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투위를 낳은 암울한 시대적 배경, 87년 6월 항쟁과 양김 분열, 87년 체제 특성, 3당 합당과 재야민주세력의 대응

폴리뉴스 창간 9주년 특별기획 <한국정당실록 60년>을 시작하며...

시대가 변하고, 국민들의 정치의식이 크게 고양되고 있음에도, 또 정권이 아무리 바뀌어도 한국의 정당은 과거의 틀과 과거의 패러다임에서 크게 변하지 않은 듯 합니다.

대의정치체로서 정당의 본질적 임무인 민의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것은 물론, 시대를 앞서가는 지도력은 발현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 정당의 현실입니다.

지금 이대로의 정당체제라면 앞으로의 한국 정치의 미래는 기대하기 힘듭니다. 이에 무엇보다 최우선 할 것이 과거를 정확히 되짚어보는 일일 것입니다. 역사를 통해 미래를 찾는 단서를 찾고자 합니다.

<폴리뉴스> 창간 9주년 특별기획 <한국정당실록 60년>는 기존 자료의 재정리 방식이 아니라 한국정당을 이끌어 오신 정치지도자와 주역들로부터 당시의 <생생한 동영상 증언> 방식입니다.

60여년의 한국정당사 전체를 살아있는 정당주역들로부터 듣는 ‘증언록’으로 정리하겠다는 것은 아직 어디에서도 시도해보지 않았던 야심찬 기획입니다.

한국정당사를 정리하는데 있어서 이념노선, 정책, 인물, 리더십, 정체성, 지역성, 파벌성 등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으나 정당의 본질은 다름 아닌 ‘민의’를 대변하는 대의정치라는 점에서 과연 과거 정당들이 그 시대 민의를 제대로 대변했는지, 또 어떻게 민의를 억압, 왜곡했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이슈별로 인터뷰를 진행하고자 합니다.

또한 알려지지 않았던 당시 정치적 진실도 증언을 통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은 <폴리뉴스> 창간9주년 특별기획 ‘한국정당실록 60년’에 대단한 열정과 성의를 보여줬다. ⓒ폴리뉴스
<폴리뉴스> 창간 9주년 특별기획 <한국정당실록 60년>의 세 번째 인터뷰 인물은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이다.

동아일보 해직 기자 출신으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를 이끌었던 그는 김근태 전 보건복지부 장관, 장기표 새정치연대 대표와 더불어 군사독재 정권 시절 민주화를 주도했던 ‘재야 3인방’ 중 한 명이다.

14, 15, 16대 국회의원을 지내며 민주당 부총재, 통합민주당 부총재, 한나라당 원내총무와 부총재, 열린우리당 의장까지 각 정당의 주요 요직을 두루 거친 그는 이른바 87년 체제 이후 한국정치사의 주역이자 한국정당사의 ‘산 증인’이기도 하다.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 인터뷰① 동영상 및 전문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과의 인터뷰는 지난 1월22일 광화문에 위치한 이 전 의장 사무실에서 김능구 본지 발행인과의 대담 형식으로 3시간 여 동안 진행됐다.

특히 이 전 의장은 “지난날 과거를 올바로 조명해야 미래도 제대로 볼 수 있다”며 <폴리뉴스> 특별기획 취지를 높게 평가하고, 자신 스스로 ‘오래된 미래’라 규정하는 한국정치사에 관한 기록을 두꺼운 대학노트 1권 가득히 정리한 채 인터뷰에 응하는 열과 성의를 보여줬다.

그는 또 비록 익숙지 못한 타자 실력임에도 불구하고 며칠에 걸쳐 직접 작성한 생생한 증언을 참고자료로 취재진에게 보내오면서 “사초의 중요성에 입각해 기술했다”고 밝혔다.

지면을 빌어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에게 취재진으로서 깊은 감사를 드린다.

기사는 총 3편으로 나눠 게재할 예정이며, ①편에서는 동아투위와 당시 시대적 배경, 87년 6월 항쟁과 양김 분열, 87년 체제의 특성, 3당 합당과 재야민주세력의 대응 등에 관한 그의 생생한 증언과 진솔한 입장을 ②편에서는 92년 총선과 대선, DJ의 정계은퇴와 복귀에 따른 민주세력의 혼란과 정계개편 등에 관한 숨겨진 얘기와 정치적 의미에 대해 ③편에서는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 등 양대 세력 내에서 이 전 의장이 겪었던 남모를 고통, 4대개혁입법 좌초 과정 등 열린우리당 창당부터 해체까지 숨은 비화와 함께 그가 제시하는 새로운 정치패러다임에 대해 전할 계획이다.

인터뷰 게재가 완료되면 보다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도록 인터뷰 전문과 동영상을 제공할 예정이다.

자유언론수호의 깃발 ‘동아투위’와 이부영, 재야민주화운동 세력의 한 축으로 부상

이 전 의장은 동아일보 해직 기자 출신답게 동아투위와 이를 낳은 당시 시대적 배경에 대한 설명을 시작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는 1974년 1월8일 선포된 대통령 긴급조치 1, 2호로 인해 유신헌법을 반대, 부정, 비방하는 모든 행위를 보도할 수 없게 되자 그해 10월24일 <동아일보> 기자 180여 명이 동아일보사 사옥에 모여 언론인 스스로가 언론자유를 쟁취하자는 내용의 동아자유언론실천선언을 한 것으로 출발했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동아일보 광고주들을 압박, 광고를 중단케 하는 이른바 ‘백지광고 사태’로 동아일보를 압박했으나, 전국에서 몰려든 유료 격려광고가 그 자리를 채우며 동아일보 지키기에 나섰다.

그러나 장기적 광고 사태와 정부 탄압 등을 이겨내지 못한 사측은 1975년 3월17일, 결국 자유언론수호에 앞장섰던 130여 명의 기자와 프로듀서, 아나운서 등을 강제 해고하기에 이른다.

이들은 다음날인 3월18일 언론회관에서 동아투위를 결성하고 신문·방송·잡지에 대한 외부압력 배제, 기관원 출입금지, 언론인의 불법연행 거부 등을 요구하며, 민주화운동 세력의 한 축으로 부상했다.

그 중심에 이부영 전 의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박 정권이 동아일보 사주 통해 언론인 대량해고, 75년 동아해직사태의 본질”

이부영 전 의장은 김근태 전 보건복지부 장관, 장기표 새정치연대 대표와 더불어 군사독재 시절 민주화를 주도했던 ‘재야 3인방’ 중 한 명이다. ⓒ폴리뉴스
이 전 의장은 동아투위 관련, “60, 70년대 동아일보는 한국사회에서 압도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며 “그 영향력 바탕에는 4.19와 6.3세대 특징을 가진 기자들이 동아일보의 주축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문제의식도 남달랐다”고 말했다.

그는 “박정희 세력 입장에서는 유신체제, 박정희 영구집권을 이어 나가려면 동아일보의 그 세력을 그냥 놔두면 불가능했다”며 “학생운동이나 다른 많은 민주화운동세력이 동아일보의 그 세력을 매개로 해서 국민들한테 확산된 것이기 때문에, (박 정권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제거해야 될 절체절명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 전 의장은 “(정권이) 동아일보에 광고탄압을 가하니까 사주가 박 정권한테 굴복을 해버렸다”며 “그리고 박 정권이 자기들 손으로 내쫓는 게 아니라, 동아일보 사주를 통해서 대량해고를 시킨 것, 이것이 75년도 동아대량해직, 언론인대량해직사태의 본질”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다른 많은 자유를 자유케 하는 그런 자유가 언론자유라고 생각한다”며 “밖에 쫓겨나온 이 세력은 문화예술, 법조, 대학교수, 학생운동 이런 사람들을 조직적으로 끌어 모으고 연결시키는 일종의 재야민주화운동 접착제 노릇을 했다”고 말했다.

이 전 의장은 이어 “동아투위는 펜과 마이크를 뺏긴 언론인들이었지만 유신체제나 80년대에 신문사나 방송사 안에 있는 다른 기자들과 계속 끊임없이 관계를 가지면서 그들의 언론자유운동을 계기마다 이끌어내고 격려하는 그런 입장을 계속 견지했다”고 밝혔다.

“유신독재 강화 아래 제도권 야당과 재야민주화운동 세력 결합될 수밖에 없어”
“제도권 정당은 본질적 보수정당, 재야민주세력의 진보성 및 민족성에 거리 두려 해”


그는 “4.19혁명과 6.3한일국교정상화 대정부투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초까지 동아일보에 입사한 기자들 주류세력이었다”며 “어떻게 보면 대단히 강렬한 민주화 운동, 내지는 민족자주운동, 통일운동에 관심을 가진 세대였다”고 설명했다.

이 전 의장은 1989년 1월21일, 재야민족민주운동의 전국조직 ‘전민련’의 상임의장에 취임했다. 사진은 ‘전민련’ 창립대회 취임 연설 장면. ⓒ폴리뉴스
이 전 의장은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가 언론사 생활을 시작할 그 즈음이 3선개헌이 시도되고, 71년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 김대중의 전면대결이 있고, 바로 곧 이어서 72년에 유신체제가 선포됐다”며 “언론자유가 점차 극도로 탄압당하고 옥죄어지는 그런 상황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이어 그는 “박정희의 유신독재가 강화되면서 자연스럽게 재야민주운동 세력과 제도권 야당, 다시 말해서 김영삼, 김대중으로 대변되는 그 세력들이 서로 제휴하고 협력하지 않을 수 없는 조건이 만들어졌던 것”이라며 “서로 필요에 의해서라도 제도권 야당과 재야민주운동 세력은 결합될 수밖에 없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대한민국 수립 이후에 모든 진보세력은 제도 정치권에서 배제됐었다”며 대표적 사례로 조봉암 선생의 진보정당 사건을 거론한 뒤, “제도권에 남아있는 정당들은 모두 다 보수정당 내지 군부출신들이었기 때문에, 체질적으로 재야민주운동 세력과 제도권 정당 사이엔 상당히 성격상의 차별성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이 전 의장은 양 세력 간의 관계를 “가깝다면 가깝고, 또 멀다면 먼 그런 관계”라고 규정한 뒤, “제도권 야당은 본질적으로 보수정당으로 갔다. 본질적으로”라며 당시 제도권 정당의 성격에 대해 재차 강조했다.

이어 그는 “제도권 야당은 재야민주운동 세력의 민주화 부분에서는 동의를 했지만 통일운동이라든지, 또 노동운동이라든지, 이런 진보성을 띠고 민족적 색채가 강한 것에 관해서는 소극적이거나 적대적이었다”며 “국가보안법 등 분단체제의 제도 속에서 활동해야 되는 야당 입장에서는 재야민주화운동의 지나친 급진성, 내지 진보성에 대해서 일정한 거리를 두려고 노력을 했다. 일종의 ‘불가근불가원’ 관계였다”고 양 세력 간 차이점에 대해 설명했다.

“부마항쟁과 광주민주항쟁은 YS와 DJ의 정치적 비중 드러낸 사건”

이 전 의장은 양김으로 불리던 김영삼, 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의 정치적 비중과 대중적 영향력에 대해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는 “YS(김영삼 전 대통령)가 79년에 야당총재로서 의원직 제명을 당했는데, 이것이 부마행쟁, 나아가 10.26 박정희 피살 사태로 연결된다”며 “YS가 국민들 속, 특히 재야운동과도 굉장히 큰 비중을 가지고 연결이 되어 있었다는 게 드러난 것”이라고 말했다.

이 전 의장은 또 “80년 5월 광주 민주항쟁은, DJ(김대중 전 대통령)가 물론 호남 쪽이지만 재야민주화 운동과 굉장히 큰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었다는 게 드러난 것”이라며 “부마항쟁과 광주민주항쟁은 YS와 DJ의 정치적 비중을 그대로 드러낸 것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전 의장은 “군사독재와 YS, DJ의 관계는 내가 본 바로, 언론인으로서 본 바로는 빙탄불상용(氷炭不相容)이라는 말처럼 얼음과 숯 같이 서로 어울릴 수가 없었다”고 풀이했다.

그는 또 60년대 미국 흑인운동 단체인 블랙팬서(Black Panther)의 지도자였던 클리버(Eldridge Cleaver)의 자서전 [갇힌 영혼, Soul on Ice]을 예로 들며, “소울(soul, 영혼)은 YS와 DJ, 재야 민주화운동 세력으로 비유할 수 있을까 싶고, 아이스(ice, 빙판)는 차디찬 군사독재라고 봐야 한다”고 비유했다.

한국인권협회 결성...재야 민주화운동 본격 나서

이 전 의장은 “87년 체제가 오늘날까지 우리를 규정하고 있다”며 “87년 양김의 분열은 한국사회의 민주주의 혁명을 유산시킨 민족사적 죄악”이라고 규정했다. ⓒ폴리뉴스
이 전 의장은 “70년대 후반, 저를 비롯한 동아투위 사람들이 각자 자기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해직교수, 제적학생, 문화예술인들, 종교인들, 인권변호사들 등을 묶어내 ‘한국인권운동협회’를 만들었다”며 “최초로 각 부문이 인권운동협회로 뭉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그리고 본격적으로 한 것은 이제 박정희가 죽으면서 다시 최규하를 체육관에서 유신대통령 뽑듯 또 뽑겠다고 그러니까 그걸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다”며 “내가 주도해서 윤보선 씨 집에 지식인들이 모여서 성명을 냈는데, 그 성명서 하나로 징역을 갔다”고 아픈 상처를 밝혔다.

이 전 의장은 “그래서 나는 80년 광주항쟁 때 밖에 없었다. 전두환 대통령 취임식 날 특별사면으로 나왔다가, 88년 노태우 대통령 취임 특별사면으로 또 나왔고, 조직 만들어 그걸로 일정한 투쟁성과가 나타나면 또 붙잡혀 들어가고, 다른 사람이 또 그걸 마무리하고, 이런 일들이 반복됐다”고 밝혔다.

감옥 안에서 박종철 고문은폐조작사건 밝혀내... 6월 항쟁 도화선으로 작용

이 전 의장은 한국정치사의 가장 큰 변곡점이었던 87년 관련해 “난 그때 (교도소) 안에 있었는데, 박종철 고문한 경관이 어떻게 내가 있는 영등포교도소 특별사동에 들어오면서, 그 친구를 설득해 박종철 고문은폐조작사건을 밝혀냈다”며 “그게 도화선이 돼서 6월 항쟁으로 연결됐다”고 말했다.

그는 “87년 6.29선언 후에 많은 사람들을 석방하면서 나하고 장기표, 몇몇 사람은 석방을 안 했다”며 “우리 같은 사람들이 밖에 있었으면 양김 분열을 막으려고 노력했겠지. 그러니까 나나 김근태, 장기표를 붙잡아 두고, 양김은 분열시키고, 노태우는 분열 덕에 당선이 되고, 그런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당시 김천교도소 소년교도사에 성인인 채 갇혀 있었던 이 전 의장은 “양김이 분열해서 노태우가 당선되는 꼴을 그 안에서 그냥 무력하게 보고 있었다”며 “그거 참 몹쓸 것이더라고. 우리는 그냥 보고 있는데, 패배할 걸 뻔히 알면서 분열하고, 그 덕에 노태우는, 정말 감옥엘 갔어야 될 사람은 당선이 돼서 다 물거품이 되 버렸다”고 통탄했다.

“87년 체제, 오늘까지 우리를 규정... 군부-YS-DJ-JP 네 조각 지역주의로 나눠”

이 전 의장은 “87년 체제가 오늘까지 우리를 규정하고 있다”며 87년 대선이 낳은 중대한 결과로 ▲첫째, 위태롭지만 하나의 대오를 이루며 투쟁해왔던 민주화운동 진영이 영호남, 그리고 YS와 DJ, 양진영으로 분열이 된 것 ▲둘째로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부와 기득권세력의 주요보루인 영남에서 민주개혁세력이 주도권을 획득할 기회를 잃게 만든 것. ▲셋째로 70, 80년대 제도 야권에서 주도권을 장악해왔던 YS가 영남에서마저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해 여당인 민정당과의 합당을 모색하게 만든 것. YS가 여권으로 넘어가면서 영남에서는 민주화운동 세력의 씨를 말려버리게 됐기 때문에 둘째와 셋째는 상호 연관적. ▲넷째, 본질적인 문제로 군부세력이 다시 쿠데타로 집권할 가능성이 사라진 것 등을 들었다.

그는 이어 “네 가지의 중요한 변화가 87년 대선 결과로 나타난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며 “어찌 보면 87년 체제라는 것은 전두환 노태우 세력, YS, DJ, JP까지 정확하게 우리 정치를 떡시루를 네 조각내듯 지역주의로 나눴다”고 강조했다.

이 전 의장은 “88년 총선을 치른 결과 민정당이 3김(三金, YS, DJ, JP)의 세 개 야당보다 숫자가 적은 여소야대가 됐다”며 “민정당 입장에서도 불편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하니까 YS와 JP를 민정당으로 끌어들여서 민자당으로 만들 정치적 음모를 착착 진행했다”고 3당 합당의 사전배경을 설명했다.

“87년 양김의 적전분열은 1949년 이승만이 반민특위 해체한 것과 다름이 없다”
“한국사회의 민주주의 혁명을 유산시킨 민족사적 죄악”


이부영 전 의장은 격동의 한국정치사 변곡점마다 주요 정치적 사건에 깊숙이 관여했던 한국정당사의 ‘산 증인’이다. ⓒ폴리뉴스
이 전 의장은 87년 대선을 앞두고 양김이 분열한 것과 관련해 “(민주당) 김상현 의원이 ‘YS, DJ의 적전분열은 1949년 이승만이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해체한 것과 다름이 없다’고 표현했던데, 반민특위 해체가 신생 대한민국의 국가적 성격을 규정한 것만큼 (양김의 분열은) 대단히 심각한 일이었다”고 규정했다.

그는 “역사에서 ‘만약’이라는 게 참 우습긴 하지만...”이란 단서를 달면서도 “87년 YS, DJ, 재야민주화운동 세력, 이렇게 연합민주화운동 세력이 집권했을 경우 한국사회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꿀 민주혁명을 일으켰을 거라고 본다. 따라서 YS, DJ의 분열은 한국사회의 민주주의 혁명을 유산시킨 민족사적 죄악이다, 이렇게 봐야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그리고 또 한 가지, 남북관계 개선도 더 빨리 이루어질 수 있었을 것”이라며 “87년에 그와 같은 세력교체가 한국사회에서 있었다면 89년 독일통일과 동구권, 소련연방 해체 등과 함께 한국사회 민주주의 혁명이 진행됐을 것이기 때문에 훨씬 우리 역사를 앞당길 수 있었던 계기가 마련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3당 합당과 이에 대한 대응 ‘야권통합론’과 ‘민중정당 창당론’

1990년 초, 이 전 의장이 다섯 번째 투옥생활을 마쳤을 때 당시 집권여당이던 민정당의 주도 하에 민정당-민주당-공화당 3당이 합당, 거대여당인 민주자유당(민자당)을 출범시킨다.

이 전 의장은 “내가 석방되기 직전에 노태우, YS, JP가 3당 합당을 해 거대 민자당이 탄생을 했고, 야당은 호남당으로 왜소화된 DJ의 평민당과 민자당 안 쫓아간 이기택의 꼬마민주당, 이렇게 있었다”며 “87년 YS, DJ 분열 때문에 민주화운동 세력도 분열되어 있어 민자당과 노태우 쪽에서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그러니 나올 논리는 뻔한 것 아니냐”며 “군사독재 계승 세력인 거대 민자당의 공안통치 강화에 맞대응하기 위해서는 흩어진 야권을 통합해야 한다는 논리가 당연히 나왔다”고 ‘야권통합론’의 탄생 배경을 설명했다.

이 전 의장은 또 “두 번째는 87년에 분열하고, 그런 꼴을 보니 제도 야권은 이제 기대할 게 못 된다. 그러니 이제 힘들더라도 진보적인 정당, 민중정당을 독자적으로 만들어야 된다. 그런 논리가 또 나왔다”며 ‘민중당 창당론’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그는 “내가 감옥에서 나오니까 야권통합론과 민중정당 창당론이 나를 양쪽 앞에다 세우려고 했다”며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런데 공안통치가 다시 강화되는 상황이고 해서 강력한 통합야당이 필요하다는 야권통합론 주장이 더 설득력 있어 보였다”고 밝혔다.

그는 “야당통합론에 더 많은 재야인사들이 있었고, 장기표 이재오 김문수 이우재 등 그 뒤에 민중당을 만들었던 사람들은 민중정당 창당론 쪽에 서 있었다”고 덧붙였다.

평민당과 통일민주당의 통합 ‘통합민주당’의 탄생, 그리고 92년 총선에서의 돌풍

3당 합당에 대해 재야민주세력은 야권통합론과 민중정당창당론 기치를 들며 두 갈래도 나뉘었다. 이 전 의장은 야권통합론에 합류, 통합민주당을 탄생시켰다. ⓒ폴리뉴스
이 전 의장은 “1차적으로 비호남당인 이기택의 꼬마민주당 볼륨을 키워야 했다”며 “평민당하고 합치더라도 너무 조그마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이유를 들었다.

그는 “그래서 이기택 씨의 통일민주당 잔류세력에 나를 비롯한 여러 재야세력이 결합했다”며 “그쪽 볼륨을 키워서 결국 호남당 성격이 짙은 평민당과 결합을 했다. 그래서 생겨난 게 통합민주당”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김대중, 이기택 공동대표에 선관위에 등록하는 법적 대표는 김대중 1인으로 하는 지도체제를 내가 제안해서, 나하고 한광옥 양쪽 협상대표가 통합에 성공을 했다”며 “그렇게 통합을 해서 92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97석을 얻어 민자당을 견제할 수 있는 강력한 야당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실제 92년 총선은 거대여당을 견제하기 위한 국민적 바람이 일구어 낸 파란이었다. 218석의 민자당은 과반에 1석 모자란 149석의 패배를 당했다. 통합야당인 민주당의 견제에다 정주영의 국민당 돌풍의 결과였다. 통합민주당은 97석을 얻어 제1야당으로 급부상하며, 민자당의 대안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공안사건으로 얼룩진 92년 대선, 판을 가른 지역주의

이 전 의장은 92년 대선 관련해 “선거 도중 안기부에서 ‘이선실간첩단사건’을 터트리면서 나와 박계동이 한번 본 적도 없는 이선실과 접촉했었다고 언론을 통해 일방적으로 말을 퍼트렸다”며 “그러니까 DJ 진영에서 자기들한테 색깔론이 번질까봐 우리 쪽 사람들을 근처에 오지도 못하게 해 (대선과정에서) 제대로 역할을 못했다”고 밝혔다.

당시 민자당 측에서 통합민주당 김대중 후보에 대한 ‘용공음해’와 ‘이선실간첩단사건’ 등 색깔론을 통한 공안사건을 선거에 적극 이용하면서 보수반공 표심을 부추겼다.

이 전 의장은 “초원복집 사건이 터져 그때 ‘우리가 남이가’ 하면서 민주당은 DJ의 호남당이라는 악선전 등 지역주의를 선동하는 말이 유행했다”며 “호남에 가둬놔 버리다시피 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상당히 실망스러운 득표를 할 수밖에 없었다. 정주영 씨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했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선거를 일주일 남겨둔 12월11일, 부산 남천동의 ‘초원복국집’에 부산기관장들이 모여 당시 여당 후보인 김영삼 후보의 당선을 돕자는 취지의 대책회의를 했다. 여기에 통일국민당 정주영 후보 측이 전직 안기부 직원을 통해 현장을 도청, 공개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는 영남의 지역주의를 결집시키며 김영삼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데 크게 일조하는 계기가 됐다. 최종투표 결과 민자당 김영삼 후보 997만 표로 41.1%, 민주당 김대중 후보 804만 표로 33.4%, 국민당 정주영 후보 388만 표로 16.1%, 신정당 박찬종 후보 151만 표로 6.3%의 득표를 했다.

92년 대선은 87년 대선에 이어 지역주의가 한국정치에 고착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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