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치를 배회하는 매카시의 유령

10일 강원도 강릉시 관동하키센터에서 열린 평창동계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조별리그 B조 남북단일팀-스위스 경기에서 북한 응원단이 가면을 이용한 응원을 펼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div>
▲ 10일 강원도 강릉시 관동하키센터에서 열린 평창동계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조별리그 B조 남북단일팀-스위스 경기에서 북한 응원단이 가면을 이용한 응원을 펼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느닷없는 ‘김일성 가면’ 소동이 평창 올림픽 한복판에서 일어났다. 상식의 눈높이에서 볼 때 애당초 말이 안 되는 보도 내용이었다. 북한 응원단이 김일성의 얼굴에 구멍을 뚫고 바닥에 내팽개친 것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고, 하필이면 남녀 간의 사랑 노래를 부르면서 그 가면을 쓴다는 것은 초등학교 아이들도 믿지 않을 얘기였다. 그냥 실소하고 지나갈 터무니 없는 내용에 불과했다. 그런 내용을 보도한 언론사는 오보임을 인정하고 공식사과를 했다. 그리고 정치적 이용을 삼가해 달라는 당부까지 했다.

하지만 정치권, 정확히 말해 야당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정치적 공격에 나섰다. 자유한국당 전희경 대변인은 “북한에 사과를 요구하고 재발방지 약속을 받으라”며 “못하겠다면 북한 응원단을 당장 돌려보내야 한다”고 했다. 옛 국민의당의 김철근 대변인은 “우리 국민과 언론이 보기에 '김일성 가면' 으로 인식하면, '김일성 가면'인 것”이라는 희한한 논리를 내세워 세간의 화제 거리가 되었다. 옛 바른정당의 하태경 의원은 “가면 속 얼굴이 김일성의 젊은 시절 모습이 확실하다”며 가면 눈 부위의 구멍은 “노동당에서 구멍을 뚫었을 것”이라는 설명까지 덧붙였다.

이들에게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 정도면 ‘김일성 가면’이 아니었음이 납득할 만큼 설명되었건만, 그래도 ‘김일성 가면’임을 추궁하며 불씨에 부채질을 하려했다. 이들에게는 ‘사실’보다 중요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내려온 응원단은 반드시 체제선전을 하고야 말 것이라는 믿음 같은 것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 내려왔던 북한 예술단과 응원단은 체제선전 관련 내용은 철저하게 삼가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 모습이 남북관계 개선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임을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그래도 보수적인 야당들과 언론들에게는 자신들이 지켜온 ‘믿음’이 ‘사실’ 보다 중요했던 것이다.

정치철학자 조지프 히스는 『계몽주의 2.0- 감정의 정치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서 ‘가슴’보다 ‘머리’가 더 많이 관여하는 정치를 주문하면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다수가 믿는 것이 무엇이냐’가 ‘실제로 사실인 것이 무엇이냐’ 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이제 많은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말을) 진실처럼 들리게 하려는 노력조차 내던져 버렸다.”

조지프 히스는 오늘날 정치에서 가짜 뉴스나 조작된 정보에 의존하는 정치적 선택을 하는 현상을 우려했다. 그래서 ‘이성에 근거한 합리성의 정치’를 우리에게 주문한다. 하지만 ‘김일성 가면’을 둘러싼 우리 정치권의 반응은 정확한 정보와 이성에 근거하지 못한 비합리적인 정치의 전형이라 할만하다.

1950년 2월 9일, 미국 공화당 초선 상원의원 매카시는 당원집회에서의 연설을 위해 연단에 올랐다. 그는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미국 정부 내에 있는 공산주의자 205명의 명단이라고 흔들어댔다. 미국 역사에 마녀사냥으로 기록된 매카시즘의 발단이었다. 매카시는 언론들의 지원 속에 반(反)공산주의 전사(戰士)로 떠올랐다. 그러나 미 상원이 조사에 나서자 그는 명단의 숫자를 계속 줄이며 둘러댔다. 애당초 205명의 명단은 그에게 없었다.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흔들어댔던 그의 쇼에 미국 국민들은 놀아났던 것이다.

우리는 매카시즘 같은 마녀사냥의 잘못을 교훈으로 삼으며 역사를 반성하지만, 정작 그 교훈은 쉽게 망각되어 되풀이 되고 만다. 매카시가 흔들어댔던 종이는 한국에서 때로는 ‘NLL 찌라시’나 ‘종북 리스트’로, 때로는 ‘김일성 가면’으로 되살아난다. 아직도 1950년 시절의 유령이 한국정치를 배회하고 있다. 우리들의 이성을 농락하는 반(反)지성주의 정치다. 이런 반지성주의 정치를 걸러내고 지성의 정치로 바꾸어 가는 일, 결국 우리의 몫이다.


※외부 필자의 기고는 <폴리뉴스>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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