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뉴스 창간 9주년 특별기획 <한국정당실록 60년> 첫편 이해찬 전 총리 인터뷰① 전문입니다.1. 1987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에 대한 비판적 지지론과 후보단일화론이 대립하던 당시 상황에 대해 말해달라. 당시 김근태 전 의장이 감옥에서 dj비지 입장을 밝힘으로서 시작된 일인데...

이해찬 전 총리 인터뷰① 동영상


- 그 당시는 전두환 호헌철폐운동을 성공하고 나서 자유민주주의적 정치제도를 처음으로 만드는 때였다. 그러니까 72년 유신이후 한 15년만에 처음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통령 직선제를 실시하게 됐는데, 대통령 직선제를 하면서 유신 이후 민주화운동을 해온 여러 세력이 후보를 단일화해야 된다는 견해는 다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노태우 대통령 후보를 이길 수 있는 야당후보의 단일화, 이에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럼 누구로 단일화를 할 것인가’, 이것을 놓고 서로 간에 시각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세력으로 봐도 양김세력이 거의 비슷비슷한 역량을 가지고 있고, 또 실제로 두 분이 다 민주화에 크게 기여를 해왔기 때문에 정치적인 명분에 있어서 별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그 당시 전당대회를 통해서 단일화를 할 수 있는 상황은 안 됐다.

정당이 민주화 돼 있지 않고, 의사결정구조가 정립돼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독재투쟁과정에서 두 세력이 민한당을 만들 때만하더라도 똑같은 지분을 가지고 만든 것 아닌가, 그러니까 전당대회를 할 수 있는 구조가 못됐다. 71년 선거는 전당대회를 해서 후보를 뽑지 않았나, 그런데 그보다도 87년에는 정당이 말하자면 더 사당화 돼 있었다. 그래서 의사결정구조가 없는 상태여서 ‘그럼 어떻게 단일화를 할 것인가, 누구로 할 것인가’에 대해 견해 차이가 많았다.

그런데 민통련에서는 당시 25개 단체가 있었는데 25개 단체에서 내부적으로 두 후보를 초청해 정책적 비교를 통해 선택을 하자, 두 사람간에 단일화가 안 되기 때문에 민통련이 전국단위조직이고 재야운동으로서 가장 큰 조직이니까 그러면 공동으로 정책토론을 해서 힘을 한쪽으로 모으자, 그래서 단일화 쪽으로 세력이동을 시켜서 단일화를 하자고 해서 토론을 했다.

김영삼 후보를 먼저 초청해서 토론하고 오후에는 김대중 후보를 초청해서 토론을 했다. 경제분야, 안보분야, 복지분야 등 몇 분야로 나눠서 했다. 그리고 나중에 표결을 했는데, 29:2 상임집행위원들 표결해서 29:2로 상대적진보성이 있는 김대중 후보로 하는 게 좋겠다고 결론이 났다. 그렇게 해서 비판적 지지를 선언했다.

그런데 민통련이 잘못 판단한 것 중 하나가, 그 정도 하면 세력균형이 깨질 것이라고 봤다. 양김의 세력균형이 깨질 것이라고 봤는데, 그 역량에 대해 너무 과신했다. 실제로 비판적 지지를 했는데 전혀 그 세력균형이 깨지지 않고 지역적으로, 당시에는 지역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으니까 전혀 영향을 못 미쳤다. 결국, 선거운동까지도 그 관점에서 했는데 김대중 후보가 3등으로 졌다. 그 바람에 결과적으로 비판적 지지가 오류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당시 김영삼, 김대중 두 후보가 나왔을 때 노태우 후보에게 진다는 답이 안 나왔었나?)

- 진다고 봤다. 그러니까 단일화를 해야 된다고 봤는데, 두 사람 중 하나가 포기해서 하는 단일화는 이루어지지가 않았다. 왜냐하면 지역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한 지역이 포기한다는 것은 후보 본인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역 전체가 포기해야 되는 것 아닌가, 그러니까 단일화가 두 사람 사이에는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앞서 말한 것처럼 민통련이 말하자면 일종의 비판적 지지를 통해 ‘한쪽으로 세를 몰아 단일화하자’ 이렇게 했는데, 민통련이 세를 모은다는 것 자체가 민통련의 역량을 너무 과대평가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할 정도의 영향력이 없는데, 우리가 좀 과대평가를 한 것이다.

(양김이 각자 후보로 나가서 노태우 후보에게 패할 것이라는 결과를 미리 예견했을 텐데, 그 때 다른 액션을 취할 논의는 없었나?)

- 그 때, 그럼 비판적 지지를 하자고 해서 문익환 목사가 중심이 돼 비판적 지지를 하는 선거캠페인도 했다. 도저히 이것 가지고 당선이 안 된다는 전망이 서니까, 그 때는 DJ를 다시 주저앉혀야 되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에 이미 양쪽에 극대화된 지역주의 때문에 주저앉힌다는 것 자체도 불가능했다. 시도는 했다. 문익환 목사가 시도를 했는데, 이미 상황이 우리 얘기정도는 씨알이 안 먹히는 상황이었다.

(백기완 선생이 나왔다가 후보사퇴하고 YS를 지지하지 않았나?)

- YS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던가, 아무튼 그 쪽으로 기울어졌었다.

2. 당시 나왔던 이야기가 4자필승론이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 일부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것은 정식으로 논의되거나 일원화되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일부에서 선거 때 자기주장을 하다보면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것이 나중에 꼬투리를 잡혀서 ‘4자필승론으로 잘못한 것 아니냐’ 그런 이야기들이 나왔다. 그러나 그것은 주류의 얘기는 아니었다.

(당시 양김이 분열돼야 한다고 해서 평민당이 창당될 때, 여권 쪽 자금이 많이 들어갔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사실 관계가 어떻게 되나?)

- 그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비판적 지지를 선택한 것은 대통령 선거전 아닌가. 그리고 나서 우리가 당에 입당한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그 캠프에 선거운영에는 관여를 했다. 특히 저는 그 때 깊이 관여를 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동교동파라고 하는 세력이 큰 선거를 이렇게 계획적으로 치러낼 수 있는 역량이 아주 적을 때였다. 포스터 같은 것 만드는 일도 제대로 못할 때였다. 그래서 제가 그 때 파고다공원 쪽에 작은 선거기획단을 운영했다. 당시 배기선 의원이 당에 있었는데, 배기선 의원이 연락 역할을 했다. 그런데 돈 같은 것은 전혀 그렇게 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는 돈이 없어서 쩔쩔매고 그랬다.

3. 1988년 평민련 결성 및 평민당 입당 과정... 이해찬 총리를 비롯한 평민련은 최초의 재야 정치운동가들의 집단이었다. 이른바 비지파들의 정치입문장이었는데 당시 비판도 많았다.

- 노태우가 당선이 됐다. 그러면서 평민당이 거의 해체위기에 빠졌다. 단일화에 대한 책임도 뒤집어쓰게 되고, 그러다보니 의원들도 탈당을 많이 했다. 그래서 여야를 영남에서 다 하게 되는 상황으로 정치상황이 몰려가고 있었다. 평민당은 거의 와해직전까지 갔다. 그래서 그때 저희가 민통련에 있던 사람들이 앞으로 활동 진로를 어떻게 할 것인가 모색을 하다가 한겨레신문사로 가는 사람들도 있고, 또 언더그라운드 운동하러 가겠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또, 대중정치쪽으로 가겠다는 사람도 있고 여러 흐름이 있었다. 저는 그때 단일화를 못해서 진 것은 진 것이고, 우리나라가 정치적으로 극우보수세력인데 노태우에 대응할 수 있는 진보민주개혁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당시 우리사회에 호남을 근거로 해서 많은 투쟁을 해오지 않았나, 광주항쟁부터 시작해서. 그쪽이 정치적으로 정당으로 발전하지 못하면 굉장한 레디컬리즘으로 흘러가기가 쉽다. 그래서 저는 호남출신이 아닌데, 이렇게 되면 정치적으로 굉장한 불균형과 진공이 오겠다 싶어서 평민당을 살려 나중에 재통합을 시도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평민당을 망가뜨려 놓으면 굉장한 정치적으로 급진주의가 올 수 있 수 있다. 왜냐하면 광주 문제 같은 경우가 전혀 대변되지 않는 것 아닌가, 그래서 그때 민통련 쪽에서 정치할 사람들을 규합한 것이다. 그래서 평민련을 만들었다. 문동환 박사를 중심으로 해서 2월달인가, 1월달에 정식으로 입장을 했다. 그래서 총선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급진주의를 경계하기 위해 평민당에 입당했다는 것인가?)

- 그렇다. 당시 김대중 후보가 재야사람들과 같이 안병무 박사 집에서 한번 만나 저녁을 했는데, 그 때 의원들이 다 떠나니까 교섭단체 유지하기도 힘든 지경까지 내려갔었다. 얼마 전에 돌아가신 이중재 의원까지도 당을 떠나려고 했던 참이었으니까, 김대중 대통령이 재야인사들과 저녁을 하면서 ‘나도 이제 여러분들이 들어와서 같이한다면 정치를 더 하겠지만, 대선 떨어지고 의원들도 다 떠나고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면 나도 정치를 못한다. 그러니까 빨리 결정을 해달라. 당신들이 들어와서 같이 정당을 할 것인지, 아니면 할 수 없이 당이 무너지는 것을 볼 수밖에 없이 포기할 것이냐를 빨리 결정해주면 (좋겠다)’ 그렇게 요청을 했다.

그 얘기를 듣고 우리가 내부적으로 논의를 한 것이다. 어떻게 하는 게 좋겠는가 해서 문동환 박사, (성래훈 교수), 박영숙 여사, 안병무 박사, 이문영 교수 이런 분들이 모여서 같이 얘기하다가 ‘당을 살려야 된다’. 당이 호남에서 없어지면 대변해줄 제도적인 정당이 없으면 그 다음 그 다음은 과격주의로 가게 돼 있다. 옛날, 옛날에는 남총련처럼 당이 있어도 과격주의가 많이 발생했었다. 그렇게 될 우려가 아주 컸다. 그래서 우리가 정치는 안 해봤지만, ‘일단 참여해서 몇 석을 얻더라도 당은 살려놔야 다시 지역적 통합을 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참여했던 것이다.

(당시 총선에서 몇 분이 국회에 진출하게 됐나?)

- 그렇게 참여해서 공천심사 심사위원을 반반으로 했다. 공천심사위원을 구성하는데 우리쪽에서 참여한 사람이 반, 평민당 쪽에서 반이었다. 그렇게 해서 저와 임채정 의원, 이길재 의원이 공천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그래서 많이 출마들을 했다. 저도 그 때 출마해서 평민련 의원으로 당선된 사람이 열 몇 명이었다. 13명인가? 숫자는 정확하지 않은데, 꽤 많았다.
당시, 서울에서는 저와 이동철, 양성우, 이상수가 됐다. 호남쪽에서는 정상용, 서경원, 김영진 등 이렇게 해서 10여명 됐다. 75석인가 됐었는데, 그 중에서 15명 정도가 평민련 출신이었다. 그리고 박영숙, 문동환 이분들이 비례대표가 됐다.

(총선 결과, 제1야당이 돼 성공한 것 아닌가?)

- 일단 당을 살리는 데는 성공을 한 것이다. 오히려 통일민주당보다 의석이 10석정도 더 많았으니까.

4. 당시 총선이 노태우에 대한 중간평가 성격이었다. 총선 승리를 지방선거까지 연계하지 않았었나?

그것이 중요한 결정이었다. 그 이전에 재야사람들 중에서는 당을 선택하자고 그랬다. 영남에서 출마할 사람들은 민주당으로 가고, 호남에서 출마할 사람들은 평민당으로 가고, 수도권에서 출마할 사람들은 알아서하라. 그래서 노무현 대통령과 당시 파고다공원사무실에서 ‘그럼 당신은 통일민주당으로 가서 출마하고 나는 평민당으로 가겠다, 그래서 국회에서 다시 한 번 양 지역 통합하는 것을 만들자’고 해서 노무현 대통령은 당시 통일민주당으로 부산에서 출마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부산쪽에 갔던 사람들은 우리처럼 조직적으로 들어간 게 아니었다. 그래서 공천을 그렇게 많이 받지 못했다. 평민련은 조직적으로 들어가서 말하자면 공천권 행사를 했으니까 많이 받았다. 그리고서 제1야당이 됐다.

또, 노태우가 중간평가를 받게 돼있었지 않았겠나. 그걸 놓고 당에서 전략대책이 있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 쪽에서 통일민주당에서는 중간평가를 하자는 주장을 했었고, 평민당 쪽에서는 중간평가는 실익이 없다, 오히려 그것보다는 지방자치제를 확실히 실시하는 전제로 중간평가를 잡았다. 말하자면, 중간평가를 면제해주고 대신 지방선거를 확실하게 얻어내는 쪽으로 당의 전략을 잡은 것이다.

그래서 91년도에 의회선거를 먼저 하고 95년도부터는 자치단체장선거까지 같이 하는 것으로 입장을 정했다. 그래서 김영삼 대통령과 견해가 달라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지방자치단체를 실시하게 되고나서 김영삼 대통령이 어떻게 됐느냐하면, 의석도 적은데다가 도저히 민주당의 역량이 평민당보다 약했다. 그러니까 다시 당을 통합해서 후보가 될 가능성은 적어진 것 아닌가, 그래서 3당합당하는 쪽으로 김 대통령이 입장을 바꾼 것이다.

5. 그 직전에 청문회가 있었다. 지금도 정치인들이 국민적 스타가 될 수 있는 방법이 그것 외에 없다고 보여진다.

- 청문회가 굉장히 근 계기였다. 유신 이후에 처음으로 국정감사가 실시 됐고, 국정조사가 실시가 된 것 아닌가. 원래 국정감사 조사가 유신 전 헌법에는 있었다. 유신 헌법 때 없어졌던 것이 다시 처음으로 부활된 것이다. 일반적인 정책감사는 정기적으로 정기국회에서 하는 것이고 국정조사는 사안별로 조사를 하는데, 그 당시 분야가 광주청문회도 있고 경제청문회도 있고 여러 개가 있었다.

텔레비전이 생기고 나서 처음으로 국회의원들이 증인들을 상대로 공개적으로 질의답변하는 걸 생생하게 보게 됐다. 그 전까지는 다 매체를 통해 간접적으로 보는 것이였는데, 그게 처음으로 유일하게 직접 보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충격과 신선도가 대단했다. 형식만 그런 것이 아니고 내용에서도 정주영도 나오고 국가경영을 좌지우지 하던 사람들이 전부 증인으로 나오는 것 아닌가. 그러니까 시청률도 그렇고 내용도 그렇고 엄청난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거기서 질의를 잘하는 사람들은 영화배우처럼 스타로 뜨는 것이고, 거기서 말 한마디 잘못하면 확 망하는 것이었다. 아주 극단적인 현상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청문회를 통해 결국 광주사태 발포명령을 누구 했던 것인지 안 밝혀진 것인가?)

- 그렇다. 발포명령 정황까지는 우리가 거의 잡았는데, 이제 수사를 해야 되는 것 아닌가? 우리가 수사권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수사를 해야 되는 상황이었는데 거기까지 못 간 것이다. 그래서 결국 발포명령자 확인을 못한 것이다. 우리가 정황까지는 대략 잡았는데 확인을 못했다.

(그렇다면 광주사태 수사는 지금도 그 상태에 있는 것인가?)

- 이후, 그에 관한 수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게 안타까운 일인데, 그 후에 광주문제와 관련해 전두환, 노태우가 구속됐다. 내란음모죄로 구속돼 검찰이 수사를 하게 됐다. 94년인가 95년인가 검찰이 수사를 하게 됐는데 우리가 냈던 광주항쟁일지라는 책이 있다. 그 책을 가지고 검찰이 기본수사계획서를 세웠다. (책을 내보이며)요새 나와 유시민 의원이 같이 쓴 책인데, 청문회 토대로 해서 쓴 책이다. 그런데 이걸 가지고 검찰이 수사계획서를 세워가지고 했는데, 전직 대통령 2명을 구속시키면서 발포명령에 관한 것은 수사를 안 했다.

검찰은 그러고서 미제로 그냥 종결시켜버렸다. 그 때가 유일하게 수사할 수 있는 기회였었다. 그런데 그걸 안 한 것이다. 그 바람에 이제 영원히 미궁에 빠져버린 것이다.

(이후 수사할 수 없었나?)

- 이 사건은 종료가 됐기 때문에 수사권이 없다. 이 사람들이 내란음모죄로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나중에 복권된 것 아닌가. 이 사건에 관한 것은 그걸로 종결돼버린 것이다.

(일사부재리원칙에 따라 종결될 수밖에 없었던 것인가?)

- 일사부재리는 아니지만, 그 수사가 끝나고 나서 발포명령에 관한 수사를 다시 재개하긴 어려운 것이다. 여전히 미제로 남아 있는 것이다.

6. 87년, 후보단일화가 되지 않음으로써 3당합당이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그 당시 분열이 지금과 같은 상황의 원인으로 지적한 바 있다. 3당 합당이 현 정치구도에 직접적 영향을 줬다고 생각하는가?

- 그렇다. 민주화 운동을 해왔던 양대 축이었는데, 당이 달라진 것 아닌가. 양당이 다시 합쳐져서 하나의 당을 만들어야 되는데, 당시 저와 노무현 대통령, 이철 의원 등 몇 사람들이 양당 통합운동을 추진했었다. 의원직도 사직하고 했었다. 그런데 이뤄내지 못했다. 그러다가 90년 말, 91년 초 3당합당으로 바뀌었다. 거기에 사실은 노태우 대통령이 먼저 김대중 대통령한테 제안이 있었다.

(노태우가 김대중 대통령에게 합당 제안을 했던 것이 팩트인가?)

- 팩트다. 그것은 나중에 김원기 의원이나 이런 분들에게 증언을 들어보면 잘 알 것이다. 3당 합당하자고 먼저 제안이 있었다. 박철언이 여기서 심부름을 했다.

(그때 말한 3당합당은 전체를 아울러 합당하자는 것이었나?)

- 다하는 게 아니고 민자당과 그러니까 민정당이죠. 평민당과 둘이 하자는 것이었다.

(양당간에 합당하자는 것이었다는 말인가?)

- 예. 양당 간에 그러면 과반수가 되는 거니까 하자라는 제안이 있었죠. 그걸 이제 김대중 총재가 서로 당의 정치노선이 다르다 이렇게 하는 건 안 된다 해가지고 그때 그 제안을 거절 했죠. 그 바람에 이제 노태우가 혼자 정부를 끌어가기 어렵겠다고 판단이 되니까 김영삼 대통령 쪽 통일민주당에 또 제안을 해서 합당을 한 거죠.

(YS는 자기가 대통령 후보도 되기 어려운 상황이니까 3당합당할수밖에 없다는 입장이었나?)

- 그렇게 되는 거죠. 네. 네.

7. 이 부분에서 참여정부 시절의 노무현 대통령의 대연정 제안이 3당합당과 유사한 측면이 있는 것 같다.

- 아니에요. 내가 그때 총리를 할 때인데 노무현 대통령이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느냐하면 자꾸 장관 해임안을 국회에서 내지 않습니까. 김두관 장관 해임안도 내고 윤광웅 장관 해임안도 내고 그러니까 이게 국정을 끌어가기가 어렵다, 실제로 어렵죠. 이제. 그렇게 되니까 여소야대가 되니까 끌어가기가 어려운 그런..그때는 꼭 여소야대도 아니고 열린우리당이 더 숫자가 많은데도 윤광웅 장관 해임안을 냈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니까 노무현 대통령 본인은 이게 도저히 지역구도가 이렇게 해갖고는 정치가 안정이 안 된다, 누가 대통령을 해도. 그래서 연정안을 먼저 제안을 해야되겠다 이렇게 생각을 한 거죠.

저는 이제 비공식적인 자리에선 반대를 했죠. 박근혜 대표가 받질 않을 건데 그걸 받지도 않고, 그리고 (연정 제안을)내려면 사전에 합의가 돼서 내야되는 거지 그냥 주장한다고 되는 건 아니지 않느냐, 그러니까 아예 주장을 안하는 게 좋겠다는 입장이었는데 노대통령은 지역구도를 완화시켜야 된다는 게 본인의 대통령에 당선된 것과 더불어 본인의 큰 과제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그런데 이제 거기서 저하고 좀 생각이 다른 건데 상대방이 그렇게 선의로 그걸 받아들이지 않는데 안 받아들여지면 일만 우스워지는 거 아니냐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이양반이 끝까지 제안을 그냥 공개적으로 해버린 거 아닙니까. 그래서 결국은 아주 면전에서 거부당한 거나 마찬가지죠.

(그 부분이지지 세력에게 큰 실책이었지 않나..)

- 그렇죠. 그게 굉장히 중요한 제안인데 그것을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합당을 하려해도 사전에 막후교섭이라는 게 있는 것 아닙니까. 공개적으로 다 나중에 훗날 역사에서나 밝혀지지 노태우 대통령도 힘들었기 때문에 김대중 대통령한테 막후로 제안을 한 것 아닙니까. 비공개라고 하는 전제하에서. 또 그걸 받은 사람도 우리가 안하면 그만이지 내가 제안 받았다는 얘길 공개할 필요는 없는 것이거든요. 그게 일종에 하나의 정치하는 서로간에 신의거든요.

그러니까 이런 연정 같은 것도 하려면 진정으로 하려면 사전에 조율이 돼야 되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사전조율 없이 공개적인 선언만 가지고 되는 건 아니거든요. 사전조율을 해가지고 안되면 제안을 안 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게 성격차이가 있는 거에요. 스타일..


인터뷰 정리: 정흥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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