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6.10만세운동’...학생 중심으로 외친 ‘대한독립만세’ 
1987년 ‘6월민주항쟁’...시민 손으로 얻어낸 민주주의

1987년 6월 명동성당 앞에서 농성하고 있는 시민 <사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 1987년 6월 명동성당 앞에서 농성하고 있는 시민 <사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폴리뉴스 이지혜 기자] 6월 10일은 1926년 3대 만세운동으로 꼽히는 ‘6.10만세운동’이 있었을 뿐 아니라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시작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제32주년 6.10 민주항쟁 기념사에서 “민주주의가 더 커지기 위해서는 불평등을 해소해야 하며 공정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또한 경제에서도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한 “남영동 대공분실은 국가폭력의 공간에서 모든 인간이 존엄성을 인정받고 존중받는 민주주의의 산실로 새롭게 태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6.10만세운동은 1919년 3.1운동, 1929년 광주학생운동과 함께 3대 만세운동으로 꼽힌다. 

10일 서울시교육청과 6.10만세운동기념사업회가 가진 학술심포지엄에서 장석흥 국민대 교수는 “국내외에서 다양한 주체가 참여해 혼선을 빚거나 분립했지만, 이러한 난관을 극복하고 독립운동의 새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역사적 의의를 고려해 6.10만세운동에 대한 추진 과정과 국내외 독립운동에 미친 영향 등을 실증적으로 연구해야한다는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1926년 6월 10일 순종 인산행렬이 창덕궁 돈화문을 출발해 청량리를 지나고 있는 모습 <사진=국사편찬위원회 제공>
▲ 1926년 6월 10일 순종 인산행렬이 창덕궁 돈화문을 출발해 청량리를 지나고 있는 모습 <사진=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26년, 학생들이 외친 6.10 만세운동

1926년 순종의 인산일을 기해 일어난 6.10 만세운동은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조직적인 독립운동이었다. 약 2만 4000여명의 학생이 참여했으며 군중들의 호응을 받아 전국으로 확산됐다.

5월 20일 조선학생과학연구회 40여명은 연희전문학교 2학년 박하균의 하숙집에 모여 가두시위를 결의했다. 또한 중앙고보·중동학교 학생 박용규 등은 사립고보생 중심의 시위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고 29일 격문을 만들었다. 

이들은 10일 종로 3가 단성사 앞 파조교에서 순종의 상여가 지나가는 오전 8시 30분경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고 동양척식주식회사 철폐, 납세거부, 군대 및 헌병 철거 등을 담은 격문을 뿌렸다. 

6.10 만세운동은 학생들에 의해 독자적으로 추진된 운동으로, 일제 경찰에게 붙잡힌 학생수는 전국적으로 1000여명에 이르렀다. 이 만세운동은 전국적으로 알려져 고창·순창·정주·울산 등까지 퍼져나갔다.

 

1987년 6월 26일 부산 문현동에서 최루탄을 발사하는 경찰을 향해 시위자가 '최루탄을 쏘리마라'며 달려가고 있는 모습 <사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 1987년 6월 26일 부산 문현동에서 최루탄을 발사하는 경찰을 향해 시위자가 "최루탄을 쏘리마라"며 달려가고 있는 모습 <사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1987년, ‘대통령 직선제’ 이끈 6월민주항쟁

1987년 약 20여일 동안 전국적으로 펼쳐진 6월민주항쟁은 제5공화국의 종말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냈다. 또한 민주항쟁이 거둔 성과는 1980년대 후반 노동운동 등 각 사회 부분 운동이 조직화되는 계기가 됐다. 

1987년, 서울대생 박종철 군이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에 연행돼 조사받던 중 남영동 대공 분실에서 고문으로 인해 사망했다. 

국민들은 박종철군 고문치사 은폐·조작 및 호헌철폐를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국민들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전두환 대통령은 4월 13일 특별담화를 통해 개헌논의를 유보할 것이며 현행현법대로 정부를 이양하겠다고 밝혔다.

이러한 호헌조치가 발표되자 국민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호헌 반대 운동은 학생들과 종교계 등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5월 20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축소 조작되었으며 전범이 따로 있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이에 분노한 국민들은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범국민대회’를 구성하고 6월 10일 규탄대회를 갖기로 결정했다. 

6월 9일, 연세대학교에서 국민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결의대회가 개최되던 중 시위를 하던 이한열 군이 정문 앞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망했다. 

10일 시민과 학생은 서울을 비롯한 전국 22개 도시에서 약 24만명이 참여한 가운데 동시다발적으로 국민대회를 진행했다. 

경찰력에 밀려난 을지로와 명동 일대 시위대는 명동성당으로 향했다. 경찰의 봉쇄와 연행작전으로 약 760명의 시위대가 명동성당 안에 남아 고립돼 농성을 하게 됐다. 이 점거농성은 6월 15일까지 계속됐다.

시위대는 6월 18일을 ‘최루탄 추방의 날’로 선포하고 대대적인 운동을 전개했다. 6월 26일 국민운동본부는 ‘국민평화대행진’을 강행해 전국 34개 도시와 4개 군에서 130여만 명의 국민들이 참여했다.

결국 전두환 정권은 직선제 개헌과 대통령 선거법 개정, 김대중 사면·복권과 정당의 자유로운 활동 등을 보장하는 8개 안을 약속하는 ‘6.29선언’을 발표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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