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 교수, 벤처기업 경영자, 청춘 멘토… ‘정치인 안철수’ 19대 대선 재도전

국민의당 안철수 전 대표(가운데)가 지난 4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당 국가대개혁위원회 출정식에서 정동영 의원(왼쪽)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사진=연합뉴스)
▲ 국민의당 안철수 전 대표(가운데)가 지난 4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당 국가대개혁위원회 출정식에서 정동영 의원(왼쪽)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사진=연합뉴스)
[폴리뉴스 김희원 기자]18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지난 2012년 9월 19일 이른바 ‘안철수 현상’을 등에 업고 대선출마를 전격 선언하며 정치권에 처음 발을 내딛은 안철수 전 국민의당 공동대표.

정치신인이었던 안 전 대표가 정치권에 입문한 이후 벌써 4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고 안 전 대표는 재선 국회의원(서울 노원구병)이 됐으며 정당의 당 대표도 두 번이나 지냈다.

정치권에 발을 내딛은 이후 수많은 위기의 순간들이 그를 스치고 지나갔고 그만큼 그는 강해졌다. 그는 그의 인생이 도전의 연속이었듯이 ‘정치인 안철수’가 돼서도 도전에 도전을 거듭했다. 그는 또다시 19대 대선이라는 크나큰 도전의 순간에 직면해 있다.

‘정치인 안철수’가 되기 이전까지의 그는 의대 교수,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 개발자, 벤처기업 경영자, ‘청춘 멘토’ 등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폴리뉴스’는 조기 대선 가능성이 높아진 상황에서 그가 지금까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되짚어봤다.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의 어린시절 모습(사진=안철수 전 대표측 제공)
▲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의 어린시절 모습(사진=안철수 전 대표측 제공)
62년 부산 출생, 내성적이지만 호기심 많은 소년

안 전 대표는 1962년 2월 26일 부산에서 2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부산 토박이 의사였다.

안 전 대표의 어릴 적 성격은 내성적이어서 혼자 책을 읽거나 닭·토끼와 시간을 보낼 때가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부산동성초교 시절 그는 소설을 좋아하는 독서광이었다고 한다. 안 전 대표는 활자중독증 증세를 보일 정도로 독서를 좋아했으며 초등학교 6학년이 될 때쯤에 학교 도서관에 있는 책은 거의 다 읽었다.

안 전 대표는 사물에 대한 호기심이 매우 컸으며 뭔가를 만지면 꼭 분해해 보곤 하면서 과학자의 꿈을 꾸기도 했다. 좀 더 자라서는 과학자가 되겠다던 꿈이 구체적으로 변해 공학도가 되고 싶어졌다. 그는 보통 남학생들에 비해 손이 작았고, 섬세해서 공정을 필요로 하는 일에 재주가 뛰어났다. 비행기, 탱크를 만들고 공모전에 응모해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안 전 대표의 성적표에는 수, 우가 별로 없었다고 한다. 그는 한 방송에 나와 “성적표에 ‘수’가 보인 게 이름 철수의 ‘수’뿐”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다. 그는 부산고 2학년이 돼서야 성적이 올랐고 이때 잰 IQ는 145였다.

 의대시절 하계 의료봉사 중인 안철수(사진=안철수 전 대표측 제공)
▲ 의대시절 하계 의료봉사 중인 안철수(사진=안철수 전 대표측 제공)
1980년 서울대 의대 입학, 진료 봉사활동하며 사회 현실에 대해 고민

안 전 대표는 대학에 진학할 시가가 되자 공대를 선택하는 쪽에 마음이 쏠렸다. 그러나 1980년 서울대 의대에 입학해 기초의학을 전공했다. 그가 의대에 진학한 것은 부모님이 원했기 때문이었다.

종교가 없는 그는 봉사활동을 하고 싶어 의대 재학 시절 카톨릭학생회가 주관하는 진료봉사에 참여했다. 안 전 대표는 의대 본과 2학년 때부터 3년간 서울 구로동에서 환자를 진료하는 봉사활동을 했다.

그는 가장 기억에 남는 환자로 초등학생 손녀와 단둘이 사는 류마티스 관절염을 않던 할머니를 꼽는다. 아들은 병을 얻어 죽고, 며느리는 집을 나간 후, 초등학생 손녀가 신문배달을 해 할머니를 먹여 살렸는데 중학생이 된 손녀는 가출을 했고, 할머니는 굶어 숨진 채 발견됐다.

안 전 대표는 진료 봉사활동을 통해 이러한 경험들을 하면서 사회 현실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됐다.

안 전 대표는 한때 노벨의학상에 도전해보겠다는 꿈도 있었으나 그의 앞에는 또다른 길이 놓여 있었다.

7년간 의사 겸 백신 프로그래머로 생활, 1995년 안철수연구소 설립

1988년 초 브레인 바이러스가 한국에 상륙했다. 당시 의대 박사과정 중이던 그는 컴퓨터 바이러스의 존재를 소개한 신문기사를 본 후 호기심에 바이러스를 치료할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연구한 끝에 그해 6월 V3의 첫 번째 버전인 첫 백신프로그램을 완성하게 됐다. 그는 그 뒤로 새로운 바이러스가 나올 때마다 혼자서 만든 백신 프로그램을 업데이트해 무료로 배포했다.

군대 훈련소에서 군화를 닦는 안철수(사진=안철수 전 대표측 제공)
▲ 군대 훈련소에서 군화를 닦는 안철수(사진=안철수 전 대표측 제공)
이때부터 그는 의사의 길과 다른 길을 병행하며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 오전 3시 이른 새벽에 기상해 6시까지 백신을 만들었다. 날이 밝으면 의학대학원생, 단국대 의대 교수(1989∼1991년), 해군 군의관(1991∼1994년)의 인생을 살았다.

그는 1991년부터 1994년까지 군의관으로 복무한 후 단국대에 복직을 신청했다. 그러나 학교와의 마찰로 교수 복직이 보류됐다. 이 때문에 그는 10개월간 실업자로 지냈으며 이때부터 백신프로그램 개발에 전념하기로 결심했다. 결국 14년의 의학 공부를 포기하고 1995년 안철수연구소를 설립했다.
안 전 대표는 이에서 그치지 않고 미국 유학길도 떠났다. 1997년까지 펜실베이니아대에서 공대 공학석사 과정을 밟았다. 그는 유학 기간 동안에도 e메일을 통해 경영을 지시하거나 매달 한 번 한국에 와서 회사운영을 살폈다. 이후 1999년 4월 한국에서 수십만 대의 컴퓨터가 감염된 체르노빌 바이러스 사태 때 안철수연구소는 업계 1등이 됐다. 2001년 연구소는 코스닥에 상장됐다. 2004년 매출 300억 원을 넘어서며 ‘최고경영자(CEO) 안철수’의 이름을 날렸다.

2005년 안철수연구소 최고경영자 자리에서 물러나 미국 유학

그러나 그는 2005년 3월 창립 10주년 기념일을 기해 안철수연구소 최고경영자에서 물러났다. 그가 그런 선택을 한 이유는 CEO 한 사람의 영향력이 너무 크면 회사가 더 크게 성장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최고경영자에서 물러나 부인(김미경 현 서울대 의대 교수)과 함께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2008년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경영학석사(MBA) 과정을 마쳤다. 부인은 워싱턴주립대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2008년 귀국한 안 전 대표는 KAIST 석좌교수로 기업가정신을 가르쳤다. 또 그해 아름다운재단 이사로 활동하면서 빈곤 등 민생, 사회개혁에 대해 좀 더 깊이 고민하게 됐다. 2011년에는 서울대학교로 자리를 옮겨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 차세대융합기술원장을 맡기도 했다.

2009 ‘무릎팍 도사' 출연으로 대중적 관심 상승, 
청춘콘서트로 ‘젊은이의 멘토’로 불려

그가 대중적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2009년 6월 MBC ‘무릎팍 도사'에 출연하면서부터다. 이때부터 대중적 관심을 받기 시작한 그는 2010, 2011년 ‘시골의사’ 박경철 안동신세계연합클리닉 원장과 함께 대학을 돌며 ‘지방대학 기 살리기’ 강연에 나섰다.

이를 본 법륜 스님이 청춘콘서트를 열자고 제안했다. 안 전 대표는 2011년 9월까지 청춘콘서트를 진행해 대중과의 소통을 늘리며 젊은이의 ‘멘토’ 이미지를 굳혔다.

그렇게 청춘콘서트 열풍이 한창이던 2011년 8월 안 전 대표가 서울시장 출마 의사를 내비치자 유권자들은 뜨겁게 반응했다. 비정치인인 그는 정치인 출신 후보들을 제치고 압도적인 지지율을 기록했다.

박원순에게 서울시장 후보직 양보하면서 ’대선주자‘로 급부상

단국대 강의하는 안철수(사진=안철수 전 대표측 제공)
▲ 단국대 강의하는 안철수(사진=안철수 전 대표측 제공)
그러나 그는 2011년 9월 6일 당시 지지율 50%를 넘었지만 5% 지지율의 현 박원순 서울시장에게 조건 없이 후보 자리를 양보하는 결단을 내리면서 다시 한번 대중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다. 그의 이같은 행보는 정치권 안팎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줬다. 당시 기성 정치권에 염증을 느끼고 있는 국민들도 높은 지지를 보내면서 이른바 ‘안철수신드롬’ ‘안철수 현상’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안풍(安風)’이 정치권에 거세게 불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결국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잠재적 대선주자로 떠오르게 된다.

안 전 대표는 2011년 11월 자신이 보유 중인 안랩(구 안철수연구소)의 지분 37.2% 가운데 절반인 18.6%(당시 1천500억원 상당)를 사회에 기부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면서 지지율을 더욱 더 끌어올렸다.

그의 이같은 행보는 작은 이익 앞에서도 명분과 실리를 저울질하며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기존 정치권의 구태정치, 낡은정치 공식을 보기 좋게 깬 안철수식 ‘노블리스 오블리제’로 평가 받았다.

이로 인해 당시 정치권의 최대 관심사는 안 전 대표의 대선출마 여부였다. 안 전 대표는 2012년 7월 19일 사회 각종 현안에 대한 생각을 밝힌 자신의 저서 <안철수의 생각>을 출판하고 SBS TV 예능프로그램 ‘힐링캠프’에 출연하면서 대선출마 가능성을 한층 높였다.

2012년 9월 19일 대선출마 선언, 11월 23일 대선후보 사퇴

결국 2012년 9월 19일 그는 운명처럼 대선출마를 전격 선언하며 ‘정치인 안철수’가 됐다. 그러나 이후 그는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안 전 대표는 대선 출마 후 전남대 강연에서 야권 후보단일화를 통해 정권교체를 이루겠다고 밝히며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측과 후보단일화 논의를 하기 시작했다.

당시 그는 후보단일화 논의에 뛰어들면서 “새누리당의 집권 연장에 단호하게 반대한다. 정권교체 반드시 이뤄내겠다”며 “이번에는 모든 국민이 인정하는 박수와 축복을 받는 단일화를 이루고 마침내 정권교체를 이루는데 하나가 돼 달라”고 밝혔다.

그러나 안 전 대표 측과 문 전 대표 측 사이의 후보단일화 논의는 쉽지 않았다. 양측은 단일화 방식을 놓고 줄다리기를 계속하며 좀처럼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11월 23일 안 전 대표의 제안으로 양측의 ‘특사 담판’이 이뤄졌으나 약 4시간 가량의 막판 조율에도 불구하고 입장차를 좁히지 못했다.

협상 타결이 무산되면서 정치권에선 두 사람이 국민 앞에 약속했던 후보등록일(25∼26일) 이전 단일화는 사실상 물건너 간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또 국민들에게 양 후보가 단일후보 자리를 놓고 이전투구 양상을 보인다는 점에서 ‘아름다운 단일화’ 모습을 보이기는 커녕 국민들에게 ‘단일화 피로감’만 주고 있다는 비판이 나왔다.

그는 그 순간 아무도 예상치 못한 선택을 했다. 11월 23일 그는 아무런 예고 없이 돌연 대선후보직 사퇴를 전격 선언해버렸다.

안 전 대표는 이날 저녁 8시 20분경 서울 공평동 캠프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제가 후보직을 내려놓겠다”며 “정권교체를 위해 백의종군할 것을 선언한다”고 밝혔다.

안 전 대표의 후보직 사퇴로 문 전 대표가 야권의 단일 대선후보가 됐지만 ‘아름다운 단일화가 아니다’ ‘후보단일화 효과가 미미할 것이다’는 분석이 터져나왔다. 그러나 안 전 대표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겠다”고 밝힌 뒤 전국을 돌며 문재인 전 대표 지원유세를 펼쳤다. 
 
이후 안 전 대표는 대통령 선거일인 12월 19일 투표를 마친 후 “이제 초심으로 돌아가서 사랑에 보답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지 깊이 고민해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미국으로 떠났다.

그가 미국으로 떠나자 정치권은 다시 안 전 대표의 정계복귀 가능성과 정계복귀 방식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18대 대선이 끝났지만 그에 대한 정치권 안팎의 관심은 식지 않았다.

2013년 4.24 서울 노원병 재보선 당시 선거운동하는 안철수 전 대표(사진 폴리뉴스DB)
▲ 2013년 4.24 서울 노원병 재보선 당시 선거운동하는 안철수 전 대표(사진 폴리뉴스DB)
2013년 4월 서울 노원구병 재보선 당선으로 정계복귀, 원내 첫 입성

안 전 대표는 잠시 미국에 머무르며 정치적 잠복기를 거친 후 2013년 3월 11일 귀국하면서 정계복귀를 알렸다. 그의 정계복귀 방식은 4월 재보궐 선거 서울 노원구병 출마였다.

그는 운동화를 신고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다른 후보의 지원유세가 아닌 자신의 선거 승리를 위해 뛰면서 다시 한번 현실 정치가 무엇인지 배웠다. 무소속 후보로 출마한 그는 60.5%의 높은 득표율을 기록하면서 첫 원내 입성에 성공했다.

그가 원내 입성에 성공하자 이번에는 그의 제3지대 신당 창당 여부에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다. 안 전 대표는 원내에 입성한 이후 자신을 대표하는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새정치’ 기치 완성을 위해 제3지대 신당 창당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김성식(현 국민의당 의원), 금태섭(현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 과거 2012년 대선 캠프에 참여했던 인사들이 다시 모여 그의 신당 창당을 도왔다. 안 전 대표가 추진한 독자 신당은 ‘새정치연합’이라는 당명까지 정하는 등 신당 창당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2014년 3월 2일 ‘새정치연합’ ‘민주당’ 통합 선언
7월 재보선에서 참패하면서 공동대표직에서 사퇴, ‘리더십 위기’ 맞아

그러던 중 또 그는 아무도 예상치 못한 전격적인 결단을 내렸다. 2014년 3월 2일 당시 김한길 민주당 대표와 안 전 대표는 공동 기자회견을 갖고 통합을 전격 선언했다. 안 전 대표 측의 새정치연합 내부에서는 통합 결정이 사전에 충분히 논의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고 일부 인사들은 안 전 대표와 함께 통합된 당에 들어가지 않았다.

민주당과 새정치연합의 통합으로 ‘새정치민주연합’이 탄생했으며 안 전 대표는 김한길 전 대표와 함께 새정치민주연합의 공동대표로 활동했다. 그러나 2014년 7월 30일 새정치민주연합이 15석이 걸린 재보궐선거에서 4석만 얻는 참패를 당하면서 안 전 대표는 김한길 대표와 공동대표직에서 동반 사퇴하면서 리더십에 위기를 맞았다.

당 대표직에서 사퇴한 이후 안 전 대표는 평당원으로서 의정활동에 집중했다. 이후 안 전 대표에게는 또 다른 선택의 순간이 도래했다. 당시 당 대표를 맡고 있던 문재인 전 대표와 갈등을 겪은 안 전 대표는 탈당이냐 당 잔류냐를 놓고 기로에 서게 된 것이다.

2015년 12월 13일 새정치민주연합 탈당, 20대 총선 직전 ‘국민의당’ 창당

안 전 대표는 문 전 대표가 자신의 ‘혁신전당대회 개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자 2015년 12월 13일 “저는 이제 당 안에서 변화와 혁신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주장하며 탈당을 공식 선언했다.

안 전 대표는 함께 탈당한 비주류 의원들과 제3지대 정당, ‘국민의당’을 창당하고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으로 대변되는 양당 기득권 세력을 깨겠다며 새로운 도전에 나서게 된다.

그러나 그 길도 험난했다. 지난해 4.13 총선을 앞두고 새누리당의 ‘180석’ 가능성까지 제기되며 야권의 대참패 우려가 커졌고, 동시에 야권 연대 목소리가 높아졌다.

당 밖 문재인 전 대표는 물론이고 당 내에서 김한길 공동선대위원장과 천정배 공동대표 등은 야권 분열로 새누리당에게 ‘어부지리’ 승리를 안겨주지 않으려면 더불어민주당과의 야권연대에 응해야 한다고 안 전 대표를 압박했다. 그러나 안 전 대표는 “이 광야에서 죽을 수도 있다. 그래도 좋다”면서 독자노선을 고수했다. 

안철수 전 국민의당 공동대표(오른쪽 두번째)가 지난 2일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국민의당 창당 1주년 기념식에서 돌잡이 퍼포먼스 때 '국민의당 집권'이라는 문구가 적힌 족자를 펼쳐 보이며 밝게 웃고 있다.(사진=연합뉴스)
▲ 안철수 전 국민의당 공동대표(오른쪽 두번째)가 지난 2일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국민의당 창당 1주년 기념식에서 돌잡이 퍼포먼스 때 '국민의당 집권'이라는 문구가 적힌 족자를 펼쳐 보이며 밝게 웃고 있다.(사진=연합뉴스)
국민의당 20대 총선에서 38석 획득, 정당득표율 2위 기록
그러나 ‘리베이트 의혹’ 불거지면서 대표직에서 사퇴
“이번 대선은 안철수 vs 문재인 대결” 양자구도 부각으로 지지율 반등 시도

결국 20대 총선은 야권의 참패 우려 속에 ‘일여다야’(一與多野)구도로 치러졌다. 그러나 야권 분열에도 불구하고 총선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새누리당의 참패로 귀결됐다. 국민의당은 호남에서 압승을 거두는 ‘녹색돌풍’을 일으키며 원내교섭단체 구성(20석) 가능 의석수를 훨씬 넘는 38석을 확보했다. 특히 국민의당은 정당득표율 26.74%를 획득해 더불어민주당을 제치고 전국 2위에 올랐다.

안 전 대표는 당 안팎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독자노선 의지를 꺾지 않고 당당하게 총선에서 승리하면서 리더십을 확고히 다졌다.

총선에서 승리하자마자 그의 최측근인 박선숙 의원과 김수민 의원 등이 연루된 ‘리베이트 의혹’이 불거지면서 안 전 대표는 또 한번 위기를 맞게 된다. 안 전 대표는 ‘리베이트 의혹’ 진위 여부와 상관없이 이같은 사태가 불거진 것에 대해 책임을 지겠다면서 천정배 공동대표와 함께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지난달 11일 박선숙·김수민 의원 등이 1심서 무죄를 선고받으면서 안 전 대표는 다시 명예를 회복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리베이트 의혹’ 사건으로 그의 새정치 이미지는 타격을 입게 됐고 당 대표직에서 사퇴한 후 언론에 부각되는 기회가 줄어들면서 대선주자 지지율은 하락했다.

안 전 대표는 19대 대선이라는 또 한번의 도전을 눈앞에 두고 있다. 안 전 대표는 ‘안철수 현상’ ‘안풍(安風·안철수 바람)’ 등을 일으키며 기성 정치권을 위협하기도 했으나 정치권에 들어온 이후에는 서울시장 후보직을 양보하고 대선후보에서 사퇴하면서 ‘철수 정치’라는 비아냥거림도 들어야만 했다. 또 그의 불명확한 화법과 태도로 ‘간철수(간을 보는 안철수)’라는 비판도 끊이지 않았다.

이같은 정치권의 비아냥거림에 안 전 대표는 “한번 했던 실수는 반복하지 않는다”며 ‘강철수(강한 안철수)’로 변모된 모습을 보이며 물러서지 않았다. 

안 전 대표는 현재 “이번 대선은 저 안철수와 문재인의 대결이 될 것”이라며 “저는 이 싸움에서 이길 자신 있다”고 자신감을 드러내고 있다.

그가 두 번째 도전하는 이번 대선에서 어떤 성과를 거둘지 지지자들은 흥미로운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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