문화제에서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제공=연합뉴스>

 

어느 쪽도 자기성찰의 모습을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박근혜 시절도 반성하지 않은 자유한국당이야 말해서 무엇하겠느냐만, 문재인 정부 마저도 무성찰의 태도를 보이며 닮아가는 것은 대단히 답답하고 실망스러운 일이다. 진영 내부끼리 똘똘 뭉쳐 대결하는 패싸움에서 어느 한쪽도 먼저 성찰하며 쇄신해 가겠다는 말을 내놓지 않는다. 그러니 마음 둘 곳 없어 방황하는 민심이 갈수록 늘어날 수 밖에 없다.

거악(巨惡)이 존재함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거악이 따로 있으니 그보다 덜한 잘못들은 덮어줘야 한다는 말로는 국민을 이해시킬 수도 설득할 수도 없다. 지금의 이 상황이 거악과의 일전을 통해 타개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자폐적 신념에 갇힌 오산이다. 3년전 촛불을 함께 들었지만, 문재인 정부가 시작될 때 압도적 지지를 보내주었지만, 지금은 돌아서서 ‘조국 대전’에 참전할 의사가 없는 많은 국민들의 마음을 껴안지 못하면 이길 수 없는 싸움이다. 돌고 돌아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가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답답한 마음에 최인훈의 소설 『회색인』을 다시 폈다. 소설에서 김학은 갇혀있는 현실을 인간의 의지에 의해, 즉 혁명에 의해 돌파할 것을 주장한다.

“혁명이 가능한 시대라는 건 어디도 없었어. 그래서 혁명이 일어났던 거야. 이런 역설의 논리는 인간의 의지에 의해서만 뚫렸어. 그 의지의 발동을 망설이는 것을 나는 비겁이라고 부르는 수밖에 없어.”

그러나 독고준은 새로운 혁명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취하며 ‘사랑과 시간’을 선택한다.

“나는 진리를 믿고 싶지 않은 것이다. 천 사람, 만 사람에게 하나같이 꼭 들어맞는 이런 진리를 믿고 그 때문에 가슴을 태울 만한 순결은 이미 내 몫이 아닌 것이다. 어떻게 하다가 이렇게 된 것일까? 어떻게 하다가 이런 인간이 된 것일까? 이것은 시대가 나를 거세한 것일까?”

독고준은 자아와 세계의 거짓된 화해 대신에 세계와의 진정한 통합을 위해 시간과 부단한 싸움을 하고자 했다.

고인이 된 최인훈은 생전에 “소설은 나에게 또 하나의 자유를 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자유를 줄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지금 세상을 바라보며 느끼는 이 부자유스러움을 무엇으로 넘어설 수 있을까. ‘조국 대전’을 지켜보는 자아(自我)의 상념은 깊어만 간다. 나도 어느덧 흑과 백 어디에도 적응하지 못하는 회색인이 되었나 보다.

 

※ 외부 필자의 기고는 <폴리뉴스>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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