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분법과 극단논리('either-or’ phenomenon) 극복이 한국 사회 과제이자 미디어의 과제
모든 게 정치를 통하고 정치는 미디어를 통하는 시대
철학적 수사학으로 저널리즘의 공정성을 확립, 논리학이 제공하고 있는 각급 논증에 대한 평가 잣대를 가칭 ‘미디어공정성 재판소’를 통해 적용하는 방식 제안
미디어 철학 확립을 위한 미디어 종사자의 ‘사색 주간(Think Week)’ 제안

동국대·상생과통일포럼 리더십 최고위과정 8기 22번째 수업은 최창섭 서강대 명예교수의 강의로 진행되었다. 최 교수는 강의를 통해 “철학적 사색을 통해 미디어를 이해하고 한국사회의 갈등을 해결할 방법을 찾자”고 제안했다.

미디어에 대한 의미론적 접근

철학의 7개 영역 중 하나인 의미론적semantic 차원에서 미디어의 문제, 사회 갈등의 문제를 짚어보려고 한다. 
People in Quandaries 역경에 처한 사람들이란 뜻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다. 경제적으로 못 살아서 문제도 있지만 이분법적 사고, either-or 현상 때문에 곤란함에 처하기도 한다. 우리 인류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많이 받아왔다. 그 중에 나는 'either-or’ 현상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있다. 다시 말해, 이분법이고 극단논리다. 이런 접근을 통해 사회를 보고 언론의 역할이 무엇인지 살펴보겠다. 

PhD의 의미

이는 독일에서 시작된 거다. PhD는 그 분야의 전문가를 의미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your own independant research ’네가 혼자서 연구할 수 있는 자격증이 있다'는 뜻이다. 전문가가 아니라 그 분야에서 연구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뜻이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박사학위를 주면서 왜 PhD라고 했을까. 결국 자기 연구분야를 통해서 궁극적인 것은 철학적인 사색을 통해 승화시키라는 말이다. 미국에도 전문박사가 있다. 경영학 박사라던가 행정학 박사라는 전문 박사가 있다. 우리나라는 전부 분야별 박사다. 우리는 엄밀히 말해 PhD가 아니라 전문분야의 박사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두 개의 트랙을 갖고 있다. 전문분야의 박사, 실용적인 박사가 있는 반면 PhD를 통해 조금 독특한 나름대로 네가 평생을 통해 사색을 해라, 철학적인 측면에서 승화시키라는 책임과 의무를 부과한다. 

나이가 들어갈 수록 철학적인 사색을 통해 답을 찾아가야겠다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해왔다. 그런 맥락에서 오늘 강의 제목을 잡았다. 

철학적인 사색은 기본적으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거다. 영국 BBC에서 자기 있는 곳에서 런던까지 빨리 가는 방법을 문제로 냈더니 비행기, 헬리콥터 등 다양한 답변이 나왔다. 매주 정답이 없다고 발표를 했는데 4주가 지나고 답이 나온 것이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과 가는 것이다’라고 했다. 형이상학적인 질문을 던졌는데 사람들은 형이하학적인 답변을 한 거였다. BBC는 생각하는 사람이 되라는 의미로 형이상학적인 질문을 던진 것이었다. 

우리는 질문을 먹고 산다

우리는 음식을 먹고 살지만 중요한 것은 질문을 먹고 산다는 것. 사색의 길이다. 학문의 길의 특징은 사색을 통해 답을 제시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이념적 양극화 현상이 심하다. 진보/보수, 남/북, 남/남 등로 갈라져서 싸우다보니 All or Nothing 이라는 극단적인 논리가 횡행한다. 이런 교착상태에서 생산적인 정책 산출은 ‘緣木求魚(연목구어)’다. 

중도 중원의 길을 가는 사람이 없다. 오스트리아의 경우 초기에 양측이 총칼로 내전을 할 정도로 이념의 극단주의에 빠졌다가 2차세계대전 후에 연정을 매개로 합의와 상생의 길로 나아갔다. 대표적인 게 영국 블레어의 '제3의길', 독일 슈뢰더의 ‘신 중도’, 네덜란드 빔 콕의 ‘폴더 모델’ 등이다. 우리 경우에는 우왕좌왕이다. 교육부-교육인적자원부-교육과학기술부-20년만에 다시 교육부가 되었다. 여전히 탈 전문화와 제왕적 대통령제, 영혼 없는 공무원 집단, 코드인사 낙하산 인사 등등의 이야기가 계속 나오고 있다. 

어디로 가야 하나

한때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했으나, 이제는 All roads lead to Politics, inevitably through Media 모든 게 정치를 통하고 있고 정치는 미디어를 통하고 있다. 앞으로 언론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말해준다. 

언론이 해야 할 일은 신뢰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믿음을 어떻게 회복하느냐의 차원에서 중차대한 임무를 부여받고 있다. 그 방안 중 하나가 philosophizing 철학적 사색을 통해 길을 모색해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프로페셔널리즘이다. 그리고 내가 75년에 미디어교육을 통해서 국민들에게 미디어를 이해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지금은 미디어 리터러시라고 해서 중요하게 다뤄진다. 

3원색을 섞으면 검은색이 되지만 빛을 빨강, 파랑, 노랑은 색깔의 3원색으로 두 가지 색깔을 섞으면 두 색의 중간색이 나오는데, 세 가지를 다 섞으면 ‘검은색’이 나온다. 그리고 빨간빛, 녹색빛, 파란빛은  빛의 기본 색으로 두 가지를 동시에 비추면 중간색의 빛이 되지만, 세 가지를 동시 한곳에 비추면 그냥 아무 색이 없는 ‘환한 빛’이 된다. 

세가지 색이 어떤 때에는 검은색이 됐다가 흰색이 되는 것을 보면서 우리도 어떻게 힘을 합쳐야 할지 생각해봐야 한다.

내가 평소에 관심을 갖는 게 어울림의 미학이다. 진보와 보수가 서로 반대되는 개념 같지만 하나라고 본다. 밀물과 썰물, 들이쉼과 내쉼, 헤어짐과 만남, 양지와 음지, 어둠과 밝음 등은 둘로 나눠진 별개의 것이 아니다. 이처럼 진보-보수가 정반대가 아니라 하나라고 본다. 누구나 어릴 때 부모의 피를 통해서 보수적인 성향을 갖는다. 기본적으로 보수가 탄탄해야 한다. 그래야만 앞으로 헤쳐나가는 진보적인 성향이 나오는 것이지 마치 대치되는 상극적인 개념으로 보고 있다. 상식적인 것을 못 보고 있다.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름과 닮음. 우리 말이 참 아름답다. 비움과 채움, 다른 것 같으면서도 결국 하나로 이어진다. 

현재는 언론이 부채질을 하고 있다. 언론이 중도의 길로 끌어야 하는데 극과 극이다. 형용사 부사가 굉장히 발달한 우리의 아름다운 언어를 가지고 어울림의 미학 속에서 미래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치 commencement라는 영어의 졸업은 곧 ‘시작’을 의미하는 것처럼, 마치 졸업과 입학이 전혀 다른 이벤트처럼 보이나 연속선상에서 보면 졸업은 또 다른 입학으로 연결되며 입학은 곧 졸업을 내포하고 있다. 

다름과 닮음. 영어로 differeces 와 similarities 이지만 다름과 닮음이 하나이다. 비슷한 사람들이 모이면 ‘우리가 다른 점이 뭐지’하고 서로 다른 점을 찾으려고 하고,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이면 ‘우리 공통점이 뭐지’하고 닮은 점 찾으려고 한다. 닮음 속에서 다름을 찾고, 다름 속에서 닮음을 찾는 것이 정상이라고 보고 아름다움이라고 본다. 

우리는 여기서 극과극으로 나뉘어 끝나버린다. 헤쳐모여야 하는데 갈라지고 만다. 

인생의 길도 음지와 양지가 계속 교차되는 것이다. 오르막 길이 있으면 내리막 길이 있고 때로는 돌아가기도 한다. 우리는 서로 다른 점과 닮은 점이 있는 데 그것을 승화시키지 못하고 편가르기에 몰두한다. 

우리는 서로 달라야 한다. 같아서는 안 됩니다. 남자와 여자가 다르기에 결혼을 통해 아이를 낳고 가정을 이루지 않나. 같은 단추끼리는 서로 만날 수 없으나 다른 역할을 하는 단추와 구멍은 하나의 짝을 이룬다는 평범한 진리의 깊은 의미를 되새기면서 우리 사회가 처한 현실 속에서 ‘편 가르기’가 아닌 ‘다름’ 속에서의 보완성을 추구하는 삶의 자세를 촉구하고 싶다.

온라인을 통해 무한한 데이터가 넘쳐 흐르고 있다. 정제된 소위 information을 창출해내는 과정을 거치고 지식을 창출해내고, 그 지식을 넘어서 지혜를 향해 가는 작업이 필요하다. 결국은 지혜다. 우리 옛 선현들은 학교를 못다녔다. 그런 분들이 사회를 이끌어왔다. 그 힘은 지식이 아니라 삶의 지혜다. 과거 우리는 자연스럽게 3세대가 살았다. 아버지∙어머니에게선 지식을 터득했고, 할머니∙할아버지를 통해서는 삶의 지혜를 배웠다. 그런 3손 세대는 지금 파괴되었다. 이제는 지혜를 전수하고 터득할 수 있는 세대가 냄새 난다고 다 사라져버렸다. 삶의 지식을 줘야 할 부모는 살기 바쁘다. 아이들은 방치되고 있다. 학교 교육도 죽어버렸다.

언론의 제기능 찾기

언론의 기능은 한마디로 아젠다 세팅이다. 생각, 말, 행위에서 작용한다. 우리 국민(audience)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생각하고, ‘무엇’을 ‘어떻게’ 말하고, ‘무엇’을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지, 이런 화두의 주제는 미디어에서 온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미디어가 방향도 제시해준다는 거다.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가 그것이다. 이 6가지의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 모두가 미디어가 설정하는 아젠다에 의해 이뤄지고 있다. 

미디어가 이런 엄청난 역할을 하는 것을 두고 ‘신화 창출’이라 부른다. 그 중 하나가 '경험의 식민화 colonization of experiences'다. 미디어를 통한 체험의 식민화는 사람들이 의식을 못할 뿐이지 엄청난 거다. 그 외에도  distortion, abnormality, stereotyping, pseudo-environment, simplification 등의 문제가 있다. 언론이 공론형성 광장 역할을 해야 한다. 

양 진영 논리('either-or’ phenomenon)를 탈피해야 한다. 적이 아닌, 경쟁자, 동반자가 되야 한다. 권력과 책임은 專有가 아닌 共有고 민주주의와 나라 번영의 길이다. 상생의 길은 공존의 길이다. 통일이 되기 위해서는 서로 ‘달라야 한다’(to be united, should be different). 그러나 우리는 상대가 다르면 적이 되어버린다. 이것을 극복하는 것이 미디어가 해야할 일이다. 곧 공론장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문제다. 

나는 언론의 5F 현상을 (Fact-Fake/Fiction-Faith-FadeOut) 말하곤 한다. 사실(fact)이 사라지면서 가짜(fake)와 소설(fiction)이 들어오고, 국민들에게 믿음(faith)을 사라지게 만든다(fade-out). 

미디어의 통제 역학 구도가 어떻게 되는지, 어떻게 사색을 해야 할 것인가를 살펴보자.
미디어는 창문이다. 우리는 미디어라는 창문을 통해서 바깥 세상을 본다. 창문이 있기 때문에 바깥을 보는데, 창문의 크기에 따라 제한 받는다. 미디어가 상황에 따라 창문을 좁혔다 넓혔다 한다. 그것에 따라 우리 audience는 영향 받을 수밖에 없다. 

그 다음은 차단효과다. 창문의 커튼을 내리면 캄캄하다. 그런가 하면 파란색 창문은 세상이 파랗게 보이고 빨간색을 칠하면 온통 세상은 빨갛게 보인다. 누군가의 필요와 목적에 따라서 창문의 색깔이 곧, mediated world 가 변하고 있다는 거다. 시청자나 독자의 필요와 목적이냐 아니면 보내는 사람의 필요와 목적이냐에 따라서 변질, 변색, 변음된 mediated world라는 거다. real world가 아니라 미디어화 한 세상이라는 거다. 

이러한 세상에서 현대인들은 미디어의 상황을 제대로 알고 스스로 조정할 능력이 없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미디어 교육이다. 

post-fact society. 사실은 사라지고 가짜 숭배(cult of fake)가 판치는 시대, 색안경 virus속에 믿음과 신뢰가 사라지고 불신 풍조가 만연되어 있다. 메시지와 메신저가 있는데 누가 이길 것인가. 메시지는 사라지고 메신저만 남았다. 매체 자체가 메시지라고 했다. 지금은 메신저가 중요한 시대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 시대 거짓과 선동으로 사리사욕을 채우던 데마고그(Demagogue:군중 선동가)와 로마 멸망을 재촉시킨 소피스트(Sophist)는 현란한 거짓을 사실로 둔갑시켜 군중 우롱의 시대를 열었다. 이런 역사가 되풀이 되고 있다. 

미디어의 역학 구도

미디어는 우선 정치, 법제, 정부라는 세 요인에 의해 통제를 받는다. 광고(돈)가 어디서 오는가 또는 정보를 누가 제공해주는가의 문제다. 보통 정부가 미디어에 제공하는 정보가 70%를 차지한다. 정부는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만을 준다. 흔히 정치, 정부의 통제가 너무 심하다고 말하곤 하지만 어느 나라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정치와 정부에 의한 통제는 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간과하는 건 내적 통제와 공적 통제다. 


오늘 여기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미디어의 내적통제와 공적통제다. 

내적인 통제는 우선 매체의 골격이 어떠냐다. 매체의 소유자가 다른 기업도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신문, 방송 등 크로스 미디어 오너십인지 여부다. 소유주, 편집자, 리포터가 있는데 중요한 건 소유주가 갖고 있는 이데올로기와 철학이다. 사람들은 그걸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다음이 게이트 키핑이다. 편집장에서부터 현장 취재하는 기자들까지 게이트 키퍼들이 어떤 철학을 갖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일선 기자들은 지시에 따라 취재를 할 거다. 그러나 취재 방향과 내용은 전적으로 개개인 기자 자신의 결정이다. 그래서 내적인 통제가 굉장히 중요하다. 

두번째는 공적 통제(public control)다. 고객은 왕이라 하듯이 한때 시청료 납부 거부 운동도 하고 조선일보 거부 운동도 했다. 또 동아∙조선사태로 광고 규제가 있을 때 독자들이 격려도 하고 했다. 알아야 면장을 하듯이 이제는 수용자가 깨어 있어야 한다. 주는 걸 받아 먹는 시대가 아니다. 

어떻게 보면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 양자가 풀어야 할 문제고, 나머지는 제3자들이다. 그러면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무얼해야 할까. 

사실 퍼블릭 컨트롤이 제대로 되려면 미디어 리터러시가 뒷받침 돼야 한다. 훈련을 시키고 알아야 된다. 미디어를 읽고 이해할 줄 알아야 한다. 나는 75년에 처음으로 한국에 '미디어 에듀케이션’이라는 걸 도입해 한 때 부지런히 뛰었다. 

미국의 경우 퍼블릭 컨트롤이 굉장히 강하다. 방송의 면허 갱신 시기에 시청자들의 피드백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칠 정도다. 유럽은 반대로 빌트-인 시스템이다. 이사회를 통해 경영 자체 내에 통제하게 되어 있다. 

오늘날은 모든 게 정치로 통하는 시대다. 거기에는 미디어가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정치와 언론이 어떻게 상호보완적이면서도 서로 흔들리지 않고 영향 받지 않는, detached 된 역학 구도가 형성 되는가가 중요하다. 그렇지 않게 되면 폴리널리스트로 불리는 현상이 나타난다. 

어떻게 해야 할까

보내는 사람은 프로페셔널리즘을 장착해야 하고 받는 사람은 미디어 교육을 통해 변해야 한다. 프로페셔널리즘은 연륜과 경륜을 통해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전문교육(Professional Training), 선서, 사익(self-interest)이 아닌 공익(public interest)을 제공해야 한다. 
그리고 주인 정신(Self-employed)이 있어야 한다. 의사나 교수는 임금은 회사를 통해 받지만 연구와 집도는 전적으로 당사자에게 맡겨져 있듯이 자기 통제가 가능한 프로페셔널리즘을 장착해야 한다. 

BBC에서는 Television Awareness Training을 통해 “무엇을 원하고 왜 원하는가” 그것이 시청자들에게 깊이 뿌리 박힐 때 “그것으로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매체 자신의 철학과 시청자를 보는 시각이 있다. 이런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작업을 계속 해나가야 한다. 시청자들이 무엇을 왜 원하는 지 말할 수 있는 철학이 있어야 한다. 그게 바로 미디어 리터러시다. 

철학적 사색을 통한 미디어의 길

철학에는 존재론, 인식론, 윤리, 가치론, 수사학, 논리학, 의미론이라는 7가지 분야가 있다. 미디어의 미래, 언론의 역할을 논할 때 철학적 사색을 통해 미래를 향해 가는 그림을 그리듯이 미디어가 이런 필로소파이징을 통해 미래를 모색했으면 좋겠다. 

존재론은 한마디로 신문∙방송이 왜 존재해야 하는가 질문하는 것이다. 회사의 기자나 피디가 미래에 대한 철학, 내가 왜 존재해야 하고, 내가 왜 기자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철학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인식론.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지식인지 구분해야 한다. 대한민국 경제, 국가 안보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느냐에 따라 차이가 크다.

윤리학. 무엇이 좋고 나쁜지, 무엇이 거짓인지 구분하는 기준이다. 바람직한 것이냐 아니냐에 대한 윤리∙도덕적 기준이 얼마나 살아움직이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가치론. 인간의 존재의미와 인간다운 보람이 자기 반성적 인식능력이다. 바로 가치를 추구하는 것, 내가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value-orientation이다. 많은 사람들이 권력과 명예, 부를 쫓지만 무엇을 위해 그것을 추구하는가가 한국 사회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우리나라에 버핏 같은 사람이 없는 이유가 그것이고 재벌에 대해 비판적인 이유도 거기에 있다. 

수사학. 수사학의 핵심은 설득이다. 대통령이 국민과 기자회견을 할 때는 질문을 받지 않으면 안된다. 국민들을 설득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설득은 없어지고 강요만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레토릭이 죽어 있다는 뜻이다. 설득 커뮤니케이션이 살아있어야 하는데 강요 커뮤니케이션만 있다. 수사학의 3요소는 에토스-파토스-로고스(Ethos-Pathos-Logos)다. 에토스Ethos는 보내는 사람, 정부다. 파토스Pathos는 국민이다. 언론도 에토스Ethos다.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을 연결시키는 데, 어떠한 메시지를 담을 것인가, 그것이 바로 로고스Logos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당한 설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불편부당, 은폐나 왜곡이 없어야 하고, 정직하고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반면 부당한 설득은 권위에 호소, 분파주의, 모호한 언어, 성급한 결론, 인신공격, 명분주의, 잘못된 비유, 불충분한 인과사용, 다른 이유 등장시킴 등으로 강요를 하는 것이다. 미디어가 일반 국민들 간 대화도 수사학을 바탕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논리학. 수사학을 통한 정당한 설득을 평가하는 데 사용된다. Validity(유효성), Soundness(건정성)/Fallacies(오류성)을 점검한다. 수사학에서 주고 받는 설득이 제대로 됐는지 아니면 일관성도 없고, 연계성도 없고, 권위에 호소하고 무지한지 따지는 것이다. 미디어의 수사학이 제대로 사용됐는지 판단하는 ‘헌법재판소’의 역할을 하는 곳이 바로 논리학이다. 언론의 건전성을 논리학이라는 재판소를 통해 판단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의미론. 핵심은 "Meaning is not in words, but in people”이다. 의미라는 것은 단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머리속에 있는 거라는 의미다. 예를 들어, 누구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통일’의 의미와 김정은이 생각하는 ‘통일’, 그리고 각자가 생각하는 통일이 다를 거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각자가 생각하는 의미가 다르다. 같이 손잡고 눈물 흘리며 통일을 말했는데 나중에 보면 서로 다른 곳에 가 있는 거다. 처음에 내가 말한 것처럼 ‘역경에 빠진 사람들 People in Quandaries’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거다. 

철학의 여러 접근법이 있겠지만, 나는 주로 의미론적 차원에서 우리의 문제를 진단하고자 했던 거다. 극단논리에 바탕을 둔 배타적인 표현들이 난무하는 상황을 넘어서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그래서 '미디어공정성 재판소’를 제시한 바 있다. 철학적 수사학이 제공하고 있는 잣대를 적용해 저널리즘의 공정성을 확립하고, 논리학이 제공하고 있는 각급 논증에 대한 평가 잣대를 가칭 미디어공정성 재판소’를 통해 적용하는 거다. 

“A Philosophy of Media As a Servant for Human Values and Human Growth”

내가 평생 학계에 있으면서 부르짖는 말이다. 미디어는 올바른 인간 가치관 확립과 올바른 인간 성장을 위한 봉사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년에 한번 일주일의 기간 동안 미디어 종사자들이 사색하는 주간을 갖고 사색을 해봤으면 좋겠다. 별안간 미디어 종사자들의 프로페셔널리즘이 형성되는 건 아니다. 언론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종사하고 있는 언론이 어떻게 변화해야 할지, 그 속에서 무엇을 위해 종사하고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지를 사색주간 Think Week에 생각을 한다면 그게 미디어의 미래라고 본다. 그게 바로 미디어 철학이다. 철학이 따로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판단하는 것이 모이는 것이다. 

어쩌면 이상향일수도 있으나 방송의 미래는 방송에 종사하는 개개인의 변화가 선행되어야 하기에 방송계 전체가 적어도 방송의 날이 있는 9월이 되든 어느 때인가 1주일을 정해 모두가 방송이 가야 할 길과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총 점검하는 ‘사색 주간’을 정해 미디어 철학적 사색의 길(Philosophizing on the Media)을 모색해 주길 바란다. 방송협회를 위시해서 기자클럽, PD연합회, 기술인협회, 여의도클럽 등 관련 단체가 모두 참여하는 미디어의 미래를 걱정하고 구체적인 액션플랜을 향한 첫걸음을 떼길 바란다.

최창섭 명예교수는?

최창섭 명예교수는 서강대학교 영어영문학 학사를 취득한 뒤 시라큐스대학교 언론대학원 석사, 오클라호마주립대학교 대학원 언론학교육 박사를 취득했다. 최 명예교수는 서강대학교 커뮤니케이션학부 신문방송학과 교수, 제1대 서강대학교 언론대학원 원장, 서강대학교 교학부총장, 총장직무대행, 한국언론학회 회장, 한국PR협회 회장, 한국미디어교육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위원장, 맑은물 클린피아 운동본부, 맑은물되찾기운동연합회 총재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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