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이 도륙되고 있었다. 최순실 씨 때문에 꺼내든 대통령의 개헌 카드는 바로 그 최순실 씨 때문에 한나절도 못 가서 약발이 끝났다. 어제(24일) jtbc의 보도로 현 정부 출범 이후 대한민국에서 ‘공(公)’은 유린되고 실종됐다는 강력한 정황이 드러났다. 국가 기밀문서가 생산되자마자 거의 실시간으로 최 씨에게 전달되고, 최 씨가 그 문서에 손을 댄 흔적이 발견되었다. 청와대 인터넷망은 내부와 외부가 분리돼있으며, 이동식 저장장치(USB)도 사용이 금지돼있다고 알려져있다. 그러나 국무회의 자료와 대통령연설문 수 십 건이 최 씨에게 마치 결재를 위해 보고되듯 전달됐다. 전달자가 누구일지, 누가 그런 작업을 할 수 있는지 짐작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아보인다. 박관천 전 경정의 대한민국 권력서열 거론이 허언만은 아니었음도 가늠된다.  

청와대에서 벌어진 국정농단과 국기문란 정황이 확인되기 불과 몇 시간 전, 대통령은 국회에서 “개헌의 적기”라며 기습적으로 개헌카드를 꺼내들었다. 위기 탈출용 ‘최순실표 개헌’카드였다. 최 씨측 컴퓨터에서 그런 문서들이 발견되고 보도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대통령의 개헌카드는 주권자인 국민을 대놓고 우롱한 셈이다. 최순실표 개헌은 바로 그 최순실 씨에 의해 뒤엎어져버렸다. 동시에 대한민국의 국가로서의 존재이유와 최소한의 자존심도 시궁창에 내던져졌다.    

국가의 공적 기능 상실 앞에 비판이나 탄식은 한가해보이기까지 하다. 상상 이상의 이 사태 앞에 청와대는 말이 없다. 최 씨가 그런 기밀문서들을 사전에 보기를 원했는지, 그래서 대통령에게 부탁했고 대통령이 들어준 것인지, 아니면 대통령이 먼저 그렇게 하라고 지시를 내렸는지 아직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어느 경우가 되었건 행정부 수반이자 국가 원수의 자격은 상실됐다고 보는 게 맞다. 

문제는 앞으로다. 
이런 지경에 이르러서도 현 정부가, 아니 대한민국의 공적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리라 기대하는 것은 가당찮을뿐더러 무망하다.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르른 것을 규탄하고 또 규탄해야 하건만, 극도의 흥분과 공황상태일 청와대가 무슨 일을 할지, 어떤 카드를 꺼내들지가 규탄에 앞서 겁나고 걱정된다. 이 지경에 그런 것을 걱정해야 하는 게 어처구니 없지만, 현 정권이 여지껏 해온 바가 그런 걱정을 당연하게 만든다. 

최순실 씨 국내 압송과 수사, ‘최순실 국정농단사건’ 관련자 처벌, 청와대비서진 전면개편, 내각총사퇴 등의 얘기가 나온다. 대통령탄핵 또는 퇴진 요구도 나오고 있다. 당연한 정치적 반응이자, 분노의 표현이라 생각된다. 

핵심적 문제는 ‘현 정권에게 이토록 엉망진창이 돼버린 국정을 수습할 자격과 능력이 있는가’ 라는 점이다. 국가시스템을 마비시켜버린 그 손으로 무엇을 고치고 수습하라고 할 수 있을까. 일을 다 망쳐버린 사람에게 다시 백지에서 시작해 제대로 돌려놓으라고 한들 그게 가능할까, 가능 이전에 적절한 걸까. 이제 대통령이 무슨 말을 하고 무엇을 수습책으로 내놓은들 신뢰를 얻을 수 있을까. 신뢰를 상실한 정권이 무엇을 집행할 수 있을까. 

주권 유린과 국기문란이 통탄스럽지만, 지금이라도 대통령은 모든 것을 낱낱이 이실직고한 뒤 석고대죄해야 한다. 그 이후 국민들의 처분을 공손하게 기다리는 게 옳다. 선례가 없는 사상 초유의 일이라 주권자인 국민들이 황망해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주권자인 국민들 의중을 정확히 헤아리는 것 역시 지난하다는 것은 불문가지. 대선이 불과 1년 앞인데 진퇴 여부를 국민투표로 물을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그간 저질러진 일에 대해 헌법과 법률이 정한 바에 따라 상응한 처분을 하는 수 밖에 없다. 일단은 대통령의 자초지종 고해가 최우선 사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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