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987’에 대한 반응이 뜨겁다. 그 시절을 겪었던 세대는 물론이고 부모들의 역사를 접한 세대까지도 함께 눈물을 흘리며 영화를 보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우리 사회가 보존해야 할 집단기억을 만들어가는데 의미있는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하지만 영화를 본 사람들 모두가 1987년 6월의 승리를 기억하며 환호하는 것만은 아닌 듯하다. 영화 ‘1987’의 끝은 승리의 얘기로 되어 있다. 하지만 1987년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6월 항쟁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12월 대통령선거에서 민주세력의 분열로 정권은 군사반란세력에게 승계되고 말았다. 노태우의 당선이 확정된 12월 16일 아침, 거리의 사람들은 모두 침울한 얼굴로 입을 닫고 있었다. 6월에 승리의 눈물을 흘렸던 우리는, 반년도 되지 않아 다시 패배의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 그 뒤 이 땅의 민주주의는 다시 긴 우여곡절의 역사를 거치게 된다.

그래서 1987년에 대한 기억은 저마다 다르기도 하다. 승리의 기억으로 기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패배의 기억으로 적어놓은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취의 기억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상실의 기억이기도 하다. 1987년이 ‘586’들의 훈장으로 기록되는 것에 대한 불편함을 토로하는 사람들도 있다.

역사에 대한 집단기억이라는 것이 자기 역사에 대한 숭배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아우슈비츠에 대한 집단기억이 역사를 망각하지 않으려던 독일인들의 의지였듯이, 역사에 대한 기억은 여러 가지 색깔을 띠게 된다. 역사란 길게 보면 결국 ‘영’(榮)과 ‘욕’(辱)이 반복적으로 교차하는 것, 어떤 역사든지 반성적 사유가 개입되는 것은 그래서 건강한 모습이다. 우리는 승리의 감격을 기억하는 동시에 반성적 사유를 함으로써 비로소 앞으로 나아가는 역사를 만들 수 있다. 그래서 그 해 6월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우리 역사가 어째서 다시 시련을 겪어야 했는지를 반성하며 부끄러워 하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역사란 한번은 비극으로, 한번은 희극으로 반복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반성적 사유를 통해 비로소 우리는 비극의 반복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승리의 집단기억을 이어가는데 우리가 주저할 필요는 없다. 1987년 민주정부 수립의 꿈이 좌절되었고, 오늘도 약자들의 인간다운 삶이 구현되지 못하고 있으며, 조국이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촛불시민혁명을 다시 거쳐 이만큼까지 온 것은 역사의 커다란 진보임에 분명하다.

삶을 살아가는 실존적 주체로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결과만은 아니다. 역사의 범죄가 자행되고 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했느냐에 대한 기억은 삶의 의미와도 연결되어 있다. 야스퍼스는 나치 독일의 문제에 대한 인간들의 죄를 논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있는 곳에서 불법과 범죄가 자행되고 다른 사람들이 죽어나가는데 나는 살아남았다면, 살아있는 것이 나의 죄다.” (『죄의 문제』)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은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이 자신의 생존에만 열중했다. 바로 그것이 인간들의 도덕적 죄라고 야스퍼스는 고발했다.

그렇기 때문에 1987년을 승리로 기록한 영화 ‘1987’의 시선은 정당해 보인다. 그것은 ‘586’ 뿐 아니라 쫓기는 대학생들을 숨겨주었던 동네 어른들, 동참의 경적을 울리며 달렸던 택시 기사들, 점심 시간에 명동에서 함께 구호를 외쳤던 넥타이부대들... 그 모두의 간절한 마음이 모여 이루어낸 승리였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훈장을 주어도 무방하다. 그것은 세상에 과시하며 세속적 욕망을 이루려는 용도의 훈장과는 다르다. 내가 나에게 주는 양심의 훈장이다. 그것이야말로 그 세대들이 고단한 삶의 여정 속에서도 자신을 지킬 수 있도록 하는, 가슴 속 훈장이다. 그러니 영화가 1987년에 대한 반쪽 짜리 기록이라고 너무 불편해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역사를 위한, 아니 인간들을 위한 우리의 사랑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음을 잊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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