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년 15대 총선, 97년 15대 대선, 2000년 새천년민주당 창당과 16대 총선

폴리뉴스 창간 9주년 특별기획 <한국정당실록 60년>을 시작하며...

시대가 변하고, 국민들의 정치의식이 크게 고양되고 있음에도, 또 정권이 아무리 바뀌어도 한국의 정당은 과거의 틀과 과거의 패러다임에서 크게 변하지 않은 듯 합니다.

대의정치체로서 정당의 본질적 임무인 민의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것은 물론, 시대를 앞서가는 지도력은 발현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 정당의 현실입니다.

지금 이대로의 정당체제라면 앞으로의 한국 정치의 미래는 기대하기 힘듭니다. 이에 무엇보다 최우선 할 것이 과거를 정확히 되짚어보는 일일 것입니다. 역사를 통해 미래를 찾는 단서를 찾고자 합니다.

<폴리뉴스> 창간 9주년 특별기획 <한국정당실록 60년>는 기존 자료의 재정리 방식이 아니라 한국정당을 이끌어 오신 정치지도자와 주역들로부터 당시의 <생생한 동영상 증언> 방식입니다.

60여년의 한국정당사 전체를 살아있는 정당주역들로부터 듣는 ‘증언록’으로 정리하겠다는 것은 아직 어디에서도 시도해보지 않았던 야심찬 기획입니다.

한국정당사를 정리하는데 있어서 이념노선, 정책, 인물, 리더십, 정체성, 지역성, 파벌성 등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으나 정당의 본질은 다름 아닌 ‘민의’를 대변하는 대의정치라는 점에서 과연 과거 정당들이 그 시대 민의를 제대로 대변했는지, 또 어떻게 민의를 억압, 왜곡했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이슈별로 인터뷰를 진행하고자 합니다.

또한 알려지지 않았던 당시 정치적 진실도 증언을 통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폴리뉴스)
<폴리뉴스> 창간 9주년 특별기획 <한국정당실록 60년>의 첫번째 인터뷰 인물은 이해찬 전 총리다.

재야운동을 이끌었던 그는 1988년 13대 총선에서 평민당으로 출마해 원내 진출에 성공한 후 17대까지 5회 연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지역주의 정치가 활개를 치던 13, 14, 15, 16대 대선은 물론 이어진 총선들에서 당의 선거기획책임자를 맡았던 그는 지역주의 정치의 문제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노무현 정부 때 책임총리를 맡는 등 우리 정당사를 반추하는데 빼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다.

그와의 인터뷰는 김능구 본지 발행인과의 대담 형식으로 4시간 여 동안 진행됐다. 기사는 총 4회로 나뉘어 게재할 예정이며 ①편에서는 1987년 13대대선 후보단일화, 1988년 민평련 결성과 평민당 입당 얘기를 시작으로 1990년 3당합당 당시 평민당 입장을, ②편에서는 14대 대선, 1992년 통합민주당 창당 과정과 1994년 서울시장선거, 1995년 민주당 분열 및 국민회의 창당과정을, ③편에서는 1997년 15대 대선 및 집권 과정, 2000년 새천년민주당 창당과정을, ④편에서는 16대 대선 그리고 참여정부 얘기를 전할 예정이다.

인터뷰 게재가 완료되면 보다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도록 인터뷰 전문과 동영상을 제공할 예정이다.

이해찬 전 총리③ 인터뷰 전문 및 동영상


15대 총선에서 호남표만으로 수도권 승리 불가능하다는 것 깨달아...통합민주당과의 분당도 패인

96년 4월 11일, 1여3야 구도로 치러진 15대 총선에서 신한국당은 139석, 새정치국민회의가 79석, 자유민주연합 50석, 통합민주당 15석, 무소속이 16석을 차지했다. 서울과 수도권에서의 집권여당인 신한국당의 승리는 당시로서는 이변이었다.

15대 총선에서 신한국당 승리는 ‘북한의 정전협정파기 선언’과 ‘비무장지대 병력투입’ 등 이른바 ‘북풍’의 영향이 컸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북풍’은 보수 세력을 여당으로 몰리게 하는 효과를 나타내면서 강원과 경북권의 자민련 바람을 잠재웠고 서울과 수도권의 표심을 여당으로 쏠리게 했다.

북풍과 함께 15대 총선의 또 다른 특징은 ‘세대교체’였다. 새내기 정치인 수만 140여명에 이르렀는데, 홍준표나 맹형규도 이 덕을 톡톡히 본 케이스다. 특히 종로에서 이명박 후보가 4선의 이종찬 의원을 이기는 등 세대교체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당시 새정치국민회의의 총선기획단장을 맡았던 이해찬 전 총리는 15대 총선 패배 원인에 대해 “서울에서 의석을 많이 못 얻었어요. 그때 숫자는 기억이 안 나는데 20석 정도나 되나? 말하자면은 (통합)민주당이 출마한 지역에서 많이 떨어졌어요. 분열이 됐으니까. 분열이 돼서 수도권에서 저조했죠”라며 “이 꼬마민주당(통합민주당)은 옛날 YS같은 통일민주당처럼 대중적인 정당이 못됐잖아요. 그러니까 서울에서 한 석도 못 냈죠. 그러니까 저쪽 표를 별로 흡수 못한 거죠. 그리고 이쪽 새정치국민회의는 호남중심으로 말하자면 선거가 치러진 셈 아니에요? 갈라질 때 명분이 약하니까... 그 바람에 서울권에서 호남출신들은 거의 다 떨어졌어요. 민주당과의 분당으로 표가 양쪽으로 갈리면서...”라고 진단했다.

북풍과 함께 야당 분열로 인한 지지층 분산 그리고 통합민주당이 약체여서 신한국당의 표를 뺐어오지 못한 것이 패인이었다는 지적이다.

이어 “가령 이제 민주당이 제일 당선이 많이 되는 데가 서울에서 서남권 아닙니까. 구로, 금천, 관악, 동작 이쪽 아닙니까. 거기서 한광옥, 박실, 김병오 다 떨어지고 저 혼자만 당선됐었다니까요. 그게 왜 그렇게 됐냐면 그 사람들이 다 호남사람들이에요. 저는 충청도이기 때문에 호남표만 의존하지 않으니까 당선이 됐는데 호남표만 의존했던 사람들은 다 떨어졌어요”라며 15대 총선을 통해 앞으로 수도권에서 호남표만으로는 더 이상 선거에 이기기 힘들다는 점을 확실히 알게 됐다고 말했다.

18대 총선서 구 민주당과 통합 반대 이유는 지역주의 정당으로 대선 승리 힘들기 때문

이 전 총리는 얼마 전 치러진 18대 총선에서 민주당 패배 원인도 여기서 찾았다. 그는 17대 대선 패배 이후 구 민주당과의 통합을 반대했던 이유도 총선에서 호남정당으로 고착화될 경우 다음 대선에서도 불리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구 민주당과의 통합과정에 반대한 이유에 대해 “통합과정에서도 호남지역주의가 강화되면 수도권에서 이건 참패한다, 그건 절대로 안 된다, 우리의 전통적인 민주개혁지지층들이라는 것은 호남을 상당한 기반으로 하지만 거기에 수도권에 30~40대의 개혁성향의 젊은 표를 얻지 못하면 그건 못 이긴다, 그래서 전 반대를 했던 거여요. 통합하는 것을”이라고 털어 놓았다.

이어 “이미 대선은 진 것이고 총선이라도 하려면 전국정당을 유지해야 다음 대선을 기약을 할 수가 있는 것이지, 여기서 지역주의로 가버리면 그럼 영남과 충청을 포기하게 되는데..”라며 아쉬움을 표했다.

15대 대선 DJP연합 96총선 직후 추진...한나라당 반대로 내각제개헌 약속 못 지켜

(ⓒ폴리뉴스)
이야기는 다시 97년 12월 18일 있었던 15대 대통령선거로 넘어갔다.

1997년 11월 신한국당은 통합민주당과 통합해 한나라당을 창당하고 대선 후보로 이회창을 내세운다. 15대 대선에서의 최대 이슈는 DJP연합의 김대중 후보와 이회창 후보 간의 경쟁 속에 한나라당 후보 공천에서 탈락한 후 독자 출마한 이인제 후보가 얼마나 선전할 것인가로 모아졌다.

또한,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권영길이 국민승리21의 후보로 가세함으로써 한국 선거 사상 처음으로 노동단체가 정치세력으로 부상했다는 점도 특징으로 꼽힌다. 그밖에 옥외연설회가 금지되고 옥내연설회로 바뀌는 대신 처음으로 방송연설회가 실시되는 등 제도변화도 있었다.

15대 대선 후보는 한나라당의 이회창과 새정치국민회의의 김대중, 국민신당의 이인제, 국민승리21의 권영길, 공화당의 허경영, 바른정치연합의 김한식, 한국당의 신정일 등 7명이었다.

DJP연합이 공식 발표된 것은 대선 1년 전인 96년 12월 김종필 자민련 총재가 광주를 방문해 DJ측 인사들과의 골프회동을 가진 직후다. 양당은 이듬해 지방자치단체 선거에서 선거공조를 하겠다고 발표했고 그 후 대선에서 DJP연합 정권이 탄생됐다.

이 전 총리는 DJP연합에 대해 “96년 총선 끝나고 그게 4월 아닙니까. 그리고 대선은 (97년)12월이잖아요. 92년 경험도 있고 혼자는 안 되는 거니까 DJP연합을 해서 일단 가야 그래도 가능성이 있다 해서 그것도 사전에 막후조정을 했지요. 그때 조정을 해서 DJP연합쪽으로 일찍 방향을 잡은 거죠. 그러니까 총선 끝나자마자 바로 잡은 것이니까”라고 밝혀 총선 직후부터 바로 추진됐다고 회고했다.

지분 배분 등 협상 내용과 관련해 그는 “반을 주는 걸로 당선이 되면 총리 이하 반을 주는 걸로 그렇게 합의를 한 거죠”라며 “JP는 이제 그럼 개헌을 해서 내각제로 가자는 것이었고 그것도 약속을 했죠. 그때. 근데 나중에 개헌선이 확보가 안 되니까 지켜지지가 않는 거죠”라고 말했다.

내각제 개헌 합의와 관련 당시 반대가 많았다는 질문에 그는 “진심으로 동의한 건 아닌데 연정을 하려니까 약속을 안 할 수가 없죠”라면서 “나중에 내각제 부분에 대해서는 개헌을 해야 되는데 한나라당에서 동의를 안 하지 않습니까. 한나라당에서 동의를 안 하니까 개헌을 어차피 못하게 되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JP가 연정을 깼죠. 깨가지고 소수당이 돼버린 거죠”라고 말해 정권을 잡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합의를 지키기 위한 노력을 다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자유민주연합은 2000년 4월 13일 실시된 제16대 총선에서 17석의 소수야당으로 전락했다.

2000년 새천년민주당 창당은 지역 한계 벗어나려는 것...보수적 인사 영입은 IMF 상황 때문

DJP 공조가 깨진 후 새정치국민회의는 총선을 앞둔 2000년 1월 20일 새천년민주당을 창당했다.

이 전 총리는 새천년민주당 창당 배경이 ‘소속 인사들의 비리 문제였다’라는 세간의 지적에 대해 “그건 아니고 이제 집권을 했잖아요. 집권을 해서 2000년 선거(총선)를 치러야 되는데 DJP연합이 깨졌지 않습니까. DJP연합이 깨져서 인적자원을 더 우리가 강화를 해야 되잖아요. 새로운 사람들 더 영입하고 당을 이제 좀 리모델링을 해야 된단 말이죠”라며 “선거 때까지는 새정치국민회의 가지고 했는데 그것 가지고 아까 말한 것처럼 지역적인 한계가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2000년 선거에서 그걸 벗어나려고 새로운 사람 영입하면서 말하자면 DJ 이후의 당을 이제 하나 움직일 수 있는 당을 만드는 그런 차원에서 창당을 새로 하는 거죠”라고 반박했다.

집권 후부터 창당 과정에서 이어진 보수적 인사 영입, 동진정책, 영남개혁세력의 반발 등 당시 문제점들에 대해 그는 차근차근 풀어갔다.

보수적 인사 영입에 대해 그는 “집권당이 됐으니까 약간 더 보수적인 사람들이 이제 이래저래 참여를 많이 하거든요. 그래서 그때 많이 새로 들어왔죠”라며 “관료출신이라든가, 기업가라든가 이런 사람들이 영입이 됐죠”라고 답했다.

‘보수인사를 잡는 것이 아니라 지역의 민주개혁세력들을 풀어주면서 그분들과 손을 잡았어야 됐지 않나’라는 질문에 그는 “2000년에 와서는 자민련이 떨어져나가니까 이제는 새정치국민회의 차원으로는 안 되는 단계가 온 거에요”라면서 “그때가 IMF직후기 때문에 더 개혁적인 데로 갈 수 있는 상황이 못됐었어요. 오히려 조금 더 국가경영에 신뢰감, 안정감을 줄 수 있는 이런 사람들을 더 영입을 해야 된다는 그런 그 당시 분위기가 훨씬 더 강했죠”라고 말했다.

‘영남개혁세력들은 당시 배신당했다는 말을 했다’라는 질문에 그는 “영남쪽을 많이 영입한 건 아니고 수도권 주로 그랬던 거고 영남쪽에서는 참여를 잘 안하려고 그랬죠. 오히려. 왜냐면 새천년민주당으로 영남에서 당선이 어렵다고 보니까 참여를 잘 안 하려고 했었죠”라며 고개를 저었다.

동진정책이 잘못됐다는 당시 지적에 대해서는 “효과를 못 봤다”고 인정했다.

16대 총선도 패배, 총선 전 DJ 방북발표는 총선용 아닌 보안상 불가피...선거에서 역풍

2000년 4월 13일 실시된 제16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133석, 새천년민주당 115석, 자유민주연합 17석, 민주국민당 2석, 한국신당 1석, 무소속이 5석을 차지했다.

16대 총선에서도 한나라당이 영남권을, 민주당이 호남권에서 강세를 보이는 등 동서 지역주의 구도가 여전했으나, 충청표가 분산되고 민주당이 영남, 강원, 제주에서 일부 선전하는 등 지역구도 완화의 가능성도 보였다.

제16대 총선에서는 눈여겨 볼 대목은 헌정 사상 처음으로 시민단체의 조직적인 낙선운동이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경제정의실현연대를 주축으로 4백60여 시민단체가 참여한 ‘총선연대’가 공천반대 명단을 밝혔고 총선을 열흘 앞두고는 낙선운동 대상자 명단을 확정 발표하고 그 중 22명을 집중 낙선운동대상으로 선정해 낙선운동에 나서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이 같은 낙선운동은 불법성 논란과 정치권의 강력한 반발이 있었지만 선거법 개정 및 국민의 정치 참여 확산에 기여했다는 것이 긍정적 평과 함께 ''정권과 시민단체 유착설''과 ''시민단체의 권력화''에 대한 논란이 일으키는 등 부정적 평을 함께 받았다.

16대 총선 직전 김대중 대통령의 방북이 사전에 발표된 것을 두고 이른바 ‘총선용’이란 지적에 대해 이 전 총리는 “당시 상황이 좀 불가피한 상황이 있었어요. 그걸 발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안이 노출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날짜를 당겨서 한 거여요”라며 “오히려 선거에는 역풍을 받았죠”라고 반박했다. <④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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