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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상생과통일포럼 리더십 최고위과정 8기 ⑭강] 신병주, “모든 대통령이 정조나 세종을 닮아가려고 노력한다”

태종∙세조, 집권 정당성 위한 강력한 왕권 확립
세조∙성종, 체제와 문물의 정비에 총력
광해군∙정조, 개혁이 요구되는 시대를 살던 왕
선조의 전란 후 잘못된 논공행상, 반면교사 삼아야
인조의 잘못된 외교노선이 백성을 불행하게 만들어
영조∙정조, 시대적 과제 인식과 적합한 정책으로 조선 후기 중흥 이끌어

지난 5월 20일 동국대·상생과통일포럼 리더십 최고위과정 8기 열 네번째 강의는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가 맡았다.

신병주 교수는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및 동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시대 역사와 문화를 전공하고 있으며, 역사 대중화에 관심을 두어 KBS 1 TV에서 ‘역사저널 그날’, KBS 1 라디오에서 ‘글로벌 한국사 그날 세계는’을 진행했으며, JTBC 차이나는 클라스 연산군과 광해군 편에 출연하였다.

 

오늘 강의에서는 조선의 왕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겠다. 조선시대 왕에 대한 이미지는 ‘제왕적 리더십’이라는 말처럼 모든 권력을 다 행사할 수 있는 존재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사실 조선은 왕권을 제한 받는 나라였다. 유교 이념에 입각해 왕에 대한 견제장치가 상당히 잘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왕세자 시절부터 왕이 먼저 근검 절약해야 한다는 것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면서 공부를 해야 했다. 제도적으로도 언론 3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에 엘리트를 배치해서 왕이 잘못하는 것을 비판하고 견제하는 기능을 하도록 했다. 그리고 항상 왕은 신하들과 정책토론을 해야 했다. 그것을 경연이라 불렀다. 경연을 많이 하는 왕은 하루에 네 번까지 하는 경우도 있었다. 역대 조선의 왕 중에 경연을 많이 한 사람은 세종이 아니라 성종이었다. 세종은 경연 횟수에는 2등이지만 집현전이라는 인재양성 기구를 만드는 등 전체 점수에서 1등이다.

세종이라는 인물이 돋보이는 이유는 장영실, 박연, 김종서, 신숙주, 정인지 등 많은 인재들과 함께 나라를 운영했다는 것이다. 주변 인물들이 잘 할 수 있도록 능력을 끌어줬다는 측면에서 최고의 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후기로 하면 당파 싸움이 심하게 전개 됐다. 동인과 서인, 노론과 소론으로 갈리면서 목숨을 걸고 당파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대립하는 가운데서 상당히 강한 리더십을 발휘한 것이 숙종이다. 영조가 실시한 탕평책의 기반을 제공한 왕이 바로 숙종이다. 하지만 숙종은 그동안 장희빈 때문에 왕으로서의 모습이 가려져왔다. 조선 후기 당쟁의 상징적인 인물이 우암 송시열인데, 이 송시열에게 사약을 내린 사람이 바로 숙종이었다. 숙종의 시대가 있었기 때문에 영조∙정조 시대가 가능했던 것이다.

또한 전쟁을 기준으로 왕의 역할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조선시대에 문제가 많았던 왕은 단연 ‘탄핵’을 받아 쫓겨났던 광해군, 연산군이지만, 현재의 기준으로 보면 선조와 인조가 문제가 많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전쟁의 빌미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이런 전쟁은 왕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희생과 국토의 황폐화를 초래하고 재건하는 데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

전쟁을 피하기 위해선 미리 대비하고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데, 특히 인조가 부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외교정책의 실패 때문에 안해도 되는 전쟁을 치러야 했기 때문이다. 인조 직전 광해군 때는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정책을 수립하면서 후금을 인정했다. 당시에 보기에 후금은 여진족이 세운 나라지만 힘이 강하기 때문에 명나라에 하는 것만큼 외교적 예우를 해줘서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 반면 광해군 정권을 무너뜨린 인조반정 후 광해군이 잘못했던 것뿐만 아니라 잘했던 것 까지도 뒤집으면서 ‘친명배금’ 정책으로 돌아섰다. 이런 외교정책 변화의 대가는 혹독했다.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초래했고 왕은 당시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어 세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렸을 뿐만 아니라 많은 백성들이 청나라에 포로로 끌려가야만 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조선의 왕들을 살펴보겠다. 아이러니한 것은 원래 조선의 왕은 적장자가 후계가 되는 시스템이었는데, 27명의 왕 중에서 놀랍게도 7명만이 적장자였다. 적자라는 건 중전(왕비)에서 나온 자식이라는 뜻이다. 조선은 어떤 경우에도 왕비가 한명이어야만 했다. 그래서 왕비로부터 자손이 없을 경우를 대비해 자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후궁 제도를 도입했다. 후궁은 무제한으로 둘 수 있는 것은 아니고 9명까지만 가능했다.

후궁이 많으면 왕과 왕비가 사이가 좋을 수 없다. 성종의 왕비가 폐비윤씨(연산군의 생모)였다. 폐비가 된 발단도 부부싸움이었다. 성종이 어린 후궁과 놀아나자 화가 난 왕비가 비상을 소지하고 다녔다. 하루는 너무 심하게 싸워서 용안에 상처가 날 정도였다. 이게 빌미가 되어서 폐비가 되고 사약을 받고 죽은 것이다.

세조의 경우 후궁이 많아 보일 것이다. 무인적 기질이 있고 어린 조카의 왕위를 빼았기도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세조는 후궁이 한 명 밖에 없었다. 왜 그럴까? 정답은 왕비가 더 세서 그런 거다. 과거나 지금이나 밖에서 아무리 세 보이더라도 가정에서의 모습은 다를 수 있다.

이렇게 왕비의 자식은 적자, 후궁의 자식은 서자로 부른다. 조선이 건국되고 세자 제도가 안착되고 나면 10세를 전후한 시기부터 왕세자로 책봉돼서 수업을 받는다. 20대에 왕위에 오르고 40대까지 통치하다가 죽는 게 일반적인 사이클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 왕에서 적자 중에 맏이가 왕위를 계승해야 하는데 첫 단계부터 어그러지게 된다. 태조가 조선을 건국했을 때 나이가 50이었다. 당시로 치면 상당히 고령이었다. 6명의 아들 중에서 태조가 후계자를 책봉해야 했는데, 놀랍게도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가 낳은 아들 중에 막내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게 된다. 여기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이 정도전과 계비 신덕왕후 강씨다. 정도전은 잘 알다시피 조선 건국의 핵심세력이었고, 기본적으로 왕이 권력의 중심에 서는 것 보다 신하가 중심에 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왕은 세습되는 존재이기 때문에 운에 따를 수밖에 없지만, 한 나라에서 가장 능력이 있는 재상에게 권력을 주어야 안정적으로 통치가 가능하다는 논리 때문이었다. 또한 첫번째 왕비가 죽고 계비 입장에서는 자기 아들을 왕을 만들고 싶었을 거다.

이에 방원이 형제들을 규합해 정도전과 방석을 제거하게 된다. 이것이 왕자의 난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왕자의 난을 주도한 것은 이방원이지만 정도전과 방석을 제거하고 나서 바로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 둘째 형인 방과가 정종으로 즉위하고 조선의 2대 왕이 된다. 정종은 왕위에 오르고 나서 방원에게 다시 왕위를 양보하게 된다. 공식적으로 선위(왕위를 양보함)했지만 누가 봐도 배후에 태종 이방원이 있었다.

방원은 즉위 후 정도전 효과에 대해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신하가 이끌어 가는 조선왕조가 아니라 왕권이 강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호패법(오늘날의 주민등록제도)과 육조직계제(육조의 판서들에게 왕명이 직접 하달되는 제도)를 실시하고, 외척 관리를 철저히 했다.

태종의 많은 업적 가운데 가장 잘한 것이 후계자 지명이다. 자신은 피를 묻혀가며 권력을 잡았지만 이후에는 시스템에 입각한 후계자 계승을 하려고 했다. 우선 맏아들인 양녕을 후계자로 책봉하고 공을 들인다. 그러나 양녕은 후계자 수업을 제대로 듣지 않았고 여색을 밝혔다. 태종은 신하들과 합의해서 3남이 왕위를 계승했던 과거 중국의 전례를 찾아 양녕을 폐위하고 충녕을 후계자로 지명한다.(택현책) 조선의 위대한 왕인 세종이 즉위하는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태종이었다.

세종이 왕이 되고 나서 잘한 것 중에 하나가 참모들을 적절하게 등용했다는 거다. 세종이 왕이 됐던 때가 조선 건국 26년이 되는 시점이다. 따라서 유교국가에 걸맞는 체제가 정비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학문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재에 대한 확실한 투자를 통해서 문풍(학문하는 풍조)을 진흥하려고 집현전을 세웠다. 왕자의 난으로 조선 건국에 기여했던 1세대 학자들이 제거되고 남아 있던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세대교체가 필요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 등 최고의 인재들을 집현전으로 불러모았다.

장기근속에 대한 피로감을 달래기 위해 사가독서제도를 운영했다. 사가독서(賜暇讀書)제도는 임금이 내린 휴가를 뜻하는 말이다. 처음에는 주로 집에서 책을 봤는데, 성종 때는 독서당이라는 공간을 만들어서 공부하게끔 했다.

적장자 승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세종 이후 오랜만에 적장자가 왕위에 올랐다. 문종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에서는 적장자 출신이 제대로 왕 노릇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 문종이 2년 3개월 만에 승하하게 되는데, 결정적인 이유는 어머니 3년상과 아버지 세종의 3년상을 치르느라 몸이 상했기 때문이다. 문종이 일찍 돌아가시면서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신하들이 어린 단종의 왕권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삼촌인 수양대군이 왕위를 빼앗았다.

세조의 맏아들인 의경세자가 일찍 죽고 차남인 예종이 왕이 된다. 예종도 일찍 죽으면서 의경세자의 맏아들인 월산대군 대신 차남인 자을산군(성종)이 왕위에 오른다. 여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가 한명회다. 장인인 한명회 덕에 성종은 안정적인 통치를 시작할 수 있었다. 성종은 훈구파와 사림파의 능력을 잘 조화시켜서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경국대전 등으로 대표되는 문물을 잘 정비해 나라의 기틀을 마련했다.

성종이 죽고 문제적 왕이 등장하게 되는데 바로 연산군이다. 이분도 적장자다. 어떻게 보면 적장자 프리미엄을 가장 안좋은 방향으로 사용한 인물이다. 연산군은 아버지의 경연 모습을 보며 배우지 않고 오히려 경연을 없애버렸다. 임사홍이나 장녹수 같은 소수 측근의 이야기만 들었다. 그리고 연산군은 언로가 차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사치와 향락을 좋아한 인물이었다. 사냥터를 조성하기 위해 궁궐 인근의 민가를 헐어버렸다. 경회루 연못가에서는 매일 파티가 벌어졌다. 이것이 흥청망청의 유래다.

결국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을 쫓아내고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중종이 왕위에 올랐다. 중종의 적장자는 인종인데, 이분도 8개월만에 돌아가신다. 이어서 왕위에 오른 명종은 인종의 이복동생이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적장자 아니면 적자에 의해 왕위가 계승됐다. 그런데 명종의 아들인 순회세자가 요절하고 적자 출신의 왕자가 없었다. 할 수 없이 후궁 출신의 방계에서 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선조다.

선조는 나름 세자시절에는 총명했고, 왕위에 오른 뒤에도 인재를 잘 등용했다. 율곡 이이, 유성룡, 정철, 이항 등이 바로 선조 시대 등용된 인물들이다. 그런데 선조의 스타일을 보여주는 게 1592년 임진왜란이었다. 이때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평양 마저 포기하고 의주까지 피난을 갔다. 이 모습을 보고 백성들이 실망하게 된다. 또한 선조는 광해군을 탐탁히 여기지 않았다. 후궁 소생이었기 때문이었다. 본인도 방계 컴플렉스가 있었는데 서자 출신 아들을 왕으로 앉히기 싫었던 거다. 그래서 미루다 결국 세자로 책봉하게 된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에서 전장에서 의병을 모아 싸우면서 백성들의 신망을 얻어 나갔다. 그게 결과적으로 광해군이 왕이 되고 국제적인 감각을 키워나가게 된 계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반면 선조는 전쟁이 끝나고 논공행상을 하면서 전쟁에 직접 싸운 공신(선무공신)보다 왕의 피난에 따라간 공신(호송공신)들을 우대하면서 잘못된 관행을 남겼다. 선조는 “임진왜란의 결과는 명이 도와줬고, 내가 피난을 잘 가서 이겼다”는 식의 인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역사는 해방 후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평가를 야박하게 하는 것과도 이어진다.

광해군은 내정에서는 문제가 많았지만 외교정책에 있어서는 상당히 외교를 잘했다. 그런데 인조반정 후 광해군의 외교정책까지도 잘못된 것으로 몰아가면서 친명배금으로 돌아서게 된다.

인조의 잘못된 외교정책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가고 특히 두명의 왕세자 소현세자, 봉림대군이 인질로 청나라로 끌려갔다. 8년만에 귀국해서 적장자인 소현세자는 청나라를 두고 인조와 갈등이 있었다. 소현세자는 청나라가 오랑캐가 아니라 문화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더 발전한 나라라며 배울 것을 주장했다가 결국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인조의 두번째 아들인 봉림대군(효종)이 왕위를 물려 받아 북벌론에 올인했으나 별다른 성과 없이 돌아가셨다.

효종의 적장자인 현종은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유는 병약해서다. 우리나라 왕 중에 온천욕을 가장 많이 한 분일 거다. 그리고 이때가 자연재해가 가장 많았던 때라 별다른 업적도 없었다. 이때는 또한 예송논쟁으로 당파싸움이 극심한 시기이기도 했다.

현종이 승하하고 정말 오랜만에 적장자인 숙종이 왕에 올랐다. 적장자 중에 가장 제대로 왕권을 행사한 사람이었다. 상평통보가 전국적으로 유통된 것도 이때였고, 국방분야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장희빈이 너무 유명해지는 바람에 숙종이 뒷전으로 물러나 있었다. 재평가가 필요하다. 숙종이라는 왕이 있었기 때문에 영∙정조 시대가 가능했던 거다.

영조의 52년 재위는 정치적 탕평정책, 경제적으로는 균역법 실시 태종 때 만들었던 청계천을 다시 대대적으로 준천 사업을 했다. 책 편찬, 경국대전을 계승한 속대전, 국조오례의를 계승한 속오례의 등 문화사업에도 일가견을 보이면서 조선 후기의 중흥을 꾀했다.

영조는 비록 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했지만,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에게는 왕권을 순탄히 넘겨주었다. 정조도 할아버지를 빼 닮은 정치적 감각과 문화적 능력을 갖추었다. 당시 집권 세력인 노론이 정조의 즉위를 반대를 했던 이유는 바로 연산군 효과다. 연산군이 어머니 폐위에 참여했던 신하들을 다 조사해서 정치적으로 숙청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노론은 정조가 즉위하고 나서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의 책임을 물을 거란 생각을 갖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조는 즉위 후 사도세자 죽음의 책임을 물으라는 상소를 올린 자를 오히려 처벌함으로써 복수의 정치보다 탕평을 추구했다. 오히려 아버지 사도세자를 추승하는 작업을 통해서 수원 화성이라는 신도시를 건설하면서 반대파를 점차 자기 편으로 오게 만들었다.

그러나 영∙정조 시대를 끝으로 조선사회는 19세기에 완전히 붕괴∙해체되고 만다. 어떤 면에서는 왕실의 불운 탓이기도 하다. 정조는 정확히 1800년에 죽고, 19세기가 시작되는 때에 순조의 즉위 연령이 11살이었다. 순조도 후궁의 자식이었다.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가 영특했지만 요절했다. 헌종이 후사가 없이 죽으면서 선대에 역모혐의로 귀양가서 농사 짓고 있던 사람을 왕으로 앉힌 게 철종이었다. 이러다보니 왕이 제대로 할 수 있는 시스템이 사라지고 소위 외척세도정치가 기승을 부린다.

세도정치가 기승을 부리니 매관매직이 성행했다. 수령들은 다시 백성들을 착취했다. 1811년 평안도 지역에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고, 1862년 진주민란이 일어나면서 조선사회는 완전히 해체된다. 흥선대원군의 마지막 개혁이 있었지만 그도 결국 권력에서 밀려나고 명성왕후로 대표되는 민씨 척족들이 장악을 하고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 본격적으로 침투한다. 결국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기고 강제 병합이 되면서 518년의 조선왕조는 무너지게 되었다.

조선 왕조는 27명의 왕이 재위했다. 강력한 왕권을 확립한 왕도 있었고, 참모들을 잘 활용한 왕도 있었다. 광해군이나 정조처럼 개혁이 요구되는 시대를 산 왕도 있었다. 선조의 잘못된 논공행상이 얼마나 나쁜 전례를 남겼는 지를 잘 보여준다. 인조의 외교적 판단 미스는 군주의 무능함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다. 조선의 왕은 때로는 과감한 개혁정책 때로는 왕권에 맞서는 신권에 강력히 대응했다.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는 정책과 실패한 정책을 거울 삼아야 할 것이다.

 

신병주 교수는 현재 문재인 대통령이 조선의 어느 왕과 가장 비슷하다고 생각냐는 질문에 역사라는 것은 은근하게 접근해야지 현실에 바로 직접 적용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신 교수는 현재 대통령에게 조선의 여러 왕들의 모습이 겹쳐 있고, 사실 모든 대통령이 정조나 세종을 닮아가려고 노력한다고 덧붙였다.

신병주 교수는 서울대학교 규장각 학예연구사를 거쳐 현재 건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현재 KBS 1 라디오 ‘신병주의 역사여행’을 진행하고 있으며, 한국문화재재단 이사, 문화재청 궁능활용 심의위원, 외교부 의전정책 자문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8년 국가공무원 인재개발원 최고 베스트 강사상을 받았다.

주요 저서로는 『왕으로 산다는 것』, 『참모로 산다는 것』, 『조선산책』, 『조선을 움직인 사건들』, 『조선평전』,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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