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윤 칼럼] 프랑스 대선의 ‘백지투표’ 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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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보다 이틀 먼저 치러진 프랑스 대선 결선투표 양태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프랑스 전체 유권자는 약 4,700만 명으로 우리보다 400만 명가량 많다. 이번 프랑스 결선투표율은 75%로 예전의 80%대 전통에서 적지 않게 떨어졌다. 기존 주류 정치권 후보들이 모두 탈락하면서 의회 의석이 아예 없거나 1석에 불과한 군소정당 후보들이 예선 1,2위에 올라 결선투표를 치른 데다, 중도후보 마크롱의 당선이 확실시되기에 투표율이 낮아졌다는 게 현지의 일반적 평가다.

    유권자 300만 명 조직적 백지투표

    중요한 것은 이번 결선투표 참가자들 중 8.5%인 300만 여명이 일부러 백지무효표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즉, 300만 넘는 유권자들이 어느 누구도 지지하지 않는다는 ‘투표시위’를 한 것이다. 투표용지에 있는 마크롱과 르펜 두 사람 중 하나를 고르는 대신 백지투표용지를 제출함으로써 분명한 정치적 의사표현을 했다.

    “너희 둘 다 아니다”는 의사를 소극적 기권으로 외면한 게 아니라, 일부러 투표장에 가서 백지무효표를 대거 제출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주어진 선택지에서 고르는 게 싫어 외면해버리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제3의 선택’을 한 것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백지투표 동맹’이랄까. 일이 이쯤 되면, 누가 당선되든 이 300만 명의 의사를 무시할 수 있겠는가. 백지투표를 낸 대부분은 결선에 오른 중도후보와 극우후보 둘 다를 마땅찮게 여기는 각급 노조원들로 추정된다.

    백지투표는 세력, 기권표는 흩어진 개인

    프랑스 전체 유권자 4,700만 명 중 300만 명이니 1/15도 못 되는 소수라고 무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들은 백지투표를 통해서 정치세력으로서의 존재감과 정치적 영향력을 과시한 것이다. 기권과 고의적 백지투표는 그 정치적 의미나 무게감이 천양지차다. 조직적 백지투표는 세력이고, 기권표는 흩어진 개인들이다.

    영국이 증기기관을 발명해 산업혁명에 돌입했을 즈음, 프랑스는 공화정혁명을 통해 선거민주주의라는 어마어마한 역사적 창조물을 ‘발명’했다. 집에 있거나 놀러가지 않고 일부러 투표소에 가서 백지를 제출한 이 300만 명. 공화정혁명을 쟁취한 나라의 후예답다. 이게 프랑스 민주주의의 근간이자, 다양성 속에서 새로운 에너지를 찾아가는 힘이 아닐까 싶다.

    프랑스혁명 덕에 전 세계 나라들은 지금 선거제도와 대의민주주의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 어떤 제도도 민중들의 정치적 욕구를 완벽히 구현해내는 제도는 아직 없다는 점에서 대의민주주의의 귀족성과 부작용에 대해서는 일단 논외로 하자. 유권자가 수천만 명에 이르고, 이해관계가 복잡다기한 그물망처럼 얽힌 사회에서 직접민주주의는 그 효용성과 실현가능성에 회의적 요소가 많은 게 사실이다.
     
    77%에 그친 촛불대선투표율 못내 아쉬워

    프랑스 대선의 조직적 무효표를 보면서, 6개월의 가열찬 촛불대장정 끝에 쟁취된 이번 우리 촛불대선의 투표율이 77%에 그친 게 다시 한 번 아쉽다.

    수업 진도는 한꺼번에 잡아 빼지는 게 아니라는 걸 새삼 느낀다. 1장에서 바로 5장으로 갈 수야 없는 법. 먼저 수업 받은 학생들의 경험에 비추어 2~4장까지의 수업에 걸리는 시간을 최대한 단축하고, 우리도 5장, 6장, 7장으로 넘어가기를 바란다. 200년 걸린 프랑스 민주주의에 70년 한국을 바로 대입하려는 건 아니지만, 똑같이 200년을 투자하기에 우리 정치-사회에서 도려내야 할 비민주적 요소는 너무 많고, 시간도 충분치 않다. 역사의 반동은 어느 틈바구니에 숨어 호시탐탐 역전을 노리고 있을지 모르므로.

    시간을 압축적이고 효율적으로 써야하는 건 산업화뿐만이 아니다. 뭐든 서둘러 쫓아가야 하는 게 우리 숙명인가. 피곤하고 힘들긴 하다. 그래도 어쩔 것인가. 가야 할 길이라면 뚜벅뚜벅 한 눈 팔지 말고 가야 한다. 투표는 그 첫 걸음이다.

    이강윤 칼럼니스트 기자 lkyprah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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