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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창선 칼럼] 적폐청산은 정치 아닌 역사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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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폐청산 대 정치보복’ 사이에서

    ▲지난 10월 11일 서울 여의도 자유한국당 당사에서 열린 정치보복대책특별위원회 제1차 회의에서 김성태 위원장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프랑스에서는 나치에 부역했던 지식인 숙청에 관한 논쟁이 있었다. 가톨릭 신자인 모리악은 지식인 숙청의 지나침과 부당성을 강조하며 화합의 차원에서 ‘그리스도의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적이 우리에게 행한 짓을 우리는 하지 말자. 적보다는 고양된 도덕성을 가지고 우위에 있어야 한다. 심판하자. 하지만 인간으로서의 실수할 권리를 인정하자”라고 그는 강조했다.

    하지만 청년 기자였던 카뮈는 모리악을 반박하며 적극적인 숙청을 주장했다. “내가 정의를 부르짖는 것이 마치 증오를 대변하고 있는 것처럼 얘기하면서, 모리악은 우리가 예수의 사랑과 인간의 증오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처럼 말한다. 우리는 단지 치욕없는 진실을 원할 뿐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자비가 차지할 자리가 없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당시 프랑스 사회는 결국 과거 청산을 위한 대대적 숙청의 길을 선택했다. 치욕의 역사에 대한 정의의 심판이라는 길을 택한 것이다.

    과거 청산을 둘러싼 이 논쟁은 역사의 변혁기마다 흔히 등장하는 상반된 시각을 표현하고 있다. 오늘 한국사회에서 제기되고 있는 ‘적폐청산 대 정치보복’의 논쟁도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이래 지난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있었던 범죄행위들에 대한 단죄가 진행되고 있다. 지난 9년 동안 청와대, 행정부, 국정원, 검찰, 방송계 등에서 자행되었던 각종 불법행위들에 대한 수사와 처벌이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보수야당들은 이를 정치보복이라며 반발하고 있고, 다른 야당 대표는 ‘복수’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지나치게 적폐청산에 매달리는 국정운영에 우려를 표하기도 한다.

    우리는 어느 길을 택해야 하는 것인가. 두 갈래 길이 있다. 하나는 화합을 위해 지난날의 죄를 덮고 용서하며 새로운 출발을 하는 길이다. 다른 하나는 과거의 범죄행위에 대한 단죄를 통해 다시는 그런 일들이 생겨나지 않도록 역사의 교훈으로 삼는 길이다.

    선택의 기준은 어떤 길이 그같은 범죄행위가 반복되는 것을 막는 길이냐 하는 점이다. 만약 용서와 화해의 길이 앞으로 역사에서 재발 방지를 담보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길을 선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가해자의 진심어린 반성이 전제되지 않는 한, 그런 방식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우리는 지난 역사에서 경험한 바 있다. 민주주의를 유린한 인물과 세력에 대한 무조건적 용서는 범죄행위에 대한 그들의 둔감증만 키워줄 뿐 아무런 의미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택할 길은 민주주의를 파괴한 범죄행위들에 대한 역사적 단죄이다. 범죄를 저지른 자는 시간이 지나더라도 언젠가는 처벌받는다는 역사의 교훈이 남겨져야 그마나 그같은 행위들의 재발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이미 90세 나이가 된 나치 친위대 출신 하인리히 보어에게 2010년 전범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했던 이유도, 그런 역사적 교훈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헌법과 법률을 파괴한 적폐들에 대한 청산을 각자의 정치적 이유로 반대하거나 외면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는 정치의 문제가 아닌 역사의 문제라는 인식을 갖고 적폐청산에 뜻을 모을 필요가 있다.

    다만 언제나 경계할 일은 있다. 지식인 숙청을 주장했던 카뮈는, 막상 숙청이 진행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증오의 숙청’을 우려했다. 카뮈는 “가해자들의 증오에 희생자들의 증오가 화답했다”며, 가해자들이 떠난 프랑스에서 피해자들이 증오에 중독된 마음을 치유해야 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내일 우리가 적에게서 거두어야 하는 가장 어려운 승리는 바로 그 증오의 욕구를 정의에 대한 갈망으로 바꾸어놓을 보다 고귀한 노력을 통하여 우리의 내면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증오에 굴복하지 않는 것, 그 어떤 것에도 폭력을 허용하지 않는 것, 우리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정념이 맹목적이 되는 것을 용인하지 않는 것, 바로 이것이 아직도 우리가 프랑스의 우정을 위해서, 히틀러주의에 맞서서 할 수 있는 일이다.” (「지성의 옹호」, 1945년 3월 15일 연설)

    숙청속에서도 카뮈가 강조했던 것은 “우리가 지성을 간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증오를 증오로 되갚지 않을 지성만 지켜진다면, 그래서 정의의 잣대가 공정하게 적용될 수만 있다면, 적폐는 청산되어야 한다. 아직은 더 해야 한다. 다시는 그런 범죄행위들이 발디딜 수 없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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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창선 정치평론가 yucs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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