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국민의 시선이 쏠렸던 국정조사 재벌총수 청문회가 끝났다. 예상했던 것처럼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그나마 예상치 않았던 삼성, SK, LG그룹의 전경련 탈퇴 선언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미래전략실 해체 발언 정도가 눈에 띄었다.

이미 생방송으로 전국에 방송되는 것을 감안하며 청문회에서 폭탄발언이 나오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 예상됐다. 더욱이 자칫 말실수라도 하면 포괄적 뇌물공여죄에 저촉될 수 있다 보니 말을 최대한 조심스럽게 했다. 재벌 총수 9명이 청문회에 출석한 것은 보기 드문 부끄러운 장면이었다. 평소에 얼굴 보기도, 목소리는 듣기는 더욱 어려운 이들의 목소리를 열 시간 넘게 듣는 국민들은 신기할 따름이었다. 오랫동안 기업에 출입했던 기자들 중에도 목소리를 처음 들어보는 이들도 있는 듯 했다. 마치 재벌총수판 ‘복면가왕’을 보는 것처럼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찾아보는 재미까지 있었다.

재벌총수 9명 모두는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에 출연한 것이 문화융성과 스포츠 발전을 위해 자발적으로 냈다고 말했다. 대부분 ‘정부가 하는 일에 반기를 들 수 있겠느냐’는 것에는 동의를 하는 듯 보였다.

그래도 그중에 눈에 띄는 이들도 있었다. 하태경 의원이 전경련을 미국의 헤리티지재단, 브루킹스연구소와 같은 씽크탱크로의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했고 구본무 LG 회장도 “전경련을 헤리티지재단처럼 운영하고 전경련은 재계 친목단체로 남아야 한다”고 동의했다. 구 회장 발언의 방점은 전경련이 친목단체로 남아야 한다는 것이 아닌 헤리티지재단처럼 이제는 그 명실(名實)을 업그레이드해야 한다는 데 있다. 아무도 선뜻 전경련의 발전적 해체를 입에 올리지 못했지만 구 회장은 당당히 말했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두 재단에 출연을 했지만 그렇다고 청탁할 것이 없는 LG의 상황을 봤을 때 구 회장의 발언은 그만큼 ‘빚진 게 없다’는 자신감에서 나온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손경식 CJ 회장도 주목을 받았다. 손 회장은 조원동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 전화를 해 이미경 부회장의 퇴진을 요구했으며 이는 대통령의 뜻이라고 말했다고 밝혔다. 이미 이 부회장 측이 녹음 파일을 공개했고 많은 국민이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아직까지 살아있는 권력자인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손 회장은 고령을 의심케 하는 또렷한 목소리로 그간의 사정을 얘기해 국민의 갈증을 조금은 씻어줬다.

두 사람 외에 국민에게 청량감 넘치는 이른바 ‘사이다’ 발언을 한 이는 주진형 전 한화증권사장이다. 주 전 사장은 그룹 내부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 과정에서 삼성물산 주식이 상대적으로 저평가되고 제일모직 주식이 상대적으로 고평가된 것을 지적하며 합병에 반대하는 보고서를 냈다. 이후 자리에서 물러날 수도 있다는 ‘겁박’에도 주주로서, 증권맨으로서 그럴 수 없다며 2차 보고서까지 낸 강단 있는 모습을 보여줬다. 더욱이 청문회를 마치는 소회에서도 대기업을 ‘조폭’과 견주며 내부 시스템을 비판했다.

혹자는 주 전 사장이 ‘이미 떠난 사람’이기에 ‘더불어민주당과 친분이 있어’ 뒷배를 믿고 그렇게 한 것 아니냐고 미심쩍어 하고 있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의 말에는 팩트와 혼자만의 생각인 게 혼재돼 있다. 모두 ‘아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루 종일 청문회를 시청하고 ‘알맹이는 하나도 없네’ 하며 불만을 드러낼 수도 있고 ‘이럴 줄 알았다’고 치부할 수도 있다. 많은 국민들은 재계 총수들이 이런 부끄러운 자리에 다시는 나오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털어도 먼지 나지 않는 기업이 돼 재벌총수 청문회는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옛날이야기가 됐으면 한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소신 있는 발언을 한 이들에게 응원과 함께 다시는 이 같은 사이다 발언 모습을 TV에서 영원히 보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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