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의 삶 살아온 뼛속까지 민주주의자…보수도 진보도 ‘포옹’, DJ‧MH 역사 잇는다

안희정 충남도지사.<사진=연합뉴스></div>
▲ 안희정 충남도지사.<사진=연합뉴스>

[폴리뉴스 안병용 기자] 2011년의 일이다. 안희정 충남도지사가 임기 두 번째를 맞은 해다. 충남도청의 불합리한 공사로 장마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한 전북 익산 농민들이 충남도청으로 항의 방문을 했다. 항의 수준은 거셌다. 안 지사와 마주 앉은 농민들은 그의 면전에 대고 언성을 높이고 “거짓말쟁이”라고 몰아붙였다. 도청 직원들과 농민들 사이에서는 금방이라도 몸싸움이 일어날 듯 했다. 아슬아슬한 분위기였다.

안 지사는 자리에 앉아 차분히 얘기를 이어가려 했지만, 흥분된 농민들의 목소리는 수그러들 기색이 없었다. 급기야 한 남성 농민은 일어서서 삿대질까지 해가며 안 지사를 비난했다.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안 지사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해당 농민을 끌어안으며 달랬다. “형님!” 농민은 당황했다. 안 지사는 농민을 자리에 앉히고 “동생 얘기 들어보시라”며 차분한 분위기를 조성한 뒤 얘기를 이어갔다. 이른바 ‘포옹 리더십’으로 알려진 안 지사의 일화다.

최근 안 지사는 ‘우클릭 행보’에 대한 비판을 받고 있다. 선거를 앞두고 밝힌 사드 배치와 재벌, 대연정 등의 주장이 ‘표를 위한 우클릭 행보’라는 지적이다. 안 지사는 이에 “1945년 해방 후 분단된 이래로 분열된 진보의 역사를 명실상부 헌법 내 제도 정당으로 고스란히 안고자 하는 시도”라면서 “김대중, 노무현의 못 다 이룬 미완의 역사를 완성하기 위한 도전”이라고 설명했다.

안 지사는 기존의 보수‧진보 이네올로기로는 이 시대 대한민국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말한다. 엄연히 진보 진영에 속해 있는 안 지사가 보수 측의 생각으로 언급될 수 있는 부분을 과감히 끌어안는 이유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대선 출마를 ‘도전’이라고 표현한다. 안 지사는 자신의 도전을 국민들이 선택한다면 시대가 바뀔 것이라고 거리낌 없이 말한다. 그는 시대가 바뀌기 위해서는 기존의 스펙트럼을 타파해야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화난 농민을 끌어안고 있는 안희정 지사.<사진=세종TV ></div>
▲ 화난 농민을 끌어안고 있는 안희정 지사.<사진=세종TV >

혁명을 꿈꿨던 소년

안 지사의 ‘도전의 삶’은 학생 시절부터 이어져왔다. 이름부터 도전적으로 지어졌다. 그의 부친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골수 지지자였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박 전 대통령의 이름을 따서 순서만 바꾼 채 희정으로 지었다. 안 지사의 이름에 쓰인 한자는 빛날 희와 바를 정 자를 써 박 전 대통령의 이름 ‘정희(正熙)’와 같다. 현재 안 지사가 진보 진영에서 박 전 대통령 딸이 만들어놓은 적폐 청산에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이러니한 일이다.

안 지사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로 고등학교 시절을 꼽는다. 고교 두 군데를 다녔지만 재학기간이 모두 합쳐 1년도 되지 않는다. 첫 번째 학교인 남대전고에서 6개월 만에 제적당했다. 전두환 정권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계엄사에 끌려간 뒤 퇴학당했다. 서울 성남고에서는 3개월 만에 자퇴했다. 권력에 아부하는 지식인은 되지 않겠다는 이유였다. 그는 김학준 교수의 ‘러시아혁명사’를 통해 민중을 고민했던 조숙한 고등학생이었다.

안 지사는 검정고시를 거쳐 고려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했다. 반골(反骨) 기질은 여전했다. ‘골수 운동권’으로 민주화운동을 하다 옥고를 치른 것도 두 차례다. 학내 운동권 서클 14개를 통합해 ‘애국학생회’를 조직하기도 하고, 반미 청년회 사건으로 국가안전기획부에 체포돼 10개월 동안 수감생활을 하기도 했다. 대학시절 짱돌과 화염병을 던진 그에게 대학교 졸업까지는 12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낸 대학 시절에도 연애는 했다. 현 부인인 민주원 씨를 대학교 시절 만났다. 83학번 동기다. 대학교 1학년 때 도서관에서 만나 사귀었다고 한다. 1989년 반미청년회 사건으로 복역 직후 결혼했다. 

 

2007년 6월2일 ‘참여정부 평가포럼’에서 노무현 대통령(맨 오른쪽)과 악수하는 안희정 지사.<사진=연합뉴스></div>
▲ 2007년 6월2일 ‘참여정부 평가포럼’에서 노무현 대통령(맨 오른쪽)과 악수하는 안희정 지사.<사진=연합뉴스>

노무현의 남자

‘반항끼’ 많았던 학생 안 지사에게 남은 것은 전과 기록이었다. 변변히 취업도 할 수 없었다. 그를 딱하게 여긴 학교 2년 선배 김영춘(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국회의원 비서 자리를 소개 시켜줬다. 1989년 1월의 일이다. 당시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 비서실장직을 수행하던 김덕룡 의원의 의원실로 출근했다. 정계에 입문하게 된 계기다. 그러나 그와의 인연은 오래가지 못했다.

1990년 3당 합당이 문제였다. 안 지사는 3당 합당을 거부하며 김영삼 총재를 따라가지 않았고, ‘꼬마민주당’ 당직자로 생활을 이어갔다. 여기서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첫 만남이 이뤄진다. 하지만 정계에 회의감을 느껴 당직자 생활마저 그만 둔 뒤에는 출판사 영업부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러나 영업부장 시절 맞지 않는 대인관계 스타일과, 수금 활동 탓에 우울하기만 했다고 한다.

안 지사가 다시 정치로 돌아오게 된 것은 1994년 6월 지방자치실무연구소의 사무국장을 맡아 이광재 전 의원과 함께 총선에서 낙선한 노 전 대통령을 돕는 일을 하게 되면서부터다. 노 전 대통령과의 재회인 셈이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1988년 국회의원 첫 당선 이후 3차례에 걸쳐 연거푸 낙선을 거듭했지만, 안 지사는 그를 떠나지 않았다. 결국 ‘바보’ 노무현을 끝까지 모신 안 지사는 2002년 대선에서 새청년민주당 노무현 대통령 후보 캠프의 행정팀장과 정무팀장을 맡아 참여정부 출범에 일조했다. 참여정부 시절 안 지사는 이광재 전 의원과 ‘좌 희정-우 광재’로 불리며 정권 실세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역대 정권 실세들의 말로가 그랬듯 안 지사의 이후 정치 인생은 고난기로 접어든다.

안 지사는 노 전 대통령 당선 이후 각종 부패 사건에 연루돼 실형을 선고받았다.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에게 백화점 상품권 5000만 원 어치를 받은 것이 드러났고, 2003년 12월 삼성 등 기업들로부터 대선 자금을 받은 혐의로 구속 기소돼, 2004년 9월 항소심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만기 출소했다. 안 지사는 그 후 노 전 대통령에게 폐를 끼치기 싫다며 참여정부 임기 동안 공직을 사양했다.

노 전 대통령은 안 지사에 대해 “대통령을 만들어준 사람 중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고 소개한 바 있다. 그는 “내가 대통령이 된 후에도 여러 번 곤경에 빠졌는데, 안희정 씨가 나 대신 많은 희생을 감수하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다 했다”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은 “이 친구(안 지사)가 자신의 고생과 희생에 대해 한 번도 부담을 주거나 생색을 낸 적이 없다”면서 “말할 수 없는 빚을 지고 있는데 제가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것이 정말 안타깝다”고 눈물을 쏟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을 향한 안 지사의 눈물도 있다. 안 지사는 2010년 도지사 유세 현장에서 “저는 노무현 대통령을 존경했습니다. 저는 노무현 대통령을 좋아했습니다. 왜 좋아했냐고요. 그분이 저한테 한자리를 줬습니까. 저한테 돈을 줬습니까. 하지만 저는 노무현이 좋았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노무현에게 충성하는 것은 제가 살아온 대한만국에 대한 충성이요 힘없고 빽 없는 이 땅의 보통사람에 대한 충성”이라며 그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바 있다.

안 지사는 참여정부 전면에 나서지 않고, 후방에서 지원했다. 노무현 대통령 집권 후반기인 2007년, ‘참여정부평가포럼’을 출범시켜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참여정부의 공정한 평가와 올바른 이해를 위한 노력이었다.

1월12일 국회에서 열린 참좋은지방정부위원회 발대식에 참석한 안희정 지사.<사진=충남도청></div>
▲ 1월12일 국회에서 열린 참좋은지방정부위원회 발대식에 참석한 안희정 지사.<사진=충남도청>

재선 도지사, 한국의 미래 꿈꾸다

안 지사의 ‘자기 정치’는 2008년 7월 통합민주당 최고위원에 선출되면서 발동이 걸린다. 당시 안 지사의 최고위원 선출은 참여정부 이후 위축됐던 친노 그룹이 재결집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후 안 지사는 2010년 제5회 지방선거에서 충청남도지사 선거에 출마해 자유선진당 박상돈 후보를 2.4%로 누르고 당선된다. 충남 역사상 최초로 민주당 출신 도지사로 당선되는 역사를 썼다. 사실 안 지사는 이때부터 대통령의 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지방 정부를 이끌면서 국가 지도자로서의 훈련을 해온 셈이다.

안 지사는 도지사 선거 당선 이후 유능한 지방 정부 모델을 만든다는 목표를 삼고 도정 활동을 해왔다. 그 결과 2014년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공약이행평가에서 4년 연속 최우수등급을 받아 전국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안 지사는 2014년 6월, 제6회 지방 선거에서 새누리당 정진석 후보를 8% 차이로 제치고 재선에 성공했다. 야권의 ‘잠룡’으로 본격 부상하기 시작한 시점이다. 안 지사는 충청도에서 성공적인 도지사 생활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대 대선에서 충청도의 표심을 얻은 사람은 모두 당선됐다.

대선 출마선언을 한 안희정 충남지사가 11일 오후 전남 목포시 목포시민문화체육센터에서 열린 '즉문즉답' 행사를 마치고 시민들과 기념촬영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div>
▲ 대선 출마선언을 한 안희정 충남지사가 11일 오후 전남 목포시 목포시민문화체육센터에서 열린 '즉문즉답' 행사를 마치고 시민들과 기념촬영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오바마 닮은 뼛속까지 민주주의자

안 지사를 두고 미국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안 지사는 1965년 생으로 올해 53세다. 오바마는 48세에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안 지사 스스로도 오바마를 롤모델로 삼는다. 그는 1월17일 SBS와의 인터뷰에서 “대화의 능력, 소통의 능력, 그리고 그 대화와 소통을 통해서 문제를 풀고자 하는 오바마의 리더십은 국민 모두가 부러워하고 있다”면서 “그런 대화와 소통의 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젊음은 곧 미래를 말한다. 대선주자 중 가장 젊은 안 지사는 분명 새로운 대한민국의 가능성과 기회를 제시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할 수 있는 인물임에 틀림없다.

민주주의와 정당정치에 대한 일관된 소신 역시 그의 강점이다. 어떤 질문을 던져도 민주주의가 전제된 답변을 한다. ‘뼛속까지 민주주의자’라는 평가가 따르는 이유다. 한국의 정당 정치 현실에서 공천은 당선 가능성을 높이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다. 대선 자금 수사로 구속된 전력으로 출마를 타진하던 18대 총선에서 공천 배제된 안 지사는 당을 탈당하지 않았다. 공천 배제되면 탈당 감행 후 신당 창당이나 당적을 바꾸는 일이 부지기수인 한국 정당 정치사에서 안 지사의 정치 행보는 주목할 만하다.

별명은 ‘충남의 엑소(EXO)’다. 출중한 외모와 패션 감각으로 나이와 성별 구분 없이 아이돌 같은 인기를 얻고 있는데서 기인한다. 유권자의 표를 먹고 사는 정치인이 친화력을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 권위주의를 탈피한 친근한 별칭은 안 지사의 강점 중 하나로 평가된다.  

안 지사는 달변가다. 입담이 좋다. 논리적이면서 논리 또한 견고하다. 교묘하면서도 사실에 근거한 말을 한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논쟁하고 설득하는데 거침이 없다. 다만 다소 추상적이다. 철학적인 말이 많다. 어려운 말을 자주 쓴다. 그의 약점이다. 김만흠 한국정치아카데미 원장은 “(안 지사는) 문재인 후보에 비해 젊고 훨씬 역동적인 모습들이 보인다. 그런데 주장들이 모호하고 추상적이란 느낌을 떨치기 어렵다. 구체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민주주의 등 ‘가치나 방향’에 초점을 맞춘 메시지를 주로 전달하다보니 대중 언어를 잘 구사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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