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적 보수주의자’ 자처, 외교안보는 보수 사회경제는 진보색 더할 듯

[폴리뉴스 정찬 기자] 반기문 전 사무총장의 정치적 가치와 신념을 논하기란 어렵다. 자신의 직무를 충실한 성공적인 직업 외교관이 길을 걸은 반 전 총장에게 있어 정치적 신념이란 언제든 환경에 맞춰 바꿔 달 수 있는 ‘장식품’ 정도의 무게에 지나지 않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혹독하게 평가하면 반 전 총장은 ‘영혼 없는 공무원’이 갈 수 있는 최고의 궁극지점까지 간 인물이다. 성실하고 유능한 외교 공무원인 그에게 ‘정치적 가치’는 오히려 불편했을 것이다. 그가 외무고시를 차석으로 합격해 외무부 공직생활을 시작한 것이 1970년이다. 박정희 유신독재와 전두환 군사독재 시절까지 약 20여 년 동안 일반 공무원보다 더 엄격한 ‘사상통제’에 순응했던 그에게 ‘민주주의 가치’는 먼 나라 얘기였을 것이다.

반 전 총장은 오로지 ‘유능함’ 하나로 박정희 정권부터 노무현 정권까지 여러 정권의 부침 속에서도 승승장구했다. 보수정권이냐, 진보정권이냐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정치적 신념과 가치’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인사권자의 취향에 맞춰 갈아타는 ‘장식품’이었을 것이다.

인사권자를 향한 성실함과 유능함이 지금의 반 총장을 있게 한 요인이지 정치적 가치와 신념체계는 그다지 필요한 덕목이 아니었다. 그가 유엔 사무총장으로 선출돼 10년 간 봉직했지만 이는 자신의 정치적 활동에 따른 성과물은 아니다. 이라크 전쟁 이후 국제질서를 주도하고 있는 미국의 입맛에 맞는 인물로 간택됐다고 봐야 한다. 여기에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만들기’ 프로젝트가 힘을 보탠 것이다.

그럼에도 반 전 총장의 삶을 관통해온 중요한 가치는 존재한다. 유엔 사무총장으로까지 이끈 두 개의 핵심 키워드는 ‘친미(親美)’와 ‘권력 순응’이다. 외교부 ‘친미 라인’의 핵이었기 때문에 그는 외교부 내 실세였다. 정권교체의 칼바람을 뚫는 힘도 여기서 나왔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에서도 반 전 총장이 승승장구한 바탕도 ‘친미’ 가치관에 있다.

또 다른 핵심 키워드 ‘권력 순응’은 반 전 총장의 ‘처세술’로 읽혀지는 대목이지만 이 속에는 권위적이고 수직적인 가치체계에 더 익숙하다는 뜻도 있다. 그는 독재권력이냐 민주권력이냐를 따지지 않고 임면권자의 뜻이라면 거스르지 않았다. ‘친미보수색’이 강한 그는 토론과 반론을 즐기는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조차도 단 한 번도 ‘소신 발언’이나 ‘직언’을 하지 않았을 정도다.

이러한 반 전 총장의 ‘친미’와 ‘권력순응’이란 두 개의 가치관은 앞으로 펼쳐질 그의 대권행보 과정에서 국민에게 제시할 ‘정책과 가치’에 녹아들 것은 분명하다. 친미적 가치관은 그가 제시할 외교안보정책에서 여러 형태로 제시될 것으로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권력순응’이란 키워드는 외교안보부문을 제한 정치와 사회경제분야 정책공약 설정과정에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구현될 것으로 보인다. 그가 순응해야 할 대상이 ‘민심(民心)’이기 때문에 그가 제시할 정책과 비전은 ‘민심’을 얻기 위한 ‘장식물’이 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자신의 신념체계보다는 민심이 원하는 방향에 맞춰 ‘보수와 진보적 가치’를 넘나들 것으로 보인다.

‘진보적 보수주의자’ 자처하며 ‘통합’과 ‘정치교체’ 주장

반 전 총장은 1월12일 귀국하면서 자신을 ‘진보적 보수주의자’로 자처했다. 귀국 비행기 안에서 기자들과 인터뷰 도중 “진보주의자인가 보수주의인가”라는 질문에 “사람들은 나를 보수주의자로 본다. 하지만 대한민국 지도자들 중에서 나처럼 진보적인 사고를 하는 이는 별로 없다. 나는 진보적 보수주의자다”라고 했다.

그는 귀국 후 기자회견에서 “나라는 갈가리 찢어지고 경제는 활력을 잃고 사회는 부조리와 부정으로 얼룩져 있다”며 “부의 양극화, 이념, 지역, 세대 간 갈등을 끝내야 한다. 국민 대통합을 반드시 이뤄내야 한다”며 ‘통합을 주장했다. 그러면서 “패권과 기득권 더 이상 안 된다”며 통합 저해세력을 지목했다. 친박계가 유명무실해지는 상황을 감안하면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세력을 겨냥한 것이다.

또 그는 “이제 우리 정치 지도자들도 우리 사회의 분열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지에 대해서 해법을 같이 찾아야 된다”며 “정권을 누가 잡느냐 그것이 무엇이 그렇게 중요하나? 다 우리 대한민국 한나라, 한민족”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전쟁으로 나라와 사회가 분열되는 것은 민족적 재앙이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때가 아니다. 정권교체가 아니라 정치교체가 이뤄져야 될 때”라며 분열을 ‘악(惡)’으로 규정하며 ‘정치교체’를 주장했다.

반 전 총장의 정치적 메시지를 짧게 요약하면 ‘나는 보수주의자이지만 진보적 가치도 수용할 수 있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분열을 극복하는 통합을 이룰 것이고, 정치 기득권세력과 패권주의 세력을 청산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자신의 편의대로 짜 맞춘 그리스 신화의 ‘프루크루테스 침대’ 수준의 정치적 가치다.

‘진보적 보수주의’란 ‘형용모순’의 용어를 사용하는 것부터가 문제다. ‘온건 보수’, ‘합리적 보수’가 합당한 용어임에도 굳이 ‘진보적’이란 단어를 덧댄 것은 박 대통령 탄핵 이후 증폭된 국민들의 ‘보수’에 대한 ‘반감’을 염두에 뒀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를 통해 보수와 진보를 아우를 ‘통합적 리더십’의 면모를 보이고 싶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반 전 총장이 즐겨 사용하는 ‘반반(半半)’화법의 전형이다. 아직 구체적인 정책이 발표되지 않아 확언할 수 없지만 ‘진보적 보수주의’가 통용될 공간 또한 협소해 정치적 수사(修辭)에 지나지 않는다.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대북안보’ 분야에서도 그렇고 ‘노동문제’와 ‘민주주의’ 영역 등에서 ‘진보적 보수주의’가 도대체 무엇을 지향하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말장난’이라는 평가까지 나온다. 탄핵정국 이후 보수층의 약화 현상으로 보수층의 지지만으로는 대통령이 되기 어렵다고 보고 진보층에 구애한 것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진보적 보수주의자’란 말의 속뜻은 진보주의자도 아니고 철학과 원칙을 지닌 ‘보수주의자’도 아니라는 그의 고백처럼 보인다.

반 전 총장은 귀국메시지에서 ‘통합’을 얘기했다. 그러나 ‘갈등’을 해소하는 방안에 대해선 어떠한 대안도 제시하지 않은 채 ‘패권주의’ 세력만 비난했다. 자신의 ‘진보적 보수주의’가 갈등을 치유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엔 그 내용이 너무도 없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갈등’을 ‘분열’로 바라보는 그의 인식이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갈등은 필수불가결한 사회적 원동력이다. 그래서 ‘정치’의 역할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이해집단 간의 갈등을 조정하는 데 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갈등을 해결하는 방안은 갈등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이해집단 간의 ‘합의’에 기초를 둔다.

그런데 반 전 총장은 갈등 현안들을 ‘분열’로 봤다. 이는 갈등을 인정하지 않는 ‘독재적 발상’이다. 박 대통령이 대선후보 시절 말한 ‘100% 국민대통합’도 이러한 가치관에 입각해 있었기에 지금의 탄핵사태를 맞이한 것을 반면교사로 삼지도 않았다. 박 대통령이 말한 ‘대통합’은 반대세력을 제압하는데 있었다는 것이 지금 판명되고 있다. 언론통제, 문화예술제 블랙리스트 작성, 역사 국정교과서 등이 박 대통령의 ‘국민대통합’ 정책들이다.

반 전 총장 또한 갈등을 분열로 인식하며 척결대상으로 삼으면서 ‘불통’의 대명사가 된 박 대통령의 ‘통합’ 주장과 꼭 닮아 있다. 반 전 총장의 이력을 보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박 대통령의 역점사업인 새마을운동 보급에 그가 팔을 걷어붙인 대목이나 지난해에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 친박계 세력에 업히려고 한 행동들이 우연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정치교체’ 또한 박 대통령이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 정권의 실정에 분노한 국민들의 정권교체 욕구를 희석시키던 것을 연상시킨다. 당시 박근혜 후보는 “저 박근혜, 정권교체 수준을 넘는 정치교체와 시대교체로 새로운 시대, 국민행복시대를 (열겠다)”고 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말한 ‘정치교체’의 실체는 ‘의회의 무력화’, ‘수직적 당청관계 구축’ 등 ‘정치의 기능과 역할’을 축소시켜 대통령과 행정부가 전횡하는 독재시스템으로의 퇴행이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반 전 총장의 ‘정치교체’는 ‘패권주의 청산’인데 이는 자신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인 문재인 민주당 전 대표를 공격하는 정치수사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 또한 그다지 설득력이 떨어진다. 반 전 총장은 지금은 멸족 위기에 있는 ‘친박 패권주의’와 대권을 도모하고자 했고 나아가 지역구도 정치의 전면에 서고자 했기 때문이다. ‘충청 대망론’에 편승하기 위해 김종필 전 총리에게 줄을 대는가 하면 영남과 충청연합을 구상하다가 DJP연합도 시도해봤던 것으로 알려졌다. 반 전 총장의 이러한 행적도 ‘정치교체’의 대상이다.

반기문 ‘외교력’ 기대 크지만, ‘친미와 보수’의 틀이 족쇄

반 전 총장의 최대 자산은 그가 외교에 있어서만큼은 능수능란할 것이란 이미지다. 유엔 사무총장을 역임한 그의 능력이라면 미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과 러시아 등 열강의 이해관계가 중첩된 한반도 외교를 잘 이끌어 국민이 염원하는 남북통일에 성큼 다가서게 할 수도 있을 것이란 기대감이다.

국민들이 반 전 총장의 귀국 후 행보에서 기대한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여러 여론조사에서 반 전 총장이 다른 대선후보들보다 남북관계나 외교부문을 가장 잘 해낼 대통령으로 꼽힌 것도 여기에 있다. 그래서 그가 귀국하면 국민 마음을 설레게 할 외교안보와 남북관계를 풀 수 있는 반기문만의 담대한 구상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란 전망도 있었다.

그러나 반 전 총장은 귀국 후 가장 민감한 외교현안인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주한미군 배치와 한일 위안부협상에 대해 보인 태도는 어정쩡했을 뿐 아니라 이른바 신냉전질서의 격랑 속에 빠진 한반도 정세를 돌파할 주도적 ‘외교 리더십’과도 거리가 멀었다.

반 전 총장은 사드 배치에 대해선 “한반도 현실이 거의 준전시 상태 같은 상황이기 때문에 정부가 그런 조치를 취한 것은 마땅하다”며 “이것은 공격용 무기가 아니고 순수한 방어용 무기”라고 박근혜 정부와 미국의 주장을 되풀이했다. 그러면서 사드에 반발하고 있는 중국에 대해선 “잘 설득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만 했다.

12.28 한일위안부 합의에 대해선 지난 12일 귀국하면서 “궁극적인 완벽한 합의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한을 풀어줄 수 있는 수준이 되어야 한다”고 했지만 한일합의 직후 박 대통령의 “용단”이라고 치켜세웠던 것에 대한 설명이나 ‘재협상’ 여부에 대해선 선을 그었다. 전시작전권 회수에 대해서도 회수를 하겠다는 의지보다는 한미동맹과 북한문제로 미뤄진 문제로 치부했다.

이처럼 국민들이 민감하게 바라보는 현안들에 대해 미래지향적인 지도자의 면모를 보이기보다는 박근혜 정부의 실패한 외교정책을 그대로 답습하는 모습만 보였다. 오히려 경북 성주 주민의 사드 반대투쟁에 대해선 “지역이기주의”라는 말을 서슴지 않았고 위안부 합의에 대해 질문하는 기자들을 “나쁜x”이라며 짜증냈다.

반 전 총장의 ‘친미 편향’과 ‘보수적 안보관’을 보면 이는 당연한 귀결이다. 반기문은 유엔 사무총장 재직시에도 미국에 입장을 충실하게 반영했고 미국의 이해에 따라 움직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나아가 반 전 총장은 미국이 일본으로 하여금 아시아에서 자신의 역할을 떠맡게 하는 흐름에 일조했다.

사드와 한일위안부 합의는 이러한 미국의 아시아전략 틀 속에서 진행된 것이기에 미국의 이해와 맞서야만 해법이 나오지만 반 전 총장에게 이를 기대하기란 어렵다. 오히려 안보보수층의 지지를 얻기 위해 박근혜식 퇴행적 보수 기조를 끌어안으려는 움직임이 더 강하다.

이에 문재인 민주당 전 대표는 “우리 외교에서 미국은 중요하지만 대미 일변도의 외교라인은 미국의 요구에 대해 거부할 줄을 모른다”며 “이제는 미국의 요구에 대해서도 협상하고 No를 할 줄 아는 외교가 필요하다”고 반기문의 친미 편향의 ‘외교력’을 꼬집어 지적했다. 반 총장에게 있어 ‘친미-보수’의 외교안보노선이 ‘족쇄’라는 얘기다.

‘진보색’ 입혀질 사회경제공약, 진정성 논란 불가피할 듯

한 언론이 ‘반기문 7대 경제공약’을 보도하자 반 전 총장 공식캠프가 발칵 뒤집혔다. 이 보도가 나온 1월10일 당일에 이도운 반기문 캠프 대변인은 보도자료를 통해 “반 전 총장은 보도에 나온 경제공약을 계획하거나 발표한 사실이 없다”며 서둘러 부인했다.

이 소동은 정돈되지 않은 캠프 상황을 대외에 노출시킨 해프닝이기도 하지만 반 전 총장이 사회경제정책에서만큼은 ‘진보적’인 색깔을 입혀야 한다는 압박감의 표현이었다. 외교안보영역에서는 보수층의 지지를 얻으면서 사회경제부문은 지난 대선에서 ‘복지와 경제민주화’를 내걸고 외연을 확장한 박근혜 대통령처럼 되고 싶은 것으로 판단된다.

실제 보도에 나온 7개 공약은 △청년 초봉 200만원 △해외 청년 일자리 확충 △특성화고 무상화로 조기취업 유도 △보건·의료 등 공공 일자리 확대 △국내 유턴기업 지원 확대 △전국을 4차 산업 전초기지화 △기업 활동 저해하는 규제시스템 전면 조정 등이 골자였다.

공공일자리 확대를 제하면 이는 ‘기업 프랜들리’ 이명박(MB) 색채가 진해 이 보도를 사실로 인정할 경우 이명박-박근혜 경제정책 판박이란 비판에 휩싸일 공산이 컸다. 실제 반 전 총장 캠프에 참여한 인사도 MB ‘정책통’ 곽승준 고려대 교수 등 MB 쪽 인사들이 정책캠프에 합류해 주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상황을 보면 반 전 총장 캠프는 거의 백지상태인 사회경제정책 공약을 MB라인이 주도해 만들 것이란 추측도 무리가 아니다. 이들이 MB의 ‘실용정신’을 구현해 ‘진보적 보수주의’ 정책을 내놓을 개연성이 크다. 즉 표심을 잡기 위해 복지확대와 재벌개혁, 조세정책, 노동정책 등의 부문에서 ‘국민 눈높이’란 이름으로 적당히 ‘진보색’을 더할 것이란 예상이다.

그러나 반 전 총장은 ‘진보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였지만 보수주의자다. 안보에서는 ‘개인’이 국가에 복무해야 하고 사회경제문제는 국가보다는 개인의 책임을 더 우선하는 전형적인 한국적 보수주의 틀을 가졌다.

청년 인턴제 확대나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 “정 할 일이 없으면 자원봉사자로 세계를 다녀보는 게 어떠냐”는 반 전 총장의 발언은 사회문제에 있어 국가가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데 대한 인식보다는 ‘개인’의 영역이라는 인식의 발로다.

그런 그가 사회경제공약으로 ‘진보적인 가치’를 수용할 경우 ‘진정성’ 논란은 불가피하다. 특히 ‘복지와 경제민주화’ 공약을 내걸고 당선됐던 박 대통령이 집권 후 이를 축소 내지는 폐기한 것을 국민들이 경험했기 때문에 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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