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흄은 <인성론>에서 “내 손가락에 상처를 내기보다 온 세계가 파멸되는 것을 선호한다고 해서 이성에 반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내 손가락이 다칠지 모르는 순간, 나 이외의 세계는 관심에서 사라지게 된다. 내 손가락을 다치지 않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기 때문이다. 흄에게 윤리는 이성이나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경험의 문제였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이후 여야 정치권의 모습을 보면 내 손가락의 상처, 그러니까 각자의 정치적 주도권과 생존에만 매달리고 있는 광경을 엿볼 수 있다. 정치세력들의 이성이 제대로 발휘되었더라면 아마도 박근혜 정부가 남긴 적폐들을 바로잡고 나라의 정상화를 이루는 일은 훨씬 빠르게 진척되었을 것이다.
 
사실 대선 기간 동안 집권 민주당 뿐 아니라 야당인 국민의당과 바른정당 경우도 ‘적폐’라는 용어만 쓰지 않았을 뿐, 촛불민심 위에서 박근혜 정부의 잘못을 바로잡아 나가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었다. 하지만 대선이 끝나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이후 적폐청산과 개혁은 문재인 정부만의 것이 되고, 다른 야당들은 강 건너 불구경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는 우선 문재인 정부가 드러낸 좁은 리더십의 책임이 있다. 문재인 정부는 집권 시작부터 철저하게 자신들이 주도하며 자기들끼리 하는 개혁의 길을 갔고, 다른 야당들은 적폐청산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듯한 시선을 드러내곤 했다. ‘적폐’라는 보편적 용어가 이제는 문재인 정부만의 정치적 용어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정치권의 분위기가 그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자유한국당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국민의당이나 바른정당 같은 야당들도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적폐청산에 대해 거리두기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적폐청산의 작업은 정치권의 힘을 모아가는 데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촛불민심이 갈망했던 개혁 작업들의 지지부진에는 야당들의 책임 또한 그 이상이다. 자신들도 정권을 잡으면 나라의 개혁을 이루어 내겠다고 했지만, 이제 야당이 되었다고 해서 입을 닫아버린 문제가 한 두 개가 아니다. 모든 것은 문재인 정부가 책임을 지며 할 일이고, 야당은 지켜보면 될 뿐 굳이 손에 흙을 함께 묻힐 생각은 없어 보인다. 더구나 이들 야당은 당장 자신들의 정치적 생존에 관한 고민이 깊을 수밖에 없기에, 집권세력이 주도하는 개혁작업에 눈 돌릴 여유가 없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쨌든 국민과의 약속을 방기하고 있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재벌개혁, 검찰개혁, 국정원개혁, 방송개혁 등 국민적 합의라 할 수 있는 많은 개혁과제들이 표류하고 있다. 국회 입법이 필수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정기국회에서 여야 간의 협치가 작동되어야 할 상황이다.

당장 대표적인 것이 방송개혁 문제이다. KBS와 MBC, 두 공영방송 노조가 파업을 계속하며 사장들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되지 못하고 있다. 방통위가 사태 개입을 조심스럽게 저울질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방송사 문제라는 특수성이 있기에 정치권의 개입이 조심스러운 면은 있지만, 공영방송의 문제라는 점에서 정치권이 지금처럼 책임을 방기할 일도 아니다. 더구나 과거 국정원이 방송사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공영방송들을 어떻게 망가뜨려 왔는지가 백일하에 드러나고 있다. 이쯤되면 무너진 공영방송들을 정상화시키는 것은 여야 정파를 넘어선 국가의 기본질서에 관한 문제이다. 공영방송의 정상화를 방송장악 음모라고 주장하는 자유한국당과는 얘기가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 이외의 정당들은 공영방송의 조기 정상화에 힘을 모아줄 필요가 있다.

물론 야당들이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온 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공영방송 정상화의 결과가 다시 ‘친여(親與) 방송’으로 가버린다면 그 또한 야당들로서는 원치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근거있는 경계심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공영방송 정상화 과정에서 그에 대한 우려를 해소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여야 합의로 마련하면 되는 일이다. 공영방송 사장 선출시의 특별다수제 도입 취지를 살리는 내용, 그리고 대선 캠프에 참여했던 인사가 공영방송 사장을 맡지 못하도록 하는 장치 등이 가능할 것이다. 방송이 정권으로부터의 독립을 이루도록 하는 장치 또한 공영방송 정상화의 중요한 부분이다.

국민적 관심사인 공영방송 정상화 문제가 정치권에서 문재인 정부만의 일로 여겨지며 야당들의 무관심이 계속되는 것은 정상적인 장면이 아니다. 가능한 정당 혹은 정치인들이라도 최대한 공영방송 정상화에 힘을 모으는 노력이 절실하다. 아직은 각자가 내 손가락 아픈 것만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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