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이 지난 12일 오후 청와대를 떠나 서울 삼성동 사저에 도착하며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박근혜 전 대통령이 지난 12일 오후 청와대를 떠나 서울 삼성동 사저에 도착하며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올해 고2가 된 아이가 두 가지를 물어왔다. “산 속에 움막 짓고 사는 것도 아닌데 왜 ‘자연인’이라고 하는 거예요?” “태극기집회 하다가 세 명이 사망했잖아요? 그런데 뉴스 보니까 그 어른들이 경찰을 공격하고 경찰버스를 빼앗아 차벽에 부딪치다가 스피커가 떨어져 사망한 거라면서요. 백남기농민 때는 물대포도 쏘고 그랬는데, 이번처럼 경찰에게 폭력을 휘두르면 경찰이 못하게 막아야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을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제 딴에는 답답하고 어이가 없어서 하는 질문이었지만 듣는 나도 답답하고 어이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이에게 좀 부끄러웠지만 사실 똑부러지게 뭐라 답하기 힘들었다. 

“산 속에 움막 짓고 사는 것도 아닌데 왜 ‘자연인’?”

헌법재판소가 대통령탄핵소추안 인용결정을 내린 뒤의 양상을 보면 뭔가 대단히 잘못되어가고 있다. 탄핵이 인용된다고 해서 곧바로 그게 문제해결일 거라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해결의 시작점에 설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후의 형국은 국정농단사태를 처음 들었을 때의 황당함과 어이없음에 뒤지지 않는다. 

민간인 신분으로 바뀌고 나서도 사흘을 더 청와대에 무단 거주하다가 겨우 나온 박근혜 씨는 단 한 마디도 없이 삼성동 자택으로 돌아갔다. 집 어귀에 이르러서는 금의환향하는 사람 마냥 환하게 웃으며 손도 흔들고 사람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눴다. 오랜 시간 꾸민 듯 예의 그 단정한 올림머리로. 

사람도 회처럼 자연산과 양식이 있나?

아이가 자연인이 뭐냐고 물었을 때, 나도 그만 어이가 없었지만 우리 언론은 이번에도 참으로 기막힌 ‘조어 신공’을 선보였다. 자연인. 사람도 회처럼 자연산과 양식이 있다는 말인가? 아니면 인조인간과 대비되는 자연인? 민간인이란 단어를 쓰면 되는데, 법적 용어가 아님은 물론 사전에도 없는 그런 희한한 단어를 고안해냈는지 민망하다. 

어쨌거나 그 ‘자연인’은 환히 웃으며 자택으로 돌아와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진실은 꼭 밝혀질 것”이라고 했다. 헌재 결정에 승복한다면 도저히 할 수 없는 말이었다. 한 마디로 아직도 죄의식이 없고, 그저 억울하다며 앙앙불락하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말이다. 

아직도 죄의식 전혀 없이 앙앙불락 

탄핵 결정 이후의 ‘언어도단’ 사례 몇 가지를 살펴보자. 청와대가 비워진 뒤 청와대 문서들이 어떻게 관리되는지는 이번 국정농단사태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만일 증거를 인멸했으면 최소한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고, 박근혜정부 4년간의 국정 주요맥락을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며, 뭣보다도 앞으로 진행될 수사에 중요한 자료나 단서가 될 수 있다. 지금 그것들이 어떻게 관리되고 있는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 

보좌할 대통령이 없는데 청와대비서실 사표 반려 

둘째. 알다시피 대통령비서실은 대통령을 보좌하는 국가기관이다. 보좌할 대통령이 없으면 대통령비서실은 대통령 지위상실과 동시에 존재 근거와 이유가 없어지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현행법에 따르면, 대통령 직무정지 중에는 대통령비서실은 대통령권한을 대행하는 국무총리에게 귀속된다. 그러나 대통령 궐위 시에는 보좌할 대통령이 없으므로 비서실은 당연히 그 직에서 물러나는 게 맞다. 

‘청와대’라는 시설과 그 안의 기록물 등을 유지-보존할 최소한의 실무 인원만 남기고 대통령비서실의 모든 직원은 사퇴하는 게 순리다. 대통령권한대행은 기존 국무총리비서실의 보좌를 받으면 된다. 존재 근거가 없는 조직에 왜 국고를 두 달 간이나 써야 하는가. 

그런데 14일 황교안 국무총리는 대통령비서실 전 간부들의 사표를 일괄 반려했다. 대통령탄핵안 인용과 동시에 청와대의 모든 인력과 예산은 동결-중지되었어야 한다. 그런데 황 총리는 또 한 번 이해받기 어려운 결정을 했다. 

‘법 앞에 평등한 만인’의 한 사람으로 조사받아야

국민들은 탄핵안 인용이 결정된 그 순간 박 전 대통령이 ‘법 앞에 평등한 만인’의 한 사람으로 돌아와 조사받을 게 있으면 조사받고, 벌 받을 게 있으면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그게 법이고, 상식이다. 박 전 대통령은 현재 형사피의자다. 

그런데 삼엄한 경호 속에 자택으로 돌아간 박근혜 씨는 자신의 정치적 호위무사들을 집으로 불러 메시지도 전하게 하고, 보좌진용까지 만들어 역할분담을 했다고 한다. 이런 비상식적 모습을 보려고 석 달간 그 추위에 때로는 1박2일 노숙을 하며 광장을 지키고 촛불을 들었는가. 왜 국민들은 아직도 ‘무슨 반격이 있을지 모른다’는 일말의 터무니없는 걱정을 해야 하는가. 왜 이 나라의 공적 권력과 기능은 상식적으로 작동되지 않는가. 

죄의식이 없는 민간인 박근혜 씨의 몽니는 백보 양보해서 이해해줄 수 있다고 치자. 그 몽니를 부리지 못하게 하는 것, 상식을 세우고 정의의 기치를 높이 드는 것이 국민의 대표인 국회가 할 일 아닌가. 두 달도 채 남지 않은 대선으로 우르르 달려가버려 텅 빈 국회를 보면서 주권자들은 또 한 번 답답해하고 있다. 머슴들에게 언제까지 “뭐뭐를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일일이 알려줘야 하는가. 

친박 지지자들, 삼성동 주민에 “이사가라” 폭언

태극기집회 참가시민 3명이 사망한 날 경찰은 갑호 비상근무체제였다.  그런데도 경찰은 전혀 비상하게 대응하지 않았다. 촛불집회 시민들은 경찰을 단 한 번도 공격한 적이 없다. 그러나 태극기집회 참가자들은 격렬하게 공격했다. 최소한의 자위권 발동 차원에서라도 대응했으면 시민 사망이라는 인적 피해를 막을 수도 있었다. 백남기농민 사건 때는 과잉대응이더니, 지금은 직무유기다. 

박근혜 씨가 자택으로 돌아간 뒤 그의 지지자들은 삼성동 자택 앞에서 한 달 간 집회허가를 받아뒀다고 한다. 그들의 소란에 항의하는 삼성동 주민들에게 “당신들이 이사가라”며 폭언을 일삼으며 소란피우고 있다. 

다시 묻는다. 경찰의 임무는 뭔가. 평화집회를 허가한 것인가, 이웃에게 피해를 주는 집회까지 허가한 것인가? 법적 용어로 탄핵인용이지, 쉽게 말하자면 무혈혁명이 성취된 것인데 왜 대한민국의 공적 기관들은 기본 임무조차 방기하고 있는가. 입법 사법 행정 모든 국가기관이 혹시 “새 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대강 지내고 있으면 알아서 잘 되겠지…”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탄핵 인용발표 날 광장에 등장한 “이게 나라다 이게 정의다”라는 푯말에 부끄럽지 않은가. 

이런 상태로는 새 정부 아니라 ‘새새새 정부’가 들어서도 바로잡기 쉽지 않다. 국회와 행정부는 속히 제 기능과 권한을 행사해야 한다. 오늘의 이 사태를 가져온 연유를 따져 지금 당장 ‘스스로’ 바뀌고, 어제와 결별해야 한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교훈은 초등학교 교실 급훈 액자 속에나 있는 죽은 글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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