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당 정권 ‘3.15부정선거’에 맞서 1960년 4월 일어난 ‘민주혁명’
김주열 열사의 죽음으로 촉발, 대학생·고등학생 주축으로 시위

4.19혁명 당시 모습 <사진=국가기록원 제공>
▲ 4.19혁명 당시 모습 <사진=국가기록원 제공>

[폴리뉴스 이지혜 기자]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대한민국이 4.19혁명의 민주 정신을 계승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1960년, 이승만 정권의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며 시작된 4.19혁명은 독재정권을 끝내고 민주주의의 새 역사를 열였다. 

학생과 시민들은 거리로 뛰어나와 독재에 항거했고, 민중은 정권을 타도하는데 성공했다. 결과적으로 내각책임제와 양원제를 내용으로 한 새 헌법을 통과시켰고,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국무총리를 선출하며 대한민국 제2공화국을 출범시켰다. 노동조합이 결성되고 통일운동이 활성화되기도 했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59주년 4.19혁명 기념식에 참석해 “4.19혁명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에 탄탄한 초석을 놓았다”고 강조했다.

그는 4.19혁명의 정신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로 압축했다. 이 문장은 신동엽 시인의 ‘껍데기는 가라’를 인용한 것이다. 이 총리는 “시인의 절규는 4.19를 상징하는데 그치지 않았다”며 “4.19 이후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위한 국민의 장엄한 진군과 처절한 희생을 일찌감치 예고했다”고 말했다. 

이어 4.19혁명의 의의에 대해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 제2항이 대한민국에서 처음 실증됐다”고 설명했다. 

또 “민주주의는 공짜로 얻어지지 않는다”며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도 오랜세월에 걸친 장렬한 투쟁과 참혹한 희생으로 얻어졌다. 우리는 그 역사를 기억하고 후대에 전해야한다”고 말했다.

투표하고 있는 이기붕 후보 부부 <사진=국가기록원 제공>
▲ 투표하고 있는 이기붕 후보 부부 <사진=국가기록원 제공>


독재 부패의 절정, 3.15 부정선거

자유당 정권은 1960년 실시 예정인 제4대 대통령·제5대 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과 이기붕의 당선을 위해 치밀한 부정선거 계획을 세웠다.

1959년 3월 임명된 최인규 내무부 장관은 부정선거 운동에 열을 올렸다. 그는 전국의 시·읍·면·동에 ‘공무원 친목회’를 조직하고 일주일에 한 번 회합하여 득표공작을 점검하게 했다. 

또한 그는 군수와 경찰서장을 모아놓고 부정선거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국가기록원의 관련 판결문 자료에 따르면 그는 “어떠한 비합법적인 비상수단을 사용해서라도 이승만 박사와 이기붕 선생이 꼭 당선되도록 하라. 세계 역사상 대통령 선거에 소송이 제기된 일이 있느냐? 법은 나중이니 우선 당선시켜 놓고 봐야한다”고 말했다.

1960년 3월 민주당이 공개한 ‘3.15부정선거 지시 비밀지령’에 따르면 자유당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 모든 투표구에서 자유당 후보의 득표율 85%를 달성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들은 사람들은 3인조, 5인조로 묶어 함께 기표하게하고 그것을 자유당원에게 검사받게 하는 공개투표를 진행했으며, 투표소 주변에 완장을 찬 자유당 ‘완장부대’를 동원해 민주당 지지자에게 위협을 줬다. 

또한 있지도 않은 사람을 유권자로 만들어 자유당에 투표하게 하는 ‘유령유권자’ 조작, 총 유권자의 40%에 달하는 자유당 표를 미리 투표함에 넣어두는 ‘4할 사전투표’를 저지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3월 15일, 이승만은 85%, 이기붕은 73%의 지지를 받고 당선됐다.

김주열 열사의 시신을 보려는 시민들과 제지하는 경찰 <사진=3.15의거 기념사업회 제공>
▲ 김주열 열사의 시신을 보려는 시민들과 제지하는 경찰 <사진=3.15의거 기념사업회 제공>

김주열의 죽음과 전국으로 번진 부정선거 반대시위

부정선거를 보다 못한 민주당 마산시당은 오전 10시 30분 ‘선거 포기 선언’을 했다. 이후 민주당원들과 시민, 학생들이 부정선거 항의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북마산파출소가 불타고 자유당으로 변절한 허윤수 의원의 집이 파괴되는 상황에서 오후 8시 10분,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카빈 총을 발포했다.

이로 인해 마산공고 김영호, 마산고 김용실 등 8명이 사망하고 80명이 다쳤다. 마산상고 김주열은 이때 실종됐다. 15일, 17일에도 성남고를 비롯한 학생들의 ‘독재정치 배격’시위가 벌어졌다. 

이기붕 부통령 당선자는 18일 오후 마산 시위에 대한 기자회견에서 “3.15는 공명선거였다”며 “총을 줄때는 쏘라고 준 것이지 가지고 놀라고 준 것은 아니다”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실종된 김주열의 시신은 4월 11일 마산 신포동 중앙부두 바다에서 발견됐다. 오른쪽 눈부터 뒤통수까지 최루탄이 박힌 채였다. 신문에 김주열의 주검 사진이 담기자 전 국민이 분노했다. 

김주열의 시신이 안치된 도립마산병원 앞에 수천 명의 마산시민이 운집했다. 이들은 시위를 벌였고, 마산에서만 3만여명이 참여했다. 2차 마산시위였다.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지만 시위의 불길은 사그러들지 않았다. 이튿날 마산 시내의 8개 남녀 고교가 일제히 시위를 벌였으며, 이는 13일까지 지속됐다.

이승만은 ‘이승만 정부 물러가라’는 구호를 ‘불온구호’라고 말하며 경찰과 검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그는 4월 15일 “이 사건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고무되고 조종된 것”이라는 특별담화문을 발표하며 적색분자들의 준동혐의에 대해 수사하겠다고 발표했다. 

시위는 마산 주변 진해·부산을 넘어 서울까지 번졌다.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 3000여명은 ‘마산사건의 책임자 처벌’, ‘경찰의 학원출입 금지’등을 담은 4.18 선언문을 낭독하고 국회의사당으로 향했다. 

시위 후 학교로 돌아오는 길, 이들은 청계천 4가에서 깡패 100여명과 유지광이 지휘하는 ‘대한반공청년당’을 맞닥뜨렸다. 이들은 고대생들을 무자비하게 습격해 수십 명이 부상당했다.

시위하는 학생들 <사진=국가기록원 제공>
▲ 시위하는 학생들 <사진=국가기록원 제공>


피의 화요일, 4월 19일

4월 19일, 서울시내의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은 시내로 뛰어나와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벌였다. 인근 고려대학교의 시위와 깡패들의 공격에 분노한 신설동의 대광고등학교 학생 1000여명이 오전 8시 30분 가장 먼저 뛰쳐나왔다. 

대광고 시위대의 함성에 서울대 문리대 등 학생들이 합류했다. 고려대·성균관대·건국대 학생들에 이어 신촌 방향에서 연세대·홍익대·경기대·이화여대·숙명여대 학생들도 몰려왔다. 단국대·국민대·서라벌예대가 합류하고 중앙대학생들은 한강 인도교를 넘어 시내로 진출했다.

동국대의 시위대는 국회의사당 앞에 모여있다가 “경무대로 가자”는 제창에 맞춰 중앙청으로 행진했다. 경기고, 동성고, 덕수상고 등 고등학생들도 시위를 위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시위대는 대통령 거처인 경무대까지 진출했다. 시위대와 경찰의 간격이 10m로 압축된 오후 1시 40분, 곽영주 경호과장이 지휘하는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다. 오후 5시까지 계속된 시위에 21명이 사망하고 172명이 부상당했다. 

경무대 뿐만 아니라 중앙청 옆 무기고 앞길에서 학생 8명이 무차별 사격에 사망했다. 이기붕 집 앞에서 시위하던 2명도 경찰 발포에 사망했다. 시위대에 의해 서울신문사와 반공회관이 불탔다.

전국에 시위가 이어졌다. 부산에서는 13명이 사망하고 60명이 다쳤다. 광주에서도 6명이 사망하고 70명이 부상당했다. 정부는 오후 3시 서울, 오후 5시 부산·대구·광주·대전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계엄사령관은 육군 참모총장 송요찬이었다.

계엄군은 경찰과 달리 중립을 지켰다. 서울에 출동한 계엄군 15사단은 각급 부대에 ‘상관의 허가없이 시위대에 무단 발포 하지 말 것’, ‘민가 건물에 무단 침입하지 말 것’, ‘민간인들에게 음식 등을 제공받지 말 것’이라는 내용의 지시를 내렸다.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고 시위하는 대학교수들 <사진=4.19혁명기념 도서관 제공>
▲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고 시위하는 대학교수들 <사진=4.19혁명기념 도서관 제공>


대학 교수부터 초등학생까지 “이승만은 하야하라”...결국 승리한 민주주의

이승만 대통령은 개각을 단행하며 정국 혼란을 수습하고자 했으나, 미국은 국무부 성명을 통해 “한국에서 발생한 사태는 부정선거에 대한 군중의 불만을 반영한 것”이라며 양유찬 주미대사를 불러 ‘부정선거에 대한 철저한 조사’, ‘경향신문의 복간’, ‘국가보안법 개정’ 등을 촉구했다.

4월 25일, 전국 27개 대학 258명의 대학교수는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 모여 14개 항의 시국 선언을 발표했다. 이들은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자’는 플랜카드를 앞세우고 국회의사당까지 행진했다. 학생들은 스승의 뒤에 따르며 힘을 보탰다.

교수들은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이 3.15부정선거 및 4.19사태의 책임을 지고 물러날 것을 주장했다. 또한 이들은 선거를 다시 치르고, 학원의 자유를 절대 보장할 것을 촉구했다. 

4월 26일 수송국민학생 100여명은 ‘부모 형제에게 총부리를 대지말라’며 시위했다. 해당 학교 6학년 전한승 학생은 19일 시위로 경무대 앞에서 경찰의 발포에 사망한 바 있다. 

각계각층 온 국민이 참여한 시위대가 다시 경무대로 집결했으며, 계엄군 역시 더 이상 국민을 희생시키기를 원하지 않았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오전 10시 30분 하야성명을 발표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이 원하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선거로 인연한 모든 불미스러운 것을 없게 하기 위해 이미 이기붕 의장에게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나도록 했다”고 발표했다. 마침내 민주주의가 승리한 것이다. 1960년 8월, 의원내각제의 장면 내각이 새롭게 출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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