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유신체제 맞선 정치가·언론인

[폴리뉴스 박예원 기자]독립·민주화 운동가였던 故 장준하 선생의 부인 김희숙 여사가 2일 별세했다.

향년 92세, 유족 측에 따르면 김 여사는 지병을 앓다가 2일 오전 11시 24분쯤 세상을 떠났다.

고인은 1926년 1월 평안북도 청주에서 출생했다. 장준하 선생이 신안소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시절 선생과 제자로 만나 1943년 결혼했으며, 해방 후 장준하 선생을 도와 종합월간지인 '사상계' 발행에 함께했다. 1967년 제7대 총선 때는 옥중 출마한 장준하 선생을 대신해 유세에 나서며 장준하 선생을 국회의원으로 당선시키는데 힘썼다.

장준하 선생은 1918년 평안북도 의주군에서 출생했다. 1944년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일본군에 학도병으로 징집돼 중국에 끌려갔다가 6개월 만에 탈출해 중국군에 합류했다. 그러다 중국공산군의 습격으로 속해있던 중국군 부대가 괴멸되자 광복군에 합류하기 위해 본부가 있는 충칭까지 이동, 한국광복군 간부훈련반에서 훈련을 받았다.

간부훈련반의 훈련에 한계를 느낀 장준하 선생은 충칭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기로 계획했다. 1945년 1월 30일 53명의 동지들과 충칭 임시정부에 도착해 김구 주석을 만났으며, 그해 4월 이범석의 제안으로 광복군 장교가 됐다. 장준하 선생은 한국으로 잠입하기 위해 미국 OSS대원에 자원해 특수 게릴라 훈련을 받고 작전에 투입됐으나 일본 항복 소식을 듣고 귀환하기도 했다.

광복 후인 1945년 11월 23일에는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귀국해 주석 김구의 수행비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범석의 권유로 김구가 당수로 있는 한국독립당을 떠나 1946년 조선민족청년단에 가입해 교무처장이 된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9월 문교부 산하의 국민사상연구원에서 잡지 '사상'을 창간했다. 그러나 이기붕과 박마리아의 방해로 폐간됐다가 1953년 이름을 바꿔 '사상계'로 창간했다. '사상계'는 이승만의 독재정치와 박정희와 김종필을 비판하는데 앞장섰으며, 국내 지식인의 이목이 집중되는 영향력 높은 잡지로 성장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장준하 선생은 37번의 체포와 9번의 투옥을 무릅쓰며 박정희 정권에 저항하다가 1967년 4월 국가원수모독죄로 구속됐다. 그러다 그해 서울 동대문을 신민당 공천으로 옥중 출마해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1971년 신민당을 탈당하고 사상계 사장에 복귀했으며, 1973년 민주통일당 최고위원이 됐다. 1974년 개헌청원백만인서명운동본부의 이름으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발표하고 범민주세력의 통합에 힘썼다.

그러나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군에 있는 약사봉 등산에 나섰다가 의문의 사고로 사망했다. 당시 정부는 단순 실족 추락사로 처리했지만 권력기관에 의한 타살 의혹이 불거지기도 했다.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사망경위를 조사했으나 변사사건기록 폐기, 수사관련 경찰관들의 사망, 국가정보원 자료의 미확보 등으로 2004년 그의 사망이 공권력의 직·간접적 행사에 의한 것인지 확인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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