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국가로 가는 길



지난해 12월 12일 동국대 상생과통일포럼 리더십 최고위과정 6기 21번째 강의는 ‘복지국가’를 주제로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이 강의했다. 

다음은 오건호 공동운영위원장의 이날 강의 전문이다.

제가 다룰 주제는 복지국가 가는 길이다. 2012년 총·대선 때 복지국가 담론이 피크였고, 여야후보 모두 공약으로 내걸었기 때문에 2013년도부터 우리는 복지국가에 살아야 된다. 지금 대통령 공약은 ‘한국형 복지국가’였다. 그런데 한 4년 지나고 나니까 주위에서 ‘좀 시들해진 것 아니냐’ 이런 이야기를 한다. 돈도 부족하고, 우리나라 복지 인프라는 상당히 민간중심이어서 재정이 투입된 만큼의 복지효과가 나는지에 대한 의문도 있고, 여러 가지 장벽들이 있다. 그렇다 보니 ‘복지국가 가는 길’ 하면 복지국가로 가기 어려운 이유가 더 많이 떠오른다. 복지국가라는 저 봉우리에 가려면 검토해야 할 것이 많지만 제 활동경험을 토대로 가장 핵심적인 것과 생각하고 있는 바를 말씀 드리겠다. 

지금으로부터 6년 전인 2010년 무상급식을 시작으로 복지논쟁이 벌어졌다. 그전까지 한국 사회에서 복지는 많은 사람들이 권리로서 생각하지 않았다. 10년 전 대한민국에서 복지를 받는다는 것은 불가피하게 국가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즉, 내가 시장에 나가 일자리 얻어서 내가 먹을 것은 내가 챙겨야 되는데 그러지 못하니까 국가에 의지하게 되는 것, 일종의 시장에서의 실패를 의미했다. 또 그 당시 복지혜택을 줄 때 엄청 낙인을 찍었다. 기억나실지 모르겠는데 옛날 초등학교 때 불우이웃 친구를 돕기 위해 모금을 하고, 그걸 강당에 다 모아놓고 수여식을 하고, 그 친구는 또 감사의 말을 전하게 했다. 복지학 박사과정을 공부하는 후배는 자신이 이 학문을 공부하는 이유라면서 자신의 어릴적 경험을 얘기했다. 앞에 나와 감사의 말을 하는데 자신이 너무나 슬펐다고 한다. 

서로 돕는 복지는 아름답다. 주면서도 받는 사람의 마음을 배려하는게 복지의 완성일 것이다. 그런데 주는 자의 입장에서 ‘내가 선의를 베풀었다, 착한 일을 했다, 천당 가겠다’ 이런 거다. 그게 전반적으로 10년 전까지의 복지다. 그래서 사람들이 먹고 사는걸 국가에 의지하기 보다는 ‘열심히 공부해라, 좋은 대학 들어가야 된다, 좋은 회사 들어가서 버젓하게 일자리 잡아라’ 이런 거였다. 

그런데 2010년 무상급식 논쟁을 시작으로 바뀌었다. 아직도 보편·선별 논쟁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지는 않다. 선별복지를 지지하는 사람도 많고, 여전히 선별복지가 진게 아니라는 사람도 있다(참고로 저는 보편복지를 지지했다). 정치적 지형 속에서는 아직도 보편과 선별이 대립각을 세우고 있지만 국민들의 인식 속에서는 복지의 상이 바뀌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옛날에는 ‘책임지지도 못할걸 왜 낳았냐’ 이랬는데 이제는 ‘애 둘 낳았으면 애국했으니 나라가 책임져야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지금까지 대한민국을 이렇게 만들었는데 그깟 기초연금 20만원을 못 주냐’ ‘잔병들은 내가 치료하지만 큰 병 걸리면 어떻게 가정이 그걸 다 책임지냐’라고 말한다. 박근혜 후보도 4대 중증질환부터 100% 국가에서 책임지겠다고 약속했다. 그걸 받으면서 부끄럽고 비굴한게 아니고 정당하게 요구한다. 그런 면에서 지난 6년 동안 권리로서의 복지 인식이 생겨난 것은 굉장히 큰 성과다. 

복지국가는 무엇인가요?

오늘 강의가 ‘복지국가로 가는 길’이기 때문에 당연히 가는 곳의 실체에 대해서 이해를 해야 되는데 이것은 사실 딱 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한국에서 복지국가를 이해하는 전통적인 방식이 있다. ‘복지국가가 되었으면 좋겠어!’ ‘나도 스웨덴에 살았으면 좋겠어!’라고 얘기할 때, ‘거긴 아파도 병원비가 안 든다며?’ ‘대학원까지 무상이라며?’ 이런 거다. 아주 기본적인 생활을 사회가 책임지는 것, 거꾸로 이야기하면 내가 대한민국에 살면서 주거비, 병원비, 등록금 이런것 때문에 너무 힘이 드니까 이것을 사회가 보장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거다. 즉, 복지국가는 ‘의료비 걱정 없고, 교육비, 주거비 걱정 없이 나라가 해결해주는 곳’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복지국가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페르 알빈 한손(Per Albin Hansson)
▲ 페르 알빈 한손(Per Albin Hansson)
그런데 복지국가의 폭을 조금 더 넓혀서 스웨덴 국민들에게 물어본다면? 우리처럼 정치와 책을 통해 복지국가 논쟁을 하는게 아니고 할아버지, 아버지, 엄마 때부터 복지국가에 살고 있고, 또 어린 시절부터 성장과정에서 복지국가를 경험한 사람들이라면 그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모든 아이가 모두의 아이로 여겨지는 나라” 스웨덴에서 복지국가를 표상하는 상징적인 구호다. 

1920년대 당시 스웨덴 사민당 당수 한손(Per Albin Hansson)이 국회연설에서 제안한다. ‘우리 사민당은 앞으로 조국 스웨덴을 국민의 집(Peaple’s Home)으로 만들겠다. 우리가 밖에 나갔을 때는 서로 경쟁하고 격차가 있을지 모르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서로 의지하고 협력하고 공존한다. 우리 온 스웨덴 국민들이 화목한 하나의 집에 사는 것처럼 그런 나라를 만들겠다. 그것이 복지국가다.’ 

그러면 복지국가에 대한 두 가지 대답이 있을 수 있다. 의료비 걱정 없고, 나라가 등록금을 해결해주는 지극히 양적이고 물질적인 가계비 절감 차원에서의 대답이다. 또 하나는 관계와 가치다. 모든 아이들이 모두의 아이로 여겨지는, 대한민국 국민이 시장에서는 서로 높낮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이 시스템 안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것을 같이 책임지는 것이다. 여기는 관계 혹은 협동공존연대라는 가치가 들어있다. 

1. 복지국가의 이해: 두 기둥

복지국가는 두 개의 기둥을 가진 집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서는 이것이 외기둥 집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예전에 민주당에서 3+1, 3무1반을 주장했다. 무상급식, 무상보육, 무상의료, 반값 등록금이다. 지난 총선에서 아동수당 얘기가 나왔다. 기초연금도 벽돌을 계속 쌓아 올려간다. 복지국가가 만약 5층짜리 집이고 지금 2층 정도 올라왔다면 계속 벽돌을 올리면 된다. 그런데 두 번째 질문에 주목하게 되면, 복지국가는 하나의 기둥만으로 이뤄질 수 없는 두 개의 기둥을 가진 집이다. 복지는 벽돌 하나하나마다 치열한 갈등이 내재되어 있다. 다른 어떤 것보다 내 호주머니에서 나가는 것과 다시 나한테 들어오는 것의 양적 차이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번 기초연금이 됐다고, 무상급식이 됐다고 계속 가는게 아니다. 언제든 갈등이 있을 수 있고, 또 그것을 끌어올리기 위해서 정치적 에너지가 필요하다. 

따라서 벽돌 하나를 쌓는 것뿐만 아니라 그 벽돌이 계속 공고해질 수 있도록 지키는 힘, 혹은 더 키워가는 힘이 필요하다. 이 힘은 세력이고, 이 세력은 관계망이다. 관계망은 그냥 생기지 않는다. 최소한 우리 사회에서 아이를 보살피면서 얻게 되는 공동의 경험이 있을 때 무상보육이나 공공보육, 이를 계속 지키고 키우고자 하는 이해관계, 혹은 가치를 가진 공동체가 생성된다. 

복지 6년 되돌아보기

무상급식이 이뤄졌는데 10조 안팎의 돈이 투입되는 굉장히 큰 복지다. 기초연금으로는 11조원이 들어간다. 기초노령연금은 노인 빈곤이 심각하기 때문에 굉장히 요긴한 복지다. 그래서 양적인 효과는 내고 있다. 그런데 이 돈이 투입됨으로써 사회적 관계에는 어떤 변화가 생겼을까. 과소평가하는지는 모르지만 새로운 벽돌의 도입만큼 다른쪽 벽돌은 너무 미약하다는 생각이다. 복지국가의 집이 제대로 지어지려면 두 기둥이 같이 올라가야 된다. 그리고 이 기둥은 훨씬 더 많은 땀과 노력이 필요하다. 복지국가로 가는 길의 핵심은 한쪽 벽돌을 쌓아갈 때 그에 걸맞는 경험, 관계, 세력을 형성시켜 나가는 것이다. 

 

2. 보편복지 판정승, but 재정 장벽

이런 문제의식에서 지난 6년을 잠깐 돌아보겠다. 선별복지는 일차방정식이다. 채워야 될 괄호가 하나다. 돈이 이만큼 있는데 어떤 식으로 지출하면 좋을까? 어려운 사람부터 주는게 정답이다. 일상적인 지출의 논리다. 그런데 보편복지는 권리로서 모든 아이들에게 급식을 주고, 모든 어르신들한테 기초연금을 드려야 한다고 지출방식을 바꾼다. 그럼 돈이 더 많이 들텐데 그 돈을 다 어떡하지? 즉, 세입의 괄호까지 채워야 비로소 답이 나온다. 어떻게? 부자감세 철회하고, 4대강사업비로 충당해라. 그러면 띵동~하고 방정식이 풀린다. 모두한테 주고 더 필요한 재원은 마련해라. 이게 보편복지의 2차방정식이다. 

정치적 논쟁에서는 보편복지가 판정승을 했다고 본다. 그런데 보편복지는 뭔가? 재벌 회장님한테도 20만원 드리고 부잣집 아이들한테도 밥을 주자는 거다. 선별복지를 주장하는 보수쪽에서는 그런 돈 있으면 어려운 사람들 더 줘야지, 이렇게 이야기 한다. 그러다 보니 서로 헷갈린다. 진보가 상위계층을 옹호하고 보수가 더 어렵고 절박한 사람을 옹호한다. 보수-진보가 바뀐거 아닌가? 진영논리이다 보니까 야권은 계속 보편, 여권은 선별, 했지만 이걸 지켜보는 많은 시민들은 사실 헷갈렸을 것이다. 

이런 혼란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보편복지 쪽에서는 발테르 코르피(Walter Korpi)라는 스웨덴 사회학자가 만든 재분배의 역설 논리를 얘기했다. 선별복지와 보편복지, 둘 중 선별복지가 더 재분배의 효과가 클 것 같지만 서구 복지국가 형성과정을 보니까 보편복지를 제공하는 나라에서 소득격차가 더 줄었다. 일반 상식과는 좀 어긋난다. 본인도 놀랐는지, ‘재분배의 역설’이라고 이야기 한다. 사실 모든 사람들에게 복지를 제공한다고 해서 재분배가 더 커지지는 않는다. 이런 결과가 나온 이유는 하나의 매개변수가 있다. 바로 재정규모이다. 가난한 사람들한테만 20만원을 주다가 25만원으로 올려주려면 돈은 어디서 나오나? 부유층에서 나온다. 그런데 세금 좀 더 내라고 하니까 더 이상 못 내겠다고 한다. 이들은 권력을 가진 쪽이다. 그래서 이들을 이기지 못하고 할 수 없이 20만원으로 굳는다. 

그런데 모두에게 20만원을 다 주고 ‘노인의 권리로서 기초연금을 다 누리고, 또 세금은 자신의 소득과 능력에 따라 냅시다!’ 했더니 내더라는 거다. 상위계층도 연금을 받게 되니까 20만원 주고 1000만원을 세금으로 가져온다. 그리고 남은 980만원을 1/N 해서 모든 노인의 기초노령연금을 인상시켰다. 결과적으로 선별복지를 하면 20만원으로 고착화되는데 보편복지를 하니까 25만원으로 올라가더라는 거다. 상위계층에게 기초연금이 20만원에서 25만원으로 올라가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문제는 하위층 노인의 연금을 올려야 되는데 결국 올라갔다는 거다. 그래서 격차가 줄어든다. 이것이 보편복지의 역설이다. 

사실 이 역설이 이뤄졌던건 세금정치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상위계층에게 증세하는 압박이 보편복지가 훨씬 더 유리하다는 것이다. 물론 반드시 보편복지가 증세에 성공한다는 것은 아니다. 보편복지를 수레로 비유하면 두 개의 바퀴를 가진 수레다. 한쪽은 지출바퀴, 한쪽은 세입바퀴다. 지출이 그전보다 늘어나면 수레가 앞으로 가기 위해서 세입도 같이 늘어야 한다. 지난 5~6년 동안 대한민국 보편복지에는 어떤 일이 벌어졌느냐, 박 대통령이 공약한 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복지가 꽤 늘었다. 하지만 세입바퀴는 딱 제자리다. 그럼 이 보편복지는 어떻게 될까? 앞으로 굴러가지 않고 제자리에서 빙빙 돌게 된다. 재정 장벽이다. 그래서 지난 몇 년간 보편복지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 

3. 복지의 불균등발전

 
두 번째 문제는 중앙정부가 시행하는 복지가 300여 개 되는데, 이걸 분류하면 세 개의 집단으로 묶을 수 있다. 1) 공공부조다. 가난한 사람에게만 주는 복지이고 선별복지다. 애초 DNA가 선별이다. 그런데 선별될 사람이 선별되지 않아서 문제다. 부양의무자 제도, 재산을 소득으로 따져서 실질적으로 내 호주머니에 돈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가공의 소득이 있다고 간주해 기초수급에서 탈락시킨다. 우리나라는 굉장히 엄격하다. 공공부조는 지난 6년 동안 제자리 걸음이다. 

2) 사회보험이다. 건강보험, 국민연금 등 이 보험들은 취업자, 돈을 버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다. 그리고 DNA는 보편이다. 차별하지 않고 노동시장에 있는 사람은 다 포함된다. 실업급여를 주고, 연금을 주고, 건강보험을 주지만 그냥 주지 않고 조건이 있다. 보험료를 내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노동시장이 ‘그’에게 보험료를 낼 형편을 만들어주지 못하는 거다. 혹은 그것을 지원할 여력을 중소기업 사용자들한테 주지 못했다. 그리고 지역가입자들은 너무 어려우니까 여러 가지 방식으로 회피한다. 그래서 DNA는 보편이지만 사각지대가 많다. 

3) 아직 노동시장에 들어오지 않은 사람들이다. 아이들, 학생들에게 급식, 보육, 교육을 준다. 또 노동시장에서 나온 사람들, 은퇴자들에게 기초연금을 드리고 장기요양서비스를 한다. 지금은 보편으로 시행되고 있지만 애초 10년 전 DNA는 선별이었다. 즉, 이 복지들은 정해지지 않았다. 그때그때 달라진다. 그래서 가난한집 아이들한테만 급식을 지원할 수도 있고 가난한 어른들에게만 연금을 드릴 수도 있고, 모두한테 지원할 수도 있다. 

스웨덴은 얼마 전까지 우리 돈으로 120만원 정도를 모든 어르신들한테 드리는 강한 기초연금 제도였다. 우리처럼 연금이 두 개인데, 세금을 재원으로 하는 기초연금이 있고, 자신의 보험료를 재원으로 하는 국민연금 같은게 있다. 지금은 국민연금은 그냥 있고, 기초연금은 하위 45% 어르신들에게만 드린다. 왜냐면 노인수가 자꾸 늘어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원래 박근혜 대통령이 기초노령연금 100%를 공약으로 내세웠지만 현재는 70%다. 그러니까 보편-선별 논쟁이 바로 이 부분에서 생긴다. 급식 논쟁, 보육 논쟁, 기초연금 논쟁이 생긴다. 새로운 수혜자는 중간계층 이상자들이다.

무상보육 관련된 영유아보육법, 기초연금법이 있고, 무상급식은 지자체 조례로 이루어진다. 기초연금은 법에 정해져 있기 때문에 선배정 한다. 무상보육 선배정하고, 급식을 선배정해야 된다. 그런데 지자체나 중앙정부나 교육청 수입은 5년 동안 똑같았다. 기초연금 평균 국고보조율은 75%다. 10만원 드릴 때는 중앙에서 7만5천원, 지방에서 2만5천원을 매칭했다. 그런데 20만원으로 올랐기 때문에 중앙에서 15만원, 지방에서 5만원을 매칭한다. 의사결정은 중앙에서 이뤄졌는데 지자체는 2만5천원을 더 내야 된다. 

지자체가 행하는 자체 복지사업들이 있는데 이것은 대부분 지역에 있는 어려운 사람들, 기존 중앙정부 복지제도의 틈새로 들어간다. 한부모, 독거 이런 사람들이다. 그런데 지자체도 세입이 달리고 보편복지의 선 의무지출에 예산이 배정되다 보니까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의 복지를 줄인다. 서구에서는 보편복지가 재정확충에 성공해 전체 재분배의 효과를 더 냈는데, 한국에서는 보편복지화가 지출에는 그럭저력 성공했지만 세입 장벽에 부딪힘으로써 중상위계층의 복지는 늘어가는데 하위층의 복지는 더 내려가는, 오히려 거꾸로 된 결과를 낼 수도 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을 ‘복지의 불균등 발전’이라고 이름 붙였다. 

왜 그럼 가난한 사람들의 복지가 뒤쳐지고 제자리걸음일까? 그건 힘이 약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가계의 지출원리는 절박성이다. 그런데 예산은 다르다. 어떻게 우선순위를 정할까? 절박한 사람부터? 아니, 힘 센 사람, 목소리 큰 사람부터 가져간다. 가난한 사람들의 복지를 올리려면 결국은 중간계층의 향배가 중요하다. 보편복지는 중간계층한테도 수혜가 가니까 그들이 동의하는데, 가난한 사람들의 복지는 세금부담만 커져서 이해관계가 어긋나게 된다. 이것이 또 하나의 과제다. 

4. 복지확대의 경제주의

세 번째 문제는 복지가 지극히 양적 선물 식으로 정치권이 위에서 툭툭 던져주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2012년 전후해서 정치권에서 복지확대 경쟁이 붙고 일종의 복지포퓰리즘이 여야에 다 작동했다. 이때 포퓰리즘은 정책 그 자체가 틀렸다는게 아니고, 목표를 구현하는데 있어서 실질적인 수단을 담보하지 않은 채 약속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국민들 입장에서, 준다면야 받지만 진짜 그걸 줄 수 있을까? 계속 받을 수 있을까? 그러다 안 줄거면 차라리 약속을 하지 말지… 이런 개인의 입장에서 복지를 받아들인다. 만약 새롭게 확충되는 복지가 이해관계 당사자와 시민들이 같이 땀 흘려 협력의 결과로서 얻은 거라면 주인으로서 내 복지를 내 농사의 농작물로 볼 텐데 자꾸 선물로 인식할 수 있다. 

 

복지 지형의 변화

5. 지형의 변화: 복지정치의 지역화

지난 6년간 복지정책이 펼쳐지는 과정 속에서 새로운 지형의 변화가 생겨나고 있다. 첫 번째, 복지를 둘러싼 정치가 지역화되고 있다. 그전에는 여의도, 국회에서 공중전을 벌였다. 그러면 각 지역에서 시민들이 여의도는 왜 맨날 싸우나, 저런다고 복지가 늘 수 있을까? 우려 반, 기대 반, 일종의 옵저버로 보고 있었는데 지금은 달라졌다. 담론에서 의제로의 지형변화가 보인다. 이제 ‘나는 보편 찬성해!’ ‘선별 찬성해!’ 이 논의 방식은 매력적이지 않다. 그전에 여의도에서는 국회의원들, 전문가들이 무상급식을 보편과 선별을 가지고 다퉜는데 이제는 급식을 먹는 학생들, 그 부모들, 조리사들, 영양사들, 혹은 재료를 공급하는 농민들, 학교운영위원들이 무상급식에 대한 자기 의견을 낼 수 있다. 그렇게 될 때는 보편, 선별방식이 아니고 이 의제, 무상급식이 실제로 얼마나 잘 진행되고 있는지에 대한 논쟁이 된다. 그리고 그것에 따라 승부가 결정될 것이다. 급식을 둘러싼 관계자들이 비로소 직접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두 번째는 중앙에서 지역으로 내려왔다. 이제는 여의도에서 여야가 복지 가지고 크게 싸우지 않는다. 이제는 중앙정부와 지자체가 싸우고, 중앙정부와 교육청이 싸운다. 여의도에서 싸움이 일어나면 비판했는데 우리 단체장이 싸우고 우리 교육감이 싸우게 되면, 그리고 또 실제로 그런 복지가 이뤄지고 있기 때문에 학부모, 지역주민의 체감이 달라질 수 있다. 

세 번째는 서울 같은 경우가 독특한데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 또 주민센터와 복지시설 등 지역에 있는 여러 지역조직들을 다 엮어서 일종의 동마을 복지 통합 거버넌스를 꾸렸다. 목표는 사각지대에 있는 어려운 이웃을 찾아가는 것이다. 신고제이다 보니까 사각지대에 있는 분들은 정보도 얻기 어려워서 홀로 있다 돌아가시기도 하는데 이런 일을 공무원에게만 맡기지 않고 온 마을이 나서도록 하는 거다. 

6. 아래로부터 ‘의제별’ 진지전

그러다보니 행정과 복지시설과 지역주민들이 만나서 복지얘기를 시작하게 된다. 복지라는 의제를 둘러싸고 얘기하고 실제로 관계망이 마을지역에서 형성되고 있다고 본다. 담론에서 의제로, 중앙에서 지역으로, 그리고 마을에서의 새로운 관계망의 형성이다. 이제 실제 복지를 둘러싼 당사자들이 모여 토론하고 가치의 찬반을 벌일 수 있는 그런 공간들, 아래로부터의 지역주체가 형성되는 지형의 변화가 있다고 본다. 그전에는 위로부터 담론 중심의 논의지형이었다면, 이제는 아래에서 실제로 이해관계자들이 지역공동체에서부터 갑론을박을 벌이면서 장이 마련되는 거다.

 

사회연대 복지국가

7. 복지국가 비전 만들자!

요즘 워낙 노동시장이 불안정하고, 또 노인수가 많다 보니 그게 국가복지로서 다 감당할 수 있는 건가 해서 복지국가에 대한 회의론도 등장한다. 한편에서는 4차 산업혁명으로 AI가 등장하면 일자리가 없어질테니 아예 다 줘버리자는 기본소득 이야기도 나온다. 옛날에는 국가와 사회 중심으로 기본 생계망을 이야기할 때 복지국가가 한 축이었는데, 이제는 토론거리가 더 넓어졌다. 

우리사회가 복지국가로 가는 길에 있어서 지나치게 양적 담론 중심의 인식을 이제는 관계와 질의 문제에 주목해야 된다고 본다. 무상보육이 실행되고 있지만 보육복지에 대한 만족도가 그리 높지 않다. 장기요양보험이 있어서 그전에 비해 본인부담금이 많이 줄었지만 서비스가 너무 안 좋아서 계신 분이나 맡기는 자녀들 마음이 굉장히 무겁다. 충분한 관리능력이나 검증 없이 우후죽순으로 요양시설 인가를 하고, 베드 하나 채우면 수가를 주는 방식이다 보니 이렇게 된다. 

2012년 대선 때 후보마다 복지국가 공약이 있었다. 한국형 복지국가, 정의로운 복지국가, 행복한 복지국가, 역동적인 복지국가… 앞에 형용사만 달리 했을 뿐 차별이 없다. 무상의료, 무상보육, 다 똑같았다. 그리고 지금 보편복지로 몇 개가 진행되고 있지만 사람들이 이렇게 해서 복지국가가 될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다. 이 길이 등산로라는 확신이 생기면 발걸음이 가볍고 힘이 생기지만 이렇게 해서 저 꼭대기까지 갈 수 있을까? 확신이 안서면 무척 힘들다. 이제는 복지국가에 대한 비전과 로드맵을 좀 밝혀야 한다고 본다. 이 정책이 전체 로드맵에서 몇 층에 들어가고, 저쪽 기둥과 어떻게 연결되고 하는 설계도가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다. 현재 유일한 길은 ‘무조건 제가 당선되면 됩니다.’ 이런 거다. 

특히 우리나라는 민간 인프라 중심으로 복지가 제공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좀 더 공적 인프라로 바꿔야 한다. 유럽은 전체 합쳐서 의료비 지출이 GDP의 8~9%정도 된다. 민간의료보험인 미국은 두 배를 쓴다. 그런데 국민들의 의료만족도, 또는 의료형평성에서 보면 유럽이 훨씬 앞선다. 양도 중요하지만 어떤 시스템으로 복지가 운영되느냐에 따라 유럽은 만족도가 달라진다. 민간인프라에 의존하는 방식으로는 결국 질 좋은 서비스가 갖추어지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어떤 복지벽돌을 쌓던지 이제는 그 속에서 국민들이 새로운 복지에 걸맞는 경험, 또 하나의 공동체성을 느낄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 있어야 한다. 복지의 균등발전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 전통적 계층이론에서는 중간계층이 가난한 사람들의 복지를 강하게 지원하지 않을 거라고 본다. 그런데 서구에서는 어떻게 어려운 사람들의 복지도 올릴 수 있었을까. 그것은 자신의 계층적 지위와 무관하게, 혹은 그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관계망들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회사에 들어가는 순간 과장, 부장, 이렇게 하이라키가 정해져서 개인의 윤리적 가치와 무관하게 회사의 수익에 목매고 살아야 된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면 또 하나의 공간이 있다. 그게 지역사회다. 회사에서는 경쟁력이 뛰어난 사람이 대우 받지만 이곳의 핵심 원리는 협동과 양보이다. 그런 면에서 복지정치가 지역으로 내려와 지역에 새로운 관계망이 형성되고 있다는게 중요하다. 그런걸 에너지로 해서 복지의 균등발전도 일어날 수 있다고 본다. 

 
8. 사회연대 의제별 네트워크

앞으로 지역에서 사람들이 자주 만날 수 있는 의제망들을 만드는게 굉장히 중요하고, 정치권에도 결국은 표를 통해서 제도적 의사결정에 자신의 힘을 키워야 되는데 그럴려면 서포터스가 많아야 된다. 우리 정당이 지향하는 가치를 지지하는 서포터스들이 시민사회에서 활성화되는게 저는 중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제가 일하고 있는 시민단체들이 이런걸 과제로 삼고 있다. 

‘건강보험 하나로’라는 운동이 있는데, 이것은 민간의료보험에 의존하지 말고 공적 국민건강보험 하나로 병원비를 해결하자는 운동이다. 100만원 상한제는 1년에 든 총 병원비 중에서 본인이 100만원만 내는 거다. 병원비가 연간 300만원이면 본인 100, 건보 200, 1억이면 본인 100, 건보 9900 이렇게 된다. 그런데 이걸 하려면 건강보험 재정이 커져야 된다. 지금은 딱 60% 보장을 할만큼의 재정이다. 부족하니까 할 수 없이 실손의료보험을 들고 있다. 그런데 그게 훨씬 비싼 보험이다. 민간보험에 가입하지 말고 그것의 1/3만 건보로 돌리면 100만원 상한제가 될 수 있다. 민간보험은 낸 만큼 받아가는 비례성 구조지만, 건보는 소득에 따라 보험료를 매기고 받는 건 아픈 만큼 받는다. 

만약 국민건강보험을 통해서 국민들의 병원비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면 그때는 모든 아이를 우리 사회가 같이 키우듯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큰 걱정 중 하나인 병원비 문제를 우리사회가 같이 케어하게 된다. 시민단체들은 지금 어린이 병원비 국가보장운동도 하고 있다. 5천억이 든다. 수십 년 동안 우리가 어린이 병원비 문제에 대응하는 방식이라는건 복지기관이 민간모금을 통해서, 사랑의 리퀘스트 보다가 슬픈 마음에 ARS 1000원 보내는 것, 혹은 우리 자식은 태아일 때부터 민간의료보험에 가입하는 것이다. 어린이 병원비는 누구한테도 해당되는 문제이고, 이것만큼은 우리가 같이 해결하자는 50만 명 서명운동을 지난 10월 4일 천사의 날에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의제기획을 하고 있다.

9. 목표: 사회연대 복지국가

마지막으로 주체를 만드는 복지논의가 있었으면 좋겠다. 민생의제, 그리고 민생의제가 이런 방식으로 풀어갈 수 있다는 비전을 가지고 건강보험이든, 고용보험이든, 국민연대든 갖가지 민생의제에 대해서 아래로부터의 논의망, 실천망들이 이뤄졌으면 좋겠다. 정당 같은 경성권력자원만 있으면 복지정책 약속했다가도 집권하면 또 공약을 깨기도 하고 해서 각각의 의제중심으로 논의하는 아래로부터 시민들의 세력화가 형성되어야 한다. 저는 이걸 연성권력자원이라고 하고 굳이 비유하자면 촛불세력 같은 것이다. 이 두 세력이 병행, 발전하는게 필요하다고 본다. 

특히 21세기 한국은 이런 연성권력자원이 발전할 수 있는 토양이 굉장히 비옥하다. 여러 정보든 뭐든 정당을 통하지 않고라도 정보를 모으고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는 촛불경험 등 활성화 되어 있다. 그렇게 되면 서로 격차를 넘는, 아래로부터의 연대를 통해 복지국가를 만들 수 있다. 그것이 ‘사회연대 복지국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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